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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기 브로치’ 달고 김정일과 담판… 美 외교전설 하늘로

류지미 2022. 7. 31. 19:08

‘성조기 브로치’ 달고 김정일과 담판… 美 외교전설 하늘로

입력 2022-03-25 03:00업데이트 2022-03-25 04:52
 

 

美 첫 여성 국무 올브라이트 별세
2000년 美 고위직으론 첫 방북…北 비핵화 일괄타결 협상 이끌어
“김정은은 파시스트 전형” 평가도…이민자로 ‘아메리칸 드림’ 상징
나토 확장 통해 러 견제 외교…바이든 “그녀는 자유의 힘” 애도

 
미국 현직 고위 관계자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오른쪽)이 2000년 10월 평양에서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과 잔을 부딪치며 건배하고 있다. 평양=AP 뉴시스
 
 
유대계 체코 이민자 출신으로 동유럽 국가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시키는 등 공산권의 민주화에 기여한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 겸 ‘강철 여인’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23일(현지 시간)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빌 클린턴 전 미 행정부 2기인 1997∼2001년 국무장관을 지낸 그는 2000년 미 현직 고위 인사 중 최초로 북한을 찾아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과 만났다.

미 국무장관은 대통령, 부통령, 하원의장에 이은 권력서열 4위 직책이다. 지난해 카멀라 해리스 미 부통령이 취임하기 전 그는 미 여성 중 가장 먼저 미 행정부 최고위직에 올라간 인물이었다. 이처럼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자 수많은 유리천장을 깨고 ‘여성 최초’ 기록을 쓴 그는 ‘유럽의 안정이 곧 미 국가안보의 핵심’이라는 신조하에 나토 확장을 통한 러시아 견제에 집중했다. 옛 소련이 주도한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속했던 체코 폴란드 헝가리는 1999년 나토에 가입하며 서유럽으로 편입됐다. 이후 발트 3국,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등의 추가 가입이 이어져 러시아가 나토 동진(東進)을 최대 위협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이 주유엔 미국대사 시절인 1994년 이라크와의 협상 당시 착용한 뱀 모양 브로치(위 사진). 사담 후세인 당시 이라크 대통령이 자신을 ‘뱀 같은 여자’라고 칭하자 이 브로치를 달았다. 그는 러시아와의 협상에서는 힘을 상징하는 독수리 브로치(왼쪽 아래 사진)를, 중동 분쟁 협상 때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모양 브로치를 착용하며 ‘브로치 외교’를 선보였다. 리드마이핀스 웹사이트 캡처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0년 취임했을 때 미 고위 관료 중 처음으로 푸틴을 만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하루 전인 지난달 23일 뉴욕타임스(NYT) 기고에서도 “우크라이나 침공은 역사적인 잘못”이라고 러시아를 비판했다.

 
착용한 브로치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브로치 외교’로도 유명했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자신을 “사악한 뱀 같은 여자”라고 비난하자 이라크와의 협상 때 보란 듯이 금색 뱀 모양의 브로치를 달았다. 러시아와의 협상 때는 미국의 힘을 상징하는 독수리, 중동 분쟁 협상 때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착용했다. 김정일과 만났을 때는 성조기 브로치를 달았다.

2000년 6월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북한과 미국의 해빙 무드가 조성되자 그는 그해 10월 북한을 찾았다. 당시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북-미 수교, 북한의 핵·미사일 폐기 등을 포함한 일괄타결 협상을 이끌었다. 다만 한 달 후 북한 선제 타격 등 대북 강경책을 내세운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해 북-미 화해 분위기도 사라졌다.

그는 2018, 2019년 북-미 정상회담 당시 “세계 독재자 중 진짜 파시스트의 전형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라며 북한의 거짓말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서전 ‘마담 세크리터리’ ‘파시즘’ 등을 통해 “인간 정신의 자발성이 북한보다 철저하게 말살된 곳은 없다” “북한은 세속적인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라며 독재를 비판했다.

 

그는 1937년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나치의 유대계 탄압을 피해 가족과 영국으로 이주했고 1948년 미국에 정착했다. 영어, 러시아어, 체코어, 프랑스어, 독일어, 폴란드어, 세르비아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했고 명문 여대 웰즐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언론 재벌 올브라이트 가문의 후손 조지프 올브라이트와 결혼해 세 딸을 뒀지만 이혼했다.

컬럼비아대에 진학해 행정학·공법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이곳에서 은사(恩師)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교수를 만났다. 폴란드 이민자인 브레진스키는 1976년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된 뒤 ‘똑똑한 제자’를 워싱턴으로 불러들였다. 올브라이트는 이후 클린턴 행정부 1기의 유엔주재 미국 대사를 거쳐 국무장관에 올랐다. 당시 상원 인준에서 만장일치 찬성을 받았을 정도로 미 사회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그는 선(善), 우아함, 품위, 자유를 위한 힘이었다. 그가 역사를 만들었다”고 애도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부부, 부시 전 대통령도 애도 성명을 냈다.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그가 이 건물에 미친 영향이 매일 건물의 모든 곳에서 느껴진다”고 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김수현기자 newsoo@donga.com

 

 

[횡설수설/장택동]올브라이트 별세

입력 2022-03-25 03:00업데이트 2022-03-25 04:59
 
 
“김정은은 진성(true) 파시스트의 전형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2018년 발간한 책 ‘파시즘’에서 내놓은 평가다. 북한을 “세속적인 IS(이슬람국가)”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신격화된 김씨 일가가 독재정권을 세습하며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지는 것을 비판하는 취지다. 그런데 그는 2000년 미 장관으로선 처음 북한을 방문했고, 김정일을 “지적인 인물”이라고 호평했었다. 그 사이에 북한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진 것일까.

▷북-미 간에 화해무드가 무르익던 시기에 찾아온 올브라이트에게 김정일은 적극적이었다. 함께 집단체조를 관람하던 중 미사일 발사 장면이 등장하자 김정일은 “첫 번째 쏘는 것이자 마지막으로 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민감하게 여기는 올브라이트를 배려한 발언이었다. 그도 김일성의 묘를 참배하며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서전에서 “외교상으로 필수적인 듯했으므로 묘를 찾았지만 어떤 경의도 바칠 수 없었다”고 썼다. 내심까지 북한을 존중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23일 타계한 올브라이트는 뼛속까지 외교관이었다. 1978년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일한 것을 시작으로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미국 외교의 핵심인 유엔대사와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클린턴 행정부의 양심”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해외 인권침해 문제에 적극 개입하면서도 국익 중심의 외교에 무게를 뒀다. 올브라이트는 브로치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는 ‘브로치 외교’로도 유명하다. 김정일을 만날 때에는 성조기,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할 때는 햇살 모양 브로치를 달았다.

 
▷체코에서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힘겨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조부모를 비롯한 친인척 26명이 목숨을 잃었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영국으로 피신했다 돌아오니 이번엔 체코에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외교관이던 아버지가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되자 가족 모두 미국으로 도피했다. 이후 스스로의 힘으로 유리천장을 깨고 여성 최초로 미 행정부의 3인자인 국무장관까지 올랐다.

▷“나는 ‘은퇴’라는 단어를 혐오한다”고 그는 말하곤 했다. 64세에 장관에서 물러난 뒤 학계와 싱크탱크에서 활동했고, 숨지기 전까지 국제문제 컨설팅업체 ‘올브라이트 스톤브리지 그룹’의 회장을 지냈다. 2020년에는 책 ‘지옥과 다른 목적지들’을 펴냈다. 방북 당시 그를 수행했던 웬디 셔먼은 국무부 부장관이 됐고, 조지타운대에서 그에게 배운 네드 프라이스는 국무부 대변인으로 활동 중이다. 거장은 떠났지만 그의 정신과 인맥은 미 외교가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