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옥잠화 - 구십춘광(九十春光 )

류지미 2022. 5. 31. 21:16

Korean Arts

2021. 8. 12.

옥잠화 - 구십춘광(九十春光 / long waterway), 1942

https://www.youtube.com/watch?v=sMG1pw0A-UQ

옥잠화(玉簪花) - 구십춘광(九十春光)
조명암 작사 / 이운정(이면상) 작곡, 1942

도화강변 배를 띄워 흘러를 갈 때
끝없이 들리는 갈대피리 그 소리
듣고 나면 열아홉의 웃음품은 아가씨
가슴에 꽃이핀다 구비구비 구십리

시들었던 꽃가지가 다시 푸르러
청제비 춤추던 그 시절이 몇 핸고
물어보면 구름 속에 반짝이는 저 별빛
물결에 아롱진다 구비구비 구십리

흘러가는 뱃머리에 달빛을 싣고
노래를 부를까 옷소매를 적실까
물에 띄운 고향하늘 어머님이 그리워
뱃전에 편지쓴다 구비구비 구십리

 

<九十春光>은 가수 玉簪花님이 42년 12월에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발표한 新歌謠입니다.<黃浦江 뱃길;C.40897/高雲峰노래>과 같이 발매된 이 노래는,李嘉實(조명암)作詞/李雲亭(이면상)作曲/古關裕而編曲의 작품입니다.



*옥잠화(玉簪花, 1927~? 본명 김복남/金福男): 1940년대 콜롬비아 레코드 전속 가수, 15세때 '하르빈 풍경'(1941)으로 데뷔, 대표곡:양산도 봄바람, 구십춘광(九十春光), 아리숭 고개, 산중일기, 영산강 뱃사공...1947년 결혼과 함께 미국(호놀룰루)으로 이민...옥잠화는 백합과에 속한 여러해살이 산 풀꽃(백합목/ 꽃말: 사랑의 망각).

 

*조명암(趙鳴岩,1913~ 1993, 본명:조영출/ 趙靈出): 유명했던 시인·작사가·극작가·연출가이나 1948년 월북한 관계로 그의 대중가요 작사내용은 1950년 이후 반야월등 다른 작사가에 의해 대부분 개사(改詞).


*이면상(李冕相, 이칭:이운정/李雲亭 1908~1989, 함흥): 작곡가, 해방후 월북(북조선음악동맹 위원장), 주요작품: 리면상가요곡선집, 진주라 천리길, 사랑도 팔자, 원앙가, 밀림아 말하라, 눈이 내린다.

 

봄의 90일 동안을 이르는 말. 노인의 마음이 젊은이처럼 젊다는 뜻.

석 달에 이르는 봄의 화창한 날씨라는 뜻으로 노인의 마음이 청년처럼 젊음을 이르는 말이다

노인의 마음이 청년같이 젊음을 이르는 것과 봄의 석 달 구십일 동안을 의미하기도 한다.

 


- 백수풍신(白首風神)은 ‘머리가 흰 풍채 좋은 노인’을 말한다.
-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은 ‘머리가 몹시 세었다는 것’을 과장한 말이다. 즉 ‘늙은 몸의 서글픔을 표시한 것’이다.
- 월하노인(月下老人)은 ‘남녀의 인연을 맺어 준다는 전설상의 노인’을 일컫는다.□ 참고
- 월하노인과 월하빙인(月下氷人)은 같은 말이다. 월하노인과 빙상인(氷上人)이란 말을 합쳐 약어로 중매인을 일컫는다.


적공지탑 불타 (積功之塔 不墮) 공든 탑이 무너지랴.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한 일은 그 결과가 반드시 헛되지 아니함을 비유한 것이다.

 

 

<梁山道 봄바람>은 가수 玉簪花님이 43년 2월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표한 新歌謠입니다.

<第三 아리랑;C.40906/玉簪花노래>과 같이 발매된 이 노래는,李嘉實(본명;趙靈出,타명;趙鳴岩 )作詩/李雲亭(본명;李冕相)作曲/金駿泳編曲의 작품으로,<하르빈 風景(41/10)>을 취입하며 데뷔한 玉簪花님이 불렀읍니다.

41~43년간에 <풀각시 靑春>,<아리숭 고개>,<空山夜月> 외에 상당수의 곡을 발표했던 玉簪花님이,43년에 들어, 親日歌謠 <파랑새>에 이어 발표한 <梁山道 봄바람> 입니다.

 

 

 

 

북한의혁명가극-극본:密林啊,說吧(밀림아,말하라)(혁명가극)(외국문출판사(평양),1974(초),52쪽,상급)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아리랑고개를넘어간다는내용이있는북한의혁명가극-밀림아 말하라(密林啊,說吧)

 

 

이면상 (李冕相)

이운정(李雲亭), 이춘상, 이훈상街村冕相

 

대표곡 ; 리면상가요곡선집, 진주라 천리길, 사랑도 팔자, 원앙가, 조국보위의 노래, 밀림의 역사, 밀림아 말하라, 승리의 5월, 눈이 내린다

 

1908년 4월 8일, 함남 함주,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해 15세 때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난으로 퇴학당하고 식산은행 함흥지점에서 급사생활을 했다.

 

1923~25년 함흥사범학교 특설과에서 음악공부를 했으며, 1925년 3월 졸업했다. 졸업 후 원산제2보통학교의 훈도를 지내면서 풍금과 바이올린을 배우고 음악에 관심을 가져 동요와 민요를 채보·연구했으며, 20여 편의 동요를 묶은 작곡집을 발표하기도 했다. 1929년 11월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동조, 참여했다가 퇴직 처분을 받은 후,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음악학교에 입학, 1933년 4월 졸업했다. 졸업 후 귀국, 포리돌(Polydor)레코드사 전속 작곡가로 취직해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 민요풍의 가요와 신민요, 대중가요를 작곡, 발표했다. 1937년 일본 빅타(Victor)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겨 작가로 일하면서 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울산타령〉·〈뻐꾹새〉 등 민족의 수난을 반영한 민요조의 서정가요들을 여러 곡 발표했다.

 

해방 이후에는 문화통신사기자로 활동하다가, 10월쯤 고향으로 돌아가 함경남도음악건설동맹위원장이 되었고, 함양악단을 조직, 활동했다. 1946년 조직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산하의 북조선음악동맹의 위원장으로, 1947년부터 1989년까지 활동했다. 1953년 9월 조선작곡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 5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겸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2월 평양음악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1958년 1월 북한·소련친선협회 중앙위원에 임명되었고, 6월 북한·프랑스친선협회 부위원장, 7월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59년 8월 김일성의 만주 항일 무장투쟁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곡 작품 「밀림아 말하라」로 인민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11월 북한·네팔친선협회 위원장이 되었다. 1961년 1월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3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북한 최고의 예술가에게 부여되는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고, 9월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 11월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1년 4월 예술가 대표단장으로 쿠바를 방문했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이 되었다. 1973년 5월 문화대표 단장으로 루마니아를 방문했다.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1년 7월 피바다가극단 창립 10주년 기념 보고회에, 북·중우호조약 체결 20주년 기념 집회에 참석했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86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에도 선출되었다.

 

북한의 음악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공훈예술가(1955), 인민상 계관인(1958), 인민예술가(1961) 칭호를 받았으며, 1972년에는 김일성상 계관인이 되었다.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가요 작품으로는 〈소년단행진곡〉(1946)·〈빛나는 조국〉(1947)·〈조국보위의 노래〉(1949)·〈압록강 2천리〉(1952)·〈영광의 땅 보천보〉(1955)·〈어머니 당이여〉(1964)·〈끝없는 이 행복 노래부르네〉(1965) 등이 있으며, 민족적 생활감정과 시대정서를 진실하고 감동적으로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그는 '피바다식 가극'을 비롯해 무대예술 작품을 위한 음악을 창작하여 주체적 음악예술 발전에 공헌한 바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북한의 가극 형성과 음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 4월 모란봉 지상극장에서 그의 80회 생일을 기념하는 이면상음악회가 개최되었다. 1989년 6월 25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