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방랑 시인 전삿갓과 경제 대통령 김재익

류지미 2022. 8. 10. 05:01

History & Human Geography

 

 

전두환노래 - 방랑 시인 김삿갓

https://www.youtube.com/watch?v=_1dcg7px_7Y

 

경제 대통령 김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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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3, 2019

https://www.youtube.com/watch?v=rtapzNk2H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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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호

1 year ago

경제는 자네가 대통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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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마귀엽

1 year ago

아 그사람이군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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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하트

1 year ago

@인마귀엽 버마 아웅산테러때
희생당하신 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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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1 year ago

북빨갱이들 입장에선 신의 한수였네 빨갱이 개색퀴들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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릅갈통

1 year ago

전각하는 지가 ㅂㅅ인거 인정하고 남의 말 귀 기울일지 아는 대머리 각하죠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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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 Dream

1 year ago

릅갈통 문쩝쩝은 지도 빙신 더불당 다빙신이라 누구 하나 제대로 된놈 없어 말아먹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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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il lee

1 year ago

한국 군 출신이 경제를 잘이끔.학도병 출신이라고 들음..연평해전 부상병동으로 위문왔다고함 당시 고위층 안오심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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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김재익이 좀더오래살았으면 우리도 일본처럼 탄탄한 중소기업이 많아졌을텐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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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국

1 year ago

@Moon Dream 릅은 누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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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웅

1 year ago

빨갱이짓은 자네가 대통령이야 ㅁ ㅈ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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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그만하고이명박합시다

1 year ago (edited)

@인마귀엽 그사람이라니 전두환은 욕해도 저분은 함부러 처 말하지마라 저분덕에 니가 잘 처먹고 사는줄알아 빙신아 저분같은 정직하고 애국자인 공직자가 대한민국에서 나올줄아냐 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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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와 1980년대초 그 어렵던 경제 위기에서 나라를 일으켰던 대통령의 경제참모

 

김학렬((金鶴烈,왼쪽)과 김재익(金在益).

 

이 두사람은 그 어렵던 시기에 한국경제를 곧추 세운 빼어난 경제관료였다. 둘은 헌정을 무너뜨린 군출신 절대권력자의 경제참모였다. 김학렬은 경제성장의 청사진을 만들고 김재익은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기반을 다졌다. 그 결과 90년대 들어 중산층이 두터워졌다. 하지만 둘은 안타깝게도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사진은 40대 초반의 모습.>

 

김학렬 전 경제 부총리의 별칭이 쓰루(鶴ㆍ일본어)였는데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성품 또한 학과 같았다. 김 부총리는 경제 중흥의 확장정책을 앞장서 이끌었고 김재익은 성장의 과실을 보다 고르게 나눠야 한다며 물가 안정에 사력을 다했다.

 

둘은 헌정을 무너뜨려 집권한 군 출신 대통령을 가르쳤지만 ‘경제’ 하나만은 누가뭐래도 대통령을 설득하고 바르게 이끌었다. 이들 만큼의 파워를 가진 경제관료는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예측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김 전부총리는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주오(中央) 대를 나왔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했다. 2년뒤 미국으로 유학해 미주리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나서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등에서 근무하며 경제개발 계획을 다듬었다.

 

1966년 재무부 장관을 지낸뒤 청와대 경제수석이 됐다. 경제관료가 특이하게도 정무수석까지 지내는 등 정무적인 감각도 있는 편이었다. 1968년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돼 70년대 고도성장의 밑그림을 그렸다.

 

김재익(1938~ 1983)은 1980년에 등장한 신군부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이 참에 관계를 떠날 생각이었다. 미국서 박사학위(스텐포드 대학)을 따고 귀국해 경제관료 생활을 시작한 관계로 고질적인 직업관료 틈바구니에서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라 마음을 비웠다. 한국개발연구원(KDI)으로 이직하는 새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당시 김원기 경제 부총리로부터 다급한 전갈을 받았다. 당대 신군부 실세인 전두환의 가정교사로 차출됐다. 그 때 사실상 국가통제기구인 국가보위상임위원회(국보위·상임위원장 전두환)로 출근했다.

또 새벽 5시 30분에 국보위에서 차를 보내면 연희동으로가서 매일 두시간씩 경제과외를 했다

 

 

김학렬과 김재익. 보잘것 없었던 나라 경제를 살찌우는데 헌신한 경제관료였다

김학렬은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몸을 돌보지 않고 업무를 추진하는 동안 자신의 병은 깊어가고 있었다. 당시 경제기획원 관료들은 밤샘이 다반사였다.박 대통령은 “쓰루는 내가 일을 많이 시켰고 나랑 통음을 하는 바람에 일찍 갔다”며 자탄했다고 한다.

 

김재익은 1983년 전두환의 동남아 순방 수행중 북한이 자행한 아웅산 테러에 희생됐다.

다시 만나기 쉽지 않은 나라의 인재였고 자신을 불사른 공직자로 국궁진췌(鞠躬盡瘁)의 표상이었다.

경제초석 놓은 '대통령 경제수석'… 김학렬과 김재익

 

 

김재익은 내키지 않았지만 전두환의 경제 과외 선생이 됐고 청와대로 들어간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전두환에 대한 '경제길들이'기에 성공했다. 물가안정정책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였고 자율개방 체제를 갖춰 전례가 없는 '3저(低)호황'의 밑돌을 놓았다.

물가안정이 왜 중요한지, 개방과 자율경제 체제가 자원이 없는 나라가 살 길이란 점을 명확하게 주입했다.

경제초석 놓은 '대통령 경제수석'… 김재익|

방랑 시인 전삿갓(全斗煥)과 경제 대통령 김재익(金在益)

물가 상승률:

1979년(18.3%), 1980년(28.7%),

1981년(21.4% ), 1982년(7.2% ), 1983년(3.4% ), 1984년(2.3% ), 1985년(2.5% ), 1986년(2.8% ), 1987년(3.0% )

전두환의 머릿 속에 확고히 경제관을 심어 준 김재익... 이런 인재를 알아 본 전두환...

 

김재익(金在益)

"각하, 제가 제안하는 경제정책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여러 말 할 거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전두환이 김재익을 경제수석으로 임명하면서 오간 대화

 

 

출처: 나무 위키

김재익(金在益)


한국정치학경제학자이자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했던 경제관료.

70년대엔 빛을 보지 못하다 5공 초창기 전두환의 신임을 얻어 '경제 대통령'이라고 불리기도 했을 정도로 실권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치솟던 물가를 안정시키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으나 결국 염원하던 금융실명제 추진은 당시 많은 정치인들의 반발에 떠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고, 점차 영향력이 줄어들다가 이후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으로 44세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김응묵과 어머니 강병주 슬하 6남 3녀 중 막내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안동 김씨이며, 본적은 선친의 고향인 충청남도 연기군이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53회)에 입학했다가 검정고시로 대입자격을 취득한 뒤 195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외교학 전공으로 입학하여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 입행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사회에 진출했고, 1968~1973년에 걸쳐 미국 하와이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를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한국의 천재'로 불리며 중동과 북유럽 국가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학위취득 이후, 귀국한 김재익은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일했지만, 그가 주장한 안정노선은 당시 정부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그렇게 1979년에 경제기획원을 사직하고 한국개발연구원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전두환12.12 군사반란5.17 비상계엄를 거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경제과학분과 상임위원장,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분과위원장이 되어 권력의 핵심에 선 뒤, 김재익은 전두환에게 발탁되어 그의 경제 과외 선생 역할을 했다. 경제학은 커녕 경제 자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설명하는 김재익의 능력에 감탄한 전두환이 집권 직전 김재익을 불러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자신이 단지 얼굴마담격으로만 이용될 것을 우려한 김재익은 조건을 달았다.

제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일하겠습니다. 또한 저한테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러자 전두환은 "좋소! 이제 대한민국 경제에 대해서만큼은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흔쾌히 승낙. 실제 전두환 정권 출범 후 경제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권한을 줘서 일할 수 있게 해줬다고 하며, 이 시점에서 1980년대 경제개혁이 막을 올렸다. 특히 물가 안정화 분야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1980년에 소비자 물가 상승율이 28%였던 것을 1982년7%로 줄여버리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83년부터는 아예 3.5%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이를 유지하게 된다. 이리하여 8.15 해방 이래 40여년간 지속된 "高 인플레이션" 시대를 마감한다. 경제성장률 역시 80년에 -1.7% 였던 것을 1981년에 7.2%, 1983년에 12%대로 올린 것을 기점으로, 이후 평균 10%대의 성장율을 기록한다.

 

그 외 수입자유화 조치도 시작하고, 실제론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이뤄지긴 하지만 OECD 가입이나 금융실명제 추진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흔히 정보화산업은 1990년대 이후 꽃을 피웠다고 평가받긴 하지만 김재익이 이때부터 국내 전화 교환기 형식을 기존의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전면 교체해 훗날 전화망을 이용한 인터넷 회선 구축을 용이하게 하는 등 알게 모르게 기반을 닦기 시작한다.

또 이 시기 그가 한 특별한 일 중에 하나가 부가가치세 도입이다. 이 도입과 관련하여 김종인 당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와 함께 직접 서독을 답사하고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연이 되어, 당시 노총각이던 김종인 교수에게 중매를 서 주기도 했다.

허나 금융실명제처럼 지하경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정책을 시도하다가 전두환의 측근들한테 단단히 찍히는 아이러니를 초래하기도 한다. 덕분에 전두환이 최종 승인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정치인들의 비자금 조성에 크게 방해가 되자 측근들이 난리를 쳤고, 결국 측근들의 반발에 못 이긴 전두환이 생각을 바꾸면서 시행에는 실패했다. 물론 전두환이 최종 승인할 당시에도 진지한 고민을 했다기보단 당시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하여 여론이 악화되고, 정권이 불안해지자 금융사기를 방지할 방법 중 하나로 금융실명제를 시행하려했을 뿐이긴 했다. 그러다가 측근들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 정치자금을 주고받지 못 하게 된다"는 식으로 설득하자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포기한 것. 그나마 시행 직전까지 간 것도 실은 전두환을 설득했던 측근들이 당시 전두환에게 밉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고집을 부린 면이 있었다.

하여튼 이렇게 금융실명제 개혁이 실패하면서, 김재익도 본인의 입지가 꽤 흔들리던 찰나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이 터지고 그렇게 김재익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