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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영국' 반전 이끈 포클랜드 전쟁 40년..英 18~24세 26%는 "모른다"

류지미 2022. 4. 3. 15:33

'저무는 영국' 반전 이끈 포클랜드 전쟁 40년..英 18~24세 26%는 "모른다"

이철민 선임기자

입력 2022. 04. 03. 09:39 수정 2022. 04. 03. 10:14

 

 

존슨 총리 등 현 정치인들의 청소년 시절 "영국 우월주의" 키워
아르헨티나에선 헌법∙지폐∙문신∙거리 표지판에 여전히 "우리 땅"

2일은 40년 전 아르헨티나 남단에서 동쪽으로 640여 ㎞ 떨어진 영국령(領) 포클랜드 제도(스페인명 말비나스)를 아르헨티나가 기습 공격한 날이었다. 이후 두 나라는 선전 포고도 없이 74일간 전쟁을 치렀고, 영국군 255명, 아르헨티나군 649명이 전사했다.

 

                                                           포클랜드 제도/미해군연구소(USNI)

 

6월14일 아르헨티나가 항복하면서,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는 영국의 쇠퇴하는 이미지를 돌이킬 수 있었다. 영국의 승전(勝戰)은 ‘영국 예외주의’라는 애국심을 되살렸고, 당시 10대였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보수당 정치인들의 청소년기를 형성했다.

 

포클랜드섬(말비나스섬)의 영유권을 둘러싼 두 나라간 분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영국에선 ‘잊힌 전쟁’이 됐다. 3월말 한 조사에서 18~24세 Z세대의 26%는 이 전쟁을 “들어본 적 없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10%는 포클랜드가 영국 해협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르헨티나 군부의 오판(誤判)

동서 두 개의 섬을 주축으로 구성된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가 1816년 스페인에서 독립할 때 획득한 섬들인데, 1833년 영국이 강제 병합하고 영국인들을 이주시켰다. 원양어업이 발달하면서, 1840년 영국은 이 군도를 왕령(王領) 식민지(Crown Colony)로 삼았다.

 

하지만, 마거릿 대처 정부는 애초 영국 본토에서 1만2000여 ㎞나 떨어진 포클랜드 제도와 주변 섬들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대처는 남극 초계함인 인듀어런스(Endurance)함도 철수시켰고, 니콜러스 리들리 당시 외무장관에게 아르헨티나에 ‘매각 후 임대’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아르헨티나 잠수함이 포클랜드 인근에 출몰하며 공격 기회를 엿본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아르헨티나 군부 출신의 레오폴드 갈티에리 대통령은 대처에게 아르헨티나군을 막아낼 자원∙의지∙외교적 수단이 별로 없다고 봤다. 갈티에리는 영국의 병합 150주년이 가까워지자 침공 준비를 했다.

 

포클랜드(말비나스) 전쟁 발발 40주년인 2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의 한 전몰장병 묘지에서 유족들이 전사자를 추모하고 있다./AFP 연합뉴스

 

◇“대응 안 하면, 영국은 몇 달 내 딴 세상 된다” 경고에…

 

4월2일 오후,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 제도의 중심 도시인 포트 스탠리를 기습 상륙해 점령했다는 소식이 영국 내각에 알려졌다. 암울한 분위기 속에 열린 회의에서 일부 각료들은 아르헨티나와의 ‘협상’을 원했다. 심지어 국방부 장관도 전쟁을 원치 않았고, 사직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참모총장 헨리 리치 제독는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왜 그러하냐”는 대처의 질문에, 리치는 “우리가 질질 끌며 조심조심하다 보면, 몇 달 내에 우리는 우리 말이 안 먹히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처는 리치 제독을 무표정하게 보며 씩 웃었다. 대처는 ‘쇠퇴’가 영국 사회 담론의 주(主)테마였던 1979년 총선에서 “유럽의 절반을 패배시키고 절반을 구해 해방시킨 우리인데, 지금 우리 모습을 보라”며 영국의 부활을 약속해 승리했다. 그리고 이제 ‘저무는 강대국’의 운명을 거스를 참이었다. 대처에게 이 전쟁은 ‘주권 수호’라는 원칙을 지키고 의무를 수행하는 명백한 문제였다.

 

하지만 수적으로는 아르헨티나가 앞섰다. 영국은 42대의 해리어(Harrier)기가 주축이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이보다 제공력(制空力)이 뛰어난 전투기 50대 등 122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전투기는 영국 전함을 공포에 떨게 한 프랑스제 엑조세 공대함(空對艦) 미사일을 장착했다. 아르헨티나군은 1만 명의 군인도 징집했다.

 

대처의 맹방인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저 아래쪽의 작고 추운 섬들”을 놓고 왜 두 우방국이 싸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건은 남미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자도 필요했다. 미 해군은 영국군의 포클랜드 제도 탈환은 “군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

 

 

◇영국, 병력 수용 위해 상선∙유람선까지 징발

 

대처 정부는 4월6일 전시 내각을 구성하고, 항모와 잠수함, 전함 등 모두 127척을 포클랜드 해역으로 보냈다. 2700여 명의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상선과 호화유람선까지 징발했다.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이런 결기를 예상하지 못했다. 포클랜드 제도의 동쪽 사우스 조지아 섬에선 4월25일 영국군이 상륙하자마자 아르헨티나군이 항복했다. 전투의 주(主)무대였던 포클랜드에선 동쪽 섬의 중심 도시인 포트 스탠리부터 공격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영국은 서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1982년 5월4일 영국 해군의 구축함 셰필드함이 아르헨티나 공군기가 발사한 AM39 엑조세 크루즈 미사일이 맞아 침몰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영국 전함이 침몰한 첫 사건이었다./자료사진

 

74일간의 전투 끝에, 아르헨티나는 항복했다. 영국군 피해도 컸다. 아르헨티나 전투기의 폭격과 엑조세 미사일 공격으로 셰필드함을 비롯해 전함 6척이 침몰했다. 그러나 영국의 저명한 전쟁학 학자인 로런스 프리드먼은 “아르헨티나 군은 장교와 대부분 농민 출신인 징집병 간에 갈등이 있었지만, 모두 자원병인 영국군은 직업적인 군인의식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아르헨티나 군부가 처음 포클랜드를 점령했을 때 아르헨티나에선 애국심이 들끓었으나, 전쟁에 패한 뒤 3일 뒤 갈티에리 대통령은 실각하고 아르헨티나엔 민주화의 막이 올랐다.

 

◇전쟁 승리 후, “영국은 특별하다” 자긍심 치솟아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처는 1983년과 1987년 연거푸 보수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코노미스트는 “당시 경제가 살아나고 야당이 허약하기도 했지만, 전쟁 승리가 없었으면 그런 압도적 승리를 못했을 것”이라고 평했다.

 

대처는 강력해진 지도력으로 호전적인 노조에 맞섰다. 영국 해병대에 징발됐다가 사우스햄턴으로돌아온 유람선에는 ”철도 파업(rail strike)을 취소하지 않으면, 폭격(air strike)하겠다”는 배너가 나붙었다.

포클랜드 전쟁 승리는 바닥으로 가라앉았던 ‘영국은 특별하다’는 애국적 자긍심을 다시 휘저었다. 전쟁 승리는 당시 17세였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를 비롯해 현재 영국 정치인들의 10대 청소년기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유럽혐오주의를 부추겼던 전 영국독립당 대표인 나이젤 파라지는 “전쟁 뒤에 막대한 애국주의가 솟구치고, 국가 차원의 자신감이 새로워졌다”고 말했다. 이 영국 예외주의는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로 이어졌다.

 

이코노미스트는 또 “이 전쟁으로 정치를 결의 대(對) 유화, 자유 대 압제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가 굳어졌고, 양자 간 경합은 지금 다시 두드러지고 있다”고 평했다.

 

벤 월러스 영국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19일 보수당 모임에서 “대처는 국력에, 우리의 싸움은 합법적이고 정당하고 옳은 것이라는 ‘도덕적 요소’를 장착시켰다”며 “이 도덕적 요소가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을 무장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국민 81% “포클랜드는 우리 땅”

 

두 나라는 1989년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그러나 포클랜드 영토 분쟁은 계속 진행형이다. 2021년 여론조사에서 아르헨티나 국민의 81%는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아르헨티나에선 교과서∙지폐∙벽화는 물론 심지어 사람들 문신(文身)에도 “말비나스는아르헨티나 것(Las Malvinas son Argentinas)”이라는 문구가 있다. 1994년 개정 헌법은 말비나스를 비롯한 주변 섬에 대한 “주권을 확인하고, 이들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 행사는 아르헨티나 국민의 영구적이고 변경할 수 없는 목표”라고 명시했다. 거리에는 말비나스까지의 거리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포클랜드 전쟁 참전 군인이었던 아르헨티나의 안토니오 곤잘레스(61)씨가 지난달 24일 자신의 팔에 새긴 말비나스섬 문신을 보여주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50페소짜리 아르헨티나 지폐에 그려진 말비나스(포클랜드) 섬 지도.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났지만, 아르헨티나인들의 절대 다수는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AFP 연합뉴스

 

산티아고 카피에로 아르헨티나 외무장관은 2일 영국 신문 가디언 기고문에서 “1982년 전쟁은 양국 분쟁의 성격을 바꾸지 못했다”며 “영국이 포클랜드의 주권을 놓고 대화하기를 거부한다면, 양국 관계는 계속 긴장 상태에 놓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재 3500명에 달하는 포클랜드섬 주민의 절대 다수(99.8%)는 ‘영국인’이기를 원한다. 2013년 3월에 한 주민 조사에선 1500 명 중에서 단 3명만 ‘영국 잔류’에 반대했다.

 

한편, 영국에선 이젠 ‘잊힌 전쟁’이 됐다. 영국 퇴역군인 자선기관인 ‘헬프 포 히어로즈(Hep for Heroes)’가 3월말 실시한 온라인 설문 조사에선 2100여 명의 응답자 중 11%는 이 전쟁이 영국의 침략으로 시작했다고 답했다. 18~24세 Z세대의 26%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응답자의 4%만이 이 전쟁을 둘러싼 질문에 올바르게 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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