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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

류지미 2022. 7. 20. 17:31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로 즉위한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왕자로 야심 만만한 호걸이었다. 수양대군은 문종이 죽고 13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자, 왕위에 야심을 품고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을 당여(黨與)로 삼고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먼저 고명대신(顧命大臣)인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한 다음, 1455년(단종 3) 6월 드디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 세조의 잔인한 왕위 찬탈에 분개한 6신을 비롯한 많은 문무신은 단종 복위를 결의하였다.
 
마침 세조가 상왕(上王)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청하는 자리에서 성승(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를 별운검(別雲劒)으로 임명하자 곧 그 자리에서 거사, 세조와 측근 관료들을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한명회의 주장으로 장소가 협소하다 하여 세조가 연회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하도록 명하고 또 왕세자도 질병 때문에 연회 자리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박팽년과 성삼문의 주장으로 거사를 미루게 되었다.

 

이 때 단종 복위에 참여했던 사예(司藝) 김질(金礩)이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정창손이 즉시 김질과 함께 대궐로 가서 반역을 고발하였다.
 
세조는 이들을 직접 국문(鞫問)하였다. 이에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응부 등이 차례로 국문을 당했으나 모두 늠름한 태도로 공초(供草),신문한 조사서)에 승복하였다.
 
박팽년은 옥에서 죽고 유성원과 허조는 거사 실패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결하였다. 이들은 옥이 일어난 지 7일 만인 6월 9일의 단기간에 모두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 운동의 주모자가 꼭 사육신이라고 단정할만한 자료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추국(推鞫) 과정에서 주모자로 생각될만한 사람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즉, 김질이 고변할 때 성삼문의 말이라 하여 모의자로서 금성대군·성삼문·이개·하위지·유응부를 들었고, 성삼문이 잡혀와 첫번 국문 때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이 같이 모의했다 하고 이 계획을 알고 있는 자는 유응부와 박쟁이라고 말하였다.
박팽년의 공초에서는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쟁·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이휘(李徽)·박중림(朴仲林) 등 13인이 모의한 것을 자백하고 있다.

 

또, 김문기는 도진무(都鎭撫)의 직책을 가지고 있음을 들어 박팽년과 성삼문에게 “그대들은 궐내에서 성사하고 나는 밖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기다리겠다.”는 말이 보이고 있지만, 주모자임이 확실한 성삼문과 박팽년을 제외하고 사육신이 꼭 누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건 5일 만에 그 전모를 밝힌 공식 명단에서 이개·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박중림·권자신·김문기·성승·유응부·박쟁·송석동·최득지(崔得池)·최치지(崔致池)·윤영손·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 등 17인이 몰래 반역을 도모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순서대로 여러 사람의 이름만 거론했을 뿐, 역시 사육신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나타나 있지 않다.
 
단종 복위 계획의 주동자가 육신으로서 확실히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남효온(南孝溫)의 『추강집(秋江集)』에 나오는 6신전(六臣傳)이다. 여기에는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의 순서로 6신의 이름이 명백히 밝혀져 있다.
 
남효온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6신의 옥이 일어날 때에는 겨우 두 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였지만, 그 뒤 세조의 즉위를 불의로 얼룩진 찬탈 행위로 규정하고 세조를 비난,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또 1478년(성종 9) 4월에는 소릉(昭陵: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 복위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남효원은 또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무오사화의 도화선을 만든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며, 소릉 복위를 청한 죄로 부관능지(剖棺陵遲)의 극형을 당하였다.
 
남효온이 사육신의 명단을 어디서 취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해 큰 옥이 벌어지고 단종마저 영월로 귀양가 피살되자, 이 사건을 은밀히 동정하던 사람들에 의해 사육신의 이름이 입으로 전해 내려온 것을, 사종(師宗)인 김종직이나 종유(從遊)인 김일손(金馹孫)으로부터 확인해 남효원의 문집에 수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종반정 후 사림파의 절의 문제는 그 당시 조신들로부터 국력배양면에서 거론되었다. 즉, 성삼문과 박팽년 등의 일은 난신(亂臣)이라는 죄명을 벗기고 충신으로 평정하기를 건의하는 상소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또, 1511년(중종 6) 3월에 그동안 발간이 금지되었던 『추강집(秋江集)』이 인출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사육신 문제가 정치적으로 공인되는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34년이 지난 1545년(인종 1) 4월에 경연에서 시강관 한주(韓澍)의 입으로 『추강집(秋江集)』에 나오는 사육신의 이름을 그대로 들고 그들의 충절을 거론했으며, 이 사실은 곧 『인종실록(仁宗實錄)』에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사육신 문제는 선조 때에 조상(세조)을 무욕(誣辱) 거짓으로 욕되게 함)하는 허황된 일이므로 기휘(忌諱) 꺼리어 삼가거나 감춤)에 저촉된다 하여 수난을 겪을 뻔했으나, 영의정 홍섬(洪暹)의 지극한 간청으로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점점 이 문제가 올바로 인식되어감에 따라 1691년(숙종 17) 12월에 이르러 사육신을 정식으로 국가에서 공인, 복관시키고 묘우(廟宇)를 만들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1791년(정조 15) 2월에는 절의 숭상의 범위를 더 넓혀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하였다.
 
즉, 육종영(六宗英)·사의척(四懿戚: 송현수(宋玹壽)를 비롯한 4인의 외척)·삼상신(三相臣: 황보인·김종서·정분(鄭苯) 등 3정승)·육신(六臣: 성삼문·이개·유성원·박팽년·하위지·유응부)·삼중신(三重臣: 민중(閔仲)·조극관(趙克寬)·김문기)·양운검(兩雲劒: 성승·박쟁) 등으로 구분 선정해 정단배식인원(正壇配食人員)을 32인으로 편정하고 있다.
 
이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비롯한 국내의 참고 문헌을 널리 고증하게 하여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이었다. 이와 같이 사육신 문제는 오랜 기복(起伏)을 거듭한 끝에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국민들에게 숭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의 남한강 상류에 있는 청령포(淸泠浦) - 단종의 유배지

 

조선 제 6대 왕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1456년 박팽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되어 모두 죽음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고
다음해인 1457년(세조 3) 세조(世祖)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창절서원. 창절사(彰節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에 의하여 피살되거나,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원래 장릉 곁에 육신창절사가 있었는데 숙종 11년(1685)에 감사 홍만종이 도내의 힘을 모아 개수하여 사육신인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와 호장이었던 엄홍도, 박심문등을 모셨으므로 팔현사가 되었다. 숙종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왕릉 밖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정조 15년(1791) 창절사에 단을 세우고 생육신 중 김시습, 남효온을 추가로 10인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 오고 있다.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사육신(死六臣)



단종의 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이를 반대하며 단종의 복위를 추진하다 수양대군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조선 전기의 6명의 충신

성삼문(成三問)

(태종(太宗) 18년 1418 - 세조(世祖) 2년 1456년)
자(字)는 근보(槿甫) 눌옹(訥翁) 호(號)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本貫)은 창녕(昌寧) 부(父)는 도총관(都摠管) 승(勝)이고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이다.
세종(世宗) 2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세종(世宗) 29년 문과중시(文科中試)에 장원(壯元)했다.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에서 집현전(集賢殿) 수찬(修撰)을 거쳐 왕명(王命)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編纂) 하였다.
경정관(逕庭官)이 되어 항상 세종(世宗)을 가까이에서 모셔 총애(寵愛)를 받았다.
세종 24년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하위지(河緯地), 이석정(李石亭) 등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진관사(津管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했고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등과 함께 한글의 창제(創製)를 앞두고 당시(當時) 요동(遼東)에 유배(流配) 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十三番)이나 래주(來注)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明)나라에 여러번 건너가서 음운(音韻)과 교장(敎場)의 제도(制度)를 연구(硏究) 그 정확(正確)을 기(期)한 끝에 세종(世宗) 28년(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頒布)케 했다.
세종(世宗)이 만년(晩年)에 숙환으로 온천(溫泉)에 갈때도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이개(李塏) 등과 함께 항상(恒常) 배종 했다.
단종(端宗) 1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집현전(集賢殿)신하들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의 호(號)를 내리자 모두들 순번(順番)으로 축하연(祝賀宴)을 베풀었으나 이를 수치(羞恥)로 여겨 혼자 열지 않았다.
단종(端宗) 3년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세조(世祖)가 단종(斷種)을 내쫓고 왕위(王位)에 오르자 국새(國璽)를 않고 통곡 했으며 다음해 좌부승지(左副承旨)로서 아버지 승(勝) 박팽년(朴彭年)등과 같이 단종(斷種)의 복위(復位)를 협의(協議) 4월 명나라 사신(使臣) 송별연회석상(送別宴會席上)에서 운검(雲劒)을 쥐게 된 아버지와 유응부(兪應孚)가 세조(世祖)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정인지(鄭麟趾)등 일파(一派)를 없애기로 했으나 당일(當日) 운검(雲劒)을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후일(後日)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에 같은 모의(謀議)에 가담했던 김질(金瓆)이 성사(成事)가 안될 것을 우려하여 밀고(密告)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등과 함께 체포 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居烈)의 극형(極刑)을 받았다.
이에 부(父)인 승(勝)도 주모자(主謀者)로 극형(極刑)을 받았고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의 세 동생(同生)과 맹담(孟澹), 맹년(孟年), 맹종(孟終)과 갓난아기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殺害) 되었다. 영조(英祖) 34년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이다. 능서(能書 글씨를 잘 썼다)
선생(先生)의 시(時)는 많이 전(傳)하나 병자(丙子)년 6월 8일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끌려 갈 때 대여섯 살 밖에 안된 그의 딸이 따라오며 울부짖으니 그는 뒤돌아 보며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하고는 목에 매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수레가 잠시 머물렀을 때 그의 종이 울면서 술을 올리니 몸을 숙여 받아 마시고 그의 충절(忠節)을 다음과 같이 시(詩)로 나타냈다.

식인지식의인의 食人之食衣人衣 [임의 밥 임의 옷을 먹고 입으며]
소지평생막유위 素志平生莫有違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줄이 있으랴]
일사고지충의재 一死固知忠義在 [이 죽음이 충과 의를 위함이기에]
현릉송백몽의의 顯陵松栢夢依依 [현릉 푸른 송백꿈 속에서도 못잊져라]
*현릉(문종의 능)

박팽년(朴彭年)

1417(태종17)∼1456(세조2)
조선 초기의 학자·충신. 자는 인수(仁 ),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 본관 순천(順天)·한석당(閑碩堂) 중림(中林)의 아들. 1434년(세종 16)문과에 급제,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되어 여러 가지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다. 세종의 유명을 받아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문종을 보필, 문종이 재위 2년만에 돌아갈 때 역시 고명(顧命)을 받아 어린 단종을 돕다가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외직에 있을 때 수양대군(世祖)이 황보인·김종서와 안평대군(세종의 삼남)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 박팽년은 형조참판으로 임명되었으나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잡혀 죽었다. 이때에 함께 화를 입은 성삼문·하위지(河 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와 더불어 사육신(死六臣)이라 한다. 숙종 때 누명을 벗기고, 관작(官爵)을 복구, 시호를 내리고 절개를 표창하였다.
저서 취금헌천자문(醉琴軒千字文)

하위지(河緯地)

(고려 우왕 13년 1387 - 세조 2년 1456)
자(字)는 천장(天章) 호(號)는 단계(丹溪) 연풍(延風) 본관(本貫)은 진주(晉州)이며 부(父)는 담(澹)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이다. 세종(世宗) 17년 생원(生員)이 되고 세종(世宗) 3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壯元) 이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世宗) 36년 집현전 교리(集賢殿 校里)가 되어 「오예의주」(五禮儀註) 상정(詳定)에 참여했다.
세종(世宗) 38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인 형(兄) 강지(綱地)의 탐간죄(貪姦罪)로 사직(辭職)했고 문종원년(文宗元年) 직(直) 집현전(集賢殿)이 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보좌(補座)에 앞서 신정(新定)한 「진설」(陳設)의 교정(校正)과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端宗) 2년 부제학(副制學) 예조참의(禮曹參議)등을 역임(歷任)하고 세조원년(世祖元年)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침착(沈着) 과묵(寡默)한 성격(性格)으로 집현전(集賢殿)에 있으면서 왕의 측근(側近)에서 시정(施政)을 보필(輔弼) 했으며 세조(世祖)의 간청(懇請)으로 부득이(不得已) 벼슬 하는 동안 받은 녹(祿)을 먹지 않고 別室(別室)에 저장(貯藏)해 두었다.
다음해 박팽년(朴彭年)등과 단종 복위(端宗 復位)를 꾀하다가 거사(擧事)가 실패(失敗)하자 체포(逮捕) 되어 거열형(車裂刑)에 처(處)해지고 형제제자(兄弟諸子)도 함께 죽었다.
숙종 신미(辛未)에 복관(復官)되고 영조(英祖) 무인(戊寅)에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사시(賜諡) 정유(丁酉)에 명(命) 정여(旌閭) 선산(善山)에 월암서원, 대구 낙빈서원, 과천(果川)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천(洪川)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 등에 제향(祭享) 능문(能文 글씨를 잘썼다) 시호(諡號)는 충열(忠烈)이다.
전(傳)하는 선생(先生)의 시(詩)가 있다.

사인증사의(謝人贈蓑衣) [도통이를 보낸 준 것에 감사함]
남아득실고유금 男兒得失古猶今 [사나이의 득실을 고금이 다룰게 없고]
두상분명백일임 頭上分明白日臨 [머리위엔 분명이 해가 비치고 있는데]
지증사의응유의 持贈蓑衣鷹有意 [도통이를 보내준 뜻 어찌 몰겠는가]
강호연우호상심 江湖烟雨好相尋 [강호에 묻혀 조용히 살라는 그 참뜻을]

이 개(李 塏)

(태종(太宗) 17년 1417 - 세조(世祖) 2년 1456)
자(字)는 청보(淸甫) 백고(佰高) 호(號)는 백옥헌(白鈺軒)이며 본관(本貫)은 한산(韓山) 이며 이색(李穡)의 증손(曾孫)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이다.
세종(世宗) 18년 문과(文科)에 급제 세종 23년 저작랑(著作郞)으로 『명황계감(明皇戒鑑)』의 편찬에 차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創制)에도 참여했다.
세종 29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세조 2년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이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등과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발각(發覺)되어 혹독(酷毒)한 고문(拷問) 끝에 죽었다. 본래(本來)에는 세조(世祖)와도 친교(親交)가 있어 진상(眞相)을 밝히도록 강요 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처형(處刑) 당했다. 시문(詩文)이 청색하고 하고 글씨를 잘 썼다.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과천(果川)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 연산의 둔암서원(遯巖書院), 홍천(洪川)의 노운서원(魯雲書院),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에 동학사(東鶴寺) 숙모전 영조(英祖) 34년 이조판서(吏曹判署)에 추증(追增) 시호(諡號)는 의열(義烈) 이었으나 뒤에 충각(忠簡)으로 개시(改諡)하다.
선생(先生)의 시(詩)가 전(傳)한다.

제야(除夜)
세율영수진 歲律令垂盡 [이 해도 이제는 마지막인가]
단좌부학사 端坐赴壑蛇 [세월에 쫓기면서 오늘에 이르렀네]
호아수갱루 呼兒數更漏 [아이를 불러 시간을 불러볼까]
환부낙등화 喚婦落燈花 [아내를 불러 등불을 마지막 껐네]
영야운음적 永夜雲陰積 [기나긴 이밤은 왜 구름에 쌓였는가]
엄풍설세사 嚴風雪勢斜 [바람결에 눈발이 날리고 있네]
청담잉촉주 淸談仍促酒 [술잔으로 정담을 나눠 볼까]
불필아융가 不必阿戎家 [아우의 집에 갈 일이 또 없어졌네]

유응부(兪應孚)

(? - 세조 2년 1456)
자(字)는 신지(信之), 선장(善長) 호(號)는 벽량(碧梁) 본관(本貫)은 기계(杞溪)이며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의 한사람이다.
키가 크고 용모(容貌)가 엄정(嚴正)하며 무과(武科)에 급제 세종(世宗) 문종(文宗)의 총애(寵愛)를 받았음며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평안도 절제사(平安道 節制使)를 거쳐 세조(世祖) 원년(元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해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등과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꾀하여 명(明)나라 대신(使臣) 초대연(招待宴)에서 별운검(別雲劍)이 되어 세조(世祖)의 살해(殺害)를 책임(責任) 졌었으나 당일(當日) 운검(雲劒)을 폐(廢)하게 되어 후일(後日)로 미루다가 김질의 배신(背信)으로 탄로(綻露)되어 잡혀서 백면선생(白面先生)들과 동모(同謀) 실패(失敗)한 것을 분(憤)히 여기면서 고문(拷問) 끝에 죽었다.
유학(儒學)에 깊었으며 궁술(弓術)에도 뛰어 났다.
숙종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과천(果川)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천(洪川)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대구 낙빈서원,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 강령(康翎)의 충열사우(忠烈祠宇), 동학사(東鶴寺), 숭모전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諡號)는 충목(忠穆)이다.
시조(時調) 삼수(三首)가 전(傳)한다. 공(公)을 대표(代表)하는 일수(一首)는

위함길도 절제사(爲咸吉道 節制使)
장군지절 진벌변 將軍持節 鎭伐邊 [장군의 지휘로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르고]
사색진청 사졸면 沙塞塵晴 士卒眠 [세상이 조용하니 병졸들도 잠이 들었네]
준마오천 시유하 駿馬五千 嘶柳下 [준마 오천필이 버들 아래서 울고]
호응삼백 좌루전 豪鷹三百 佐樓前 [사냥매 삼백은 루 앞에 앉아 있네]

류성원(柳誠源)

(? - 세조 2년 1456)
자(字)는 태초(太初) 호(號)는 낭간(琅) 본관(本貫)은 문화(文化)이며 부(父)는 사인(舍人) 사근(士根)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 세종(世宗) 16년 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 다음해 저작낭(著作郞)으로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에 참여 세종(世宗) 29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했다.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 세종(世宗)의 총애(寵愛)를 받았으며 세종(世宗) 32년 문종(文宗)이 즉위(卽位)하자 사경(司經) 수찬(修撰) 시교(詩敎)를 역임 문종원년(文宗元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단종(端宗) 9년 김종서(金宗瑞)등을 살해(殺害)하고 정권(正權)을 잡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의 협박(脅迫)에 못이겨 청난공신(淸難功臣)을 록훈(錄勳)하는 교서(敎書)를 썼으나 그 후(後)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등과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세조 2년 일이 탄로(綻露)가 되자 자결(自決) 했는데 곧 책형( 刑)을 당(堂)하고 아들 귀연(貴連) 송연(松連)도 연좌(連坐) 됐다.
숙종 신미(辛未)에 복관(復官) 영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홍천(洪川)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대구 낙빈서원,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 동학사(東鶴寺) 숭모전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諡號)는 절의(節義)였으나 후(後)에 충경(忠景)으로 개시(改諡)하다.
「가곡원유」(歌曲源流)에 전(傳)하는 시조일수(時調一首)가 있으니

백산공해 마천령 白山拱海 摩天嶺 [바다를 끌어들인 마천령 산맥에]
흑수횡곤 두만강 黑水橫坤 豆滿江 [땅을 가로지른 두만강 물줄기어라]
차지이후 비기처 此地李侯 飛騎處 [이곳에서 이후는 힘찬 말 달려 놓고]
잉간호로 자래강 剩看胡盧 自來降 [오랑케 항복 받던 그 모습 눈에 선하네]


서산서원(西山書院)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462 

 

생육신을  배향한 서산서원의 충의사(忠義祠)

1706년(숙종 32) 경상도 유학 곽억령(郭億齡)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생육신인,

경은 이맹전(耕隱 李孟專), 어계 조려(漁溪 趙旅), 관란 원호(觀瀾 元昊),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문두 성담수(文斗 成聃壽),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이상 여섯분을 사육신의 예에 따라 이루어짐이 마땅함을,

국왕에게 상소하여 윤허를 받고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생육신(生六臣)



단종의 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르자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6명의 충신

이맹전(李孟專)


1392년(태조 1) ~ 1480년(성종 11)

자는 백순(伯純)이요, 호는 경은(耕隱), 시호는 정간(靖簡)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니, 병조판서 심지(審之)의 아들이다.
대대로 성주(星州)에서 살았으며, 1427년(세종 9)문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正言)·소격서령(昭格署令) 등을 역임한 후 거창현감(居昌縣監)에 이르렀다.
거창현감을 지낼 때 청백리로 소문이 났으나 수양대군이 1453년에 계유정난(癸庾政亂)을 일으켜서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자 벼슬을 버리고,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다고 핑계하며 고향에서 두문불출하고 여생을 마치었다. 1782년(정조 2) 시호가 추증되었다.

조 려(趙 旅)

(세종 2년 1420 ~ 성종 20년 1489)
자는 주옹(主翁)이요, 호는 어계(漁溪), 시호는 정절(貞節)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었다. 명망이 높았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고향의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은거(隱居)하고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내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98년(숙종 24)에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참판을 추증(追贈)하고 백이산 아래에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배향(配享)되었다. 이 사당을 서산학원(西山學院)이라 사호(賜號)하였다.

원 호(元 昊)

 

(생몰년 미상)

자는 자허(子虛), 호는 무항(霧巷)·관란(觀瀾) 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며, 본관은 원주(原州), 별장 헌(憲)의 아들이다.
1423년(세종 5)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다가 단종이 영월(寧越)에 쫓겨 가자 세상과 접촉을 끊고 방속에 묻혀 살았으며, 1457(세조 3)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렀다.
그뒤 세조가 호조참의를 주겠다고 불렀으나 이를 거절 하였다. 숙종 때 그 절개를 찬양하여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1782(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시습(金時習)

(세종 17년 1435 ~ 성종 24년 1493)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 본관은 강릉이고, 고려의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며, 일성(日省)의 아들이다.
5세 때 이미 중용,대학에 통하여 신동(神童)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감탄하여 이름을 시습이라 지어주었다.
1455년 21세 때 수양대군(首陽大君-世祖)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문을 닫고 3일이나 통곡하였으며,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설잠(雪岑)이라 호하고 또는 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동봉(東峰)·췌세옹(贅世翁)이라고도 하였다. 양주(楊州)의 수락(水落)·수춘(壽春)의 사탄(史呑)·해상(海上)의 설악(雪岳)·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성종 때 머리를 길러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때에 변절(變節)하여 6신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南孝溫)·안응세(安應世)·홍유손(洪裕孫)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상처한 후 재취하지 않았고,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선조는 이율곡(李栗谷)을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伯夷)라 하였으며 집의(執義)의 벼슬을 추증, 뒤에 정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六臣祠)에 배향되었다.

성담수(成聃壽)

(? ~ 세조 2년 1456)
자는 미수, 호는 문두(文斗), 시호는 정숙(靖肅), 본관은 창녕, 문숙(文肅) 석용(石瑢)의 후손이고, 인재(仁齋) 용회(用晦)의 아들이며, 매죽헌(梅竹軒) 삼문(三問)의 6촌이다.
1356(세조 2)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 때 교리(校理)로 있던 아버지도 관련되어 심한 고문 끝에 김해로 귀양갔다가 3년 후 풀려났으나 울화병으로 죽으매, 이를 본 담수는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파주 문두리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지낸 후 문두라 호하고, 서울에 발을 끊고 10여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그 곳에서 은거 하였다.
조카 몽정(夢井)이 경기도 안찰사가 되어 담수를 겨우 찾았을 때는 어찌나 가난한지 방안에 자리도 없었다. 출사를 종용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으매 몽정이 돌아가서 깔 자리를 보내니 가난하고 천한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죽은 뒤에 조어계(趙魚溪) 등과 같이 생육신으로 불리우고 시호를 받았다. 1782(정조 6)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남효온(南孝溫)

 

(1454 ~ 1492)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이며, 본관은 의령이니, 직제학 간의 증손으로 진사에 올랐다.
18세때에 소릉(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능)의 복구를 세조에게 상서했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일찍이 육신전을 지었는데, 그 문인들이 큰 화가 이를 것을 두려워하여 저술을 하지 말라고 건의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며 대현의 자취를 없어지게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고, 또 야사를 지었다. 연산군때 갑자사화(1504년)가 일어나자, 소릉회복 상소문 때문에 남효온의 무덤을 파헤치는 화를 입었다. 정조때에 이조판서를 추중하고, 시호를 문정이라 하였으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영월의 창절사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