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릴 때부터 노래에 정말 관심이 많았고요, 음악에 조에가 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때부터 방송국이나 극장의 노래 대회에 참가했어요" tv인터뷰
1972년 3월 하이샨 레코드는 펑페이페이(鳳飛飛)의 첫앨범 [행복하길 바랄게요(祝你幸福)]를 발매하였고, 앨범은 즉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펑페이페이의 부드러운 음성, 소박하고 평이한 옷차림,그리고 대만 국어의 억양은 많은 대만인들의 마음 속에 쏙 들었다. 경제 성장이 급속히 이루어지던 1970년대, 대만인들은 펑페이페이의 노래에서 자기자신의 노래를 찾은 것이다.
1970년대 대만은 비관과 낙관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순수함과 복잡한 세상살이의 노련함이 뒤얽히던 시대,
1969년의 다오위타이 사건, 1971년 UN 퇴출, 1973년의 석유위기, 1975년 장개석 서거 등은 대만 사회를 한동안 폭풍우 속에 몰아 넣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십대건설계획, 가내식 공장, 수출가공구의 설치,10년동안 계속된 10%이상의 경제성장율 등을 통해 대만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되었다. 경제성장및 번영에 따라 대중음악, 라디오, 인쇄업 등 관련산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1969년 釣魚台 事件
*센카쿠 열도[尖閣列島(せんかくれっとう)] 또는 댜오위타이 열도[釣魚臺(ㄉㄧㄠˋㄩˊㄊㄞˊ)列嶼(ㄌㄧㄝˋㄩˇ)] 는 일본이 실효지배하는 섬으로, 중국, 타이완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는 섬이다. 타이완은 센카쿠 열도 또는 댜오위다오(钓鱼岛)로 알려진 댜오위타이(釣魚台)를 '터우청다오위타이'(頭城釣魚台)로 개명 (6/11/2020 ).
센카쿠 열도[尖閣列島]는 동중국해 남부에 위치한 다섯 개의 무인도와 세 개의 암초를 말한다.
1895년청일전쟁 와중에 일본 제국은 이 군도를 무주지라며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 편입과정은 현지에 표지 말뚝을 설치한다는 각의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실제로는 청일전쟁 승리 후 세울 필요성이 없었으므로 이를 실행하지는 않다가, 1969년 5월 10일에 세웠다.
대만 여가수 펑페이페이 타계
입력 : 2012-02-14 19:49
중화권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여가수 펑페이페이(鳳飛飛)가 숨졌다. 향년 59세. 그는 지난해 6월 공연을 앞두고 폐암 진단을 받은 뒤 투병생활을 해왔다.
그의 변호인은 펑페이페이가 지난달 3일 홍콩에서 사망했지만 “중화권 전통 명절 춘제(春節)를 앞두고 팬들을 슬픔에 잠기게 하고 싶지 않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이를 뒤늦게 공개하게 됐다고 14일 대만 언론에 밝혔다. 펑페이페이는 대만을 비롯해 홍콩, 중국 등에서 사랑을 받은 1980년대 대표 여가수로 공연 때 모자를 즐겨 써 ‘모자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