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y from Me

흥청(興淸)출신 장녹수(張綠水)

류지미 2023. 4. 27. 07:28

나는ㅎ 어려서 역사를 엄청 좋아하였다. 소학교 때  이미  갱유분서의 화를 터득했을 정도로...

 

시골 중학생 때 삼황오제 하은주 주에는 서주와 동주 춘추전국시대 진 한 삼국 진  오호16국 남북조 수당송원명청 중국 연대사를 궤뚫었다. 한 평생 입에 달달 익은...

훗날 역사 선생이 되던지 사학자가 되는 것이 소학교, 시골 중학교 시절, 소년의 꿈이었었다.

 

철이 들면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아선지  민주주의 의식이 투철해진 탓인지 왕조 역사를 엄청 싫어하게 되었다.

특히  중공을 싫어하면서는 삼국지도 제대로  한번 읽어 보지도 않았고 쭝꿔 삼국지 들먹이며 교양인 행세하는 것도 무척 혐오하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ㅎ 일종의 병이 되었다.

 

유비가  뭐하던 사람인지 유방은 무엇에 소용한지  관우가  살다가 죽었는지  신이 되었는지...

장희빈이 어쨌는다는 건지  연산군이 뭘 그리 잘 못 했는지 장녹수가 뭐 하던 사람인지...

 

왕조 사극을 싫어하면서 왕조역사는  들어도 읽어도 깨끗이 잊어버리는 습관까지 들었다.

 

정말 아주 오랫만에

이른 이  아침부터

생전  처음으로 장녹수 여사가 뉘시온지  찾아 보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K0ByDpneKcI

 

 

가는세월 바람타고 흘러가는 저 구름아

수많은 사연담아 가는곳이 어드메냐

구중궁궐 처마끝에 한맺힌 매듭엮어

눈물강 건너서 높은 뜻 걸었더니

부귀도 영화도 구름인 양 간곳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 우는가

 

<간주중>

 

한조각 구름따라 떠도는 저 달님아

한많은 사연담아 네 숨은곳 어드메냐

곤룡포 한자락에 구곡간장 애태우며

안개강 건너서 높은뜻 기웠더니

부귀도 영화도 꿈인양 간 곳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 우는가

 

 

 

********궁궐에  불러들인 기생(흥청,興淸)출신 장녹수(張綠水)************

 

아버지는 문의현령을 지낸 장한필(張漢弼)이고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다. 동복언니의 이름은 장복수(張福壽)로 연산군에 의해 면천되기 전까지 내수사(內需司) 여종이었다. 그러므로 장녹수의 어머니는 천첩이며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서 얼녀(孼女) 장녹수도 천민의 신분이다.

 

장녹수를 두고 《연산군일기》에서는 본래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고 썼다.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하고 혼인도 여러 번 하였다. 그러다가 제안대군이 부리는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고 노래와 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다. 따라서 기혼녀에 연산군보다 연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인 대중의 생각과 달리 외모는 평범하여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다.

대신 엄청난 동안으로 30대에 16세 소녀로 보였으며 연산군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비위를 잘 맞추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연산군의 최측근이 된 비결은 용모가 아닌 그녀의 언행과 교태였다.  연산에게 반말과 조롱, 하대까지 하였으나 이도 장녹수가 연산의 기분을 알고 한 교태였으므로 연산은 화를 내기는커녕 맞춰주며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노래 실력이 출중해서 연산군이 궁중으로 불러 들였다고 한다.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교태[嬌態]와 말재주로 연산군의 환심을 사 후궁이 되고  1503년(연산군 9) 12월  종3품 숙용(淑容)으로 품계가 올랐으며  언니 장복수와 자기 아들이 면천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1506년(중종 1)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장녹수는  전전비, 김귀비 등과 함께 *군기시(軍器寺) 앞으로 끌려 가 참형에 처해졌다.

 

 

사와 시 (寺와 寺)

 

寺는 '절 사'라는 한자로, '', '사찰', '관청' 등을 뜻한다.

 

한(漢)나라 때 장관들이 집무하던 관청을 시(寺)라고 했다. 대리시(大理寺)니 광록시(光祿寺)처럼 썼다.

조선시대에도 종부시(宗簿寺), 내자시(內姿寺)   군기시(軍器寺)등  많은 시(寺)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