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万葉集,만엽집( 저자/오토모노 야카모치, 해설/박상현)

류지미 2023. 4. 29. 06:13

 

 

만엽집( 저자/오토모노 야카모치, 해설/박상현)

 

◈ 만엽집[萬葉集]_고대인의 삶의 서정


 저자: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 

 

*오토모노 야카모치( 大伴家持, 718년경 ~ 785년 10월 5일)

일본 나라(奈良) 시대의 귀족이면서 가인(歌人)으로 활약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인 오토모노 타비토(大伴旅人)에게서 노래 짓는 법을 배웠다. 젊은 시절에는 많은 여성과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집인 만엽집을 그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편찬했다고 추정된다. 또한 만엽집에는 약 4,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가 지은 작품이 총 479수로 가장 많은 노래를 남겼다. 섬세하고 감상적인 노래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해설자: 박상현(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건국대학교 일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대학교에서 일본 문화학 전공(萬葉集)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키워드로 읽는 일본문화2-스모 남편과 벤토 부인(공저, 2003), 만엽집과 정치성(2004)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의 표현세계 일고찰-해학표현을 중심으로(동아시아고대학, 2005), 천황에 충성을 다짐하는 병사(防人)의 노래-그 전통의 창출과 폐기, 그리고 재창출의 가능성(일본학보, 2004), 시가집 만요슈(萬葉集)에 보이는 정치성-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의 절창가(絶唱歌)를 중심으로(일본학보, 2003) 등이 있다.


1.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집인 『만엽집(萬葉集)』


『만엽집』은 모두 20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작품 수는 약 4,500여 수에 달한다. 그 성립 연대 및 편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나라(奈良) 시대1) 일본의 나라 시대는 710년부터 784년까지의 기간이다.)후기에 당대의 유력한 귀족이자 가인(歌人)인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가 현재와 같은 형태로 편찬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당시에 편집된 『만엽집』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그 흔적을 전하는 여러 종류의 사본(寫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천황의 명령에 의해 편집된 시가집인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2) 천황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시가집이다. 905(혹은 914)년경에 기노 츠라유키(紀貫之), 오시코치노 미츠네(紀友則凡河內躬恒), 미부노 타다미네(壬生忠岑)가 편찬했다. 20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약 1,100수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이나 『신고금화가집(新古今和歌集)』3) 고금화가집과 같이 천황의 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미나모토노 미치토모(源通具) 등이 1205년경에 이 시가집을 완성했다. 20권으로 되어 있고 약 1,980수가 실려 있다.)과 달리, 『만엽집』의 성립 및 편찬 목적 등을 규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만엽집』의 서명에 관한 유래는 몇 가지가 있으나,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만세(萬世)'에까지 전승되었으면 하여 축복하는 심정에서, 혹은 많은 노래의 모음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 제목 '만엽집'의 유래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가집은 위로는 천황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 등에 이르기까지 그 작자가 각양각색인 것 같다. 이름이 밝혀진 작자도 많지만, 작자 미상인 경우도 그에 못지않다. 또한 당시 한반도나 중국에서 건너갔다고 판단되는 사람이나 그들의 후손에 의한 작품도 적지 않다. 『만엽집』에 실려 있는 작품을 내용적으로 보면, 주로 연애를 노래한 상문(相聞)이 있고, 또한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만가(挽歌)가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 속하지 않는 노래를 모은 잡가(雜歌)도 있는데 여기에는 천황의 행차(行次) 등을 읊은 노래가 들어 있다.4) 노래의 형태는 장가(長歌), 단가(短歌), 선두가(旋頭歌) 등으로 되어 있다. , 장가는 57(調)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을 77로 끝맺는다. 이 장가에 대립되는 것이 단가인데, 이것은 57577 5구체(句體)로 되어 있다. 선두가는 아래쪽 3()가 위쪽 3구와 같은 형식을 취하는데, 577 / 577로 된 6구체 노래이다.)


표기는 한자로만 쓰여 있으나, 그 어순은 주어ㆍ목적어ㆍ동사와 같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일본어 어순과 같다고 보면 된다. 또한 표기 스타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즉, 한자의 훈독(訓讀)으로만 되어 있는 것, 한자의 음독(音讀)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가을 바람'을 뜻하는 '아키카제(あきかぜ)'를 '秋風'으로 표기한 것은 전자에, '安伎可是'로 나타낸 것은 후자에 각각 해당한다. 따라서 『만엽집』의 표기 방식과 신라 향가의 표기 방식은 종종 비교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 지금부터 1천2백여 년 전의 고대 사회로 여행을 떠나 보자. 다음 장에서는 고금을 뛰어넘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감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2. 『만엽집』과 보편성


백제는 서기 660년 7월 18일에 의자왕(義慈王)이 나ㆍ당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한다. 그러나 곧 흑치상지를 비롯한 백제인들이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그 조직은 같은 해 8월 이미 당의 주력군과 싸울 수 있을 정도까지 정비되었다. 그 후 661년 9월경 백제 부흥군은 야마토(大和) 정권에 인질로 가 있던 왕자 풍장(豊璋)을 맞아들여 왕으로 옹립하였다. 백제 부흥군은 한때 나ㆍ당 연합군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지만 663년 9월 7일에는 근거지로 삼았던 주류성(周留城)이 함락되고 만다.


주류성이 함락되기 직전인 663년 8월 17일경, 백제를 돕기 위해 왜(倭)군 2만 7천 명이 4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왔으나, 8월 28일경에 벌어진 백강(白江) - 지금의 금강 하구 혹은 동진강 - 전투에서 왜군은 참패를 당한다. 일본에서는 이 전투를 '백촌강(白村江) 전투'라고 부르는데, 한반도의 고대국가뿐만이 아니라 당ㆍ왜도 참전했다는 의미에서 이 전쟁은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대규모 전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 전쟁은 백제 부흥군과 왜군의 패배로 끝났고 그 결과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반면 동맹국인 백제를 잃게 된 야마토 정권은 새로 편제된 한반도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천황제 율령 국가 수립을 지향하게 된다.


그런데 백촌강 전투에서 나ㆍ당 연합군에 패한 왜는 나ㆍ당 연합군이 일본 열도까지 쳐들어올 것을 경계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을 막기 위해 기타큐슈(北九州)의 방위를 강화하게 되는데,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이 주로 지금의 관동(關東) 지방에 해당하는 아즈마노쿠니(東國) 출신의 농민군이었다.


농민군의 연령은 보통 21살에서 60살 정도였다. 그 근무 기간은 3년인데, 근무지까지 걸린 일수는 이 기간에 포함되지 않았다. 정원은 3천 명이고, 매년 천 명씩 3월에 교체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한 10일을 근무한 후 하루의 휴가를 얻었다. 그리고 병사의 주된 임무는 나ㆍ당 연합군의 일본 침입을 대비해 쓰쿠시(筑紫)와 이키(壹岐)5) 규슈(九州) 본토에서 약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섬으로 규슈와 한반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등 규슈 서북부 갑(岬)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징집되어 정든 고향을 떠날 때에, 혹은 근무지로의 이동 도중에, 그리고 지금의 오사카시(大阪市)와 그 부근에 해당하는 나니와(難波)에서 잠시 쉬며 마지막 목적지인 현재 규슈에 해당하는 쓰쿠시로 향할 때에 각각 노래를 지었다. 그리고 이들 '병사의 노래(防人歌)'는 『만엽집』 권20에 84수나 실리게 된다. 755년 때의 일이다. 병사의 노래에는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는 듯한 작품도 있기는 하지만, 그 대부분은 가족과의 이별을 애통해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가족과의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는 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가족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병사의 노래에는 아래에 든 예와 같이 주로 고향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난다.


내 여행()6)은 여행이라고 단념하지만 집에서 아이를 껴안고(내 걱정으로) 바짝바짝 마르고 있을 아내가 가엽다.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들을 넘고 산을 넘고 나는 왔지만 내 부모는 잊혀지지 않는다.
6) 원래는 일시적으로 집을 떠나 임시로 숙박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런데 율령제의 도입과 함께 관인의 지방 부임, 서민의 조용조를 바치기 위한 이동, 천황의 지방으로의 이동도 여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만엽집』 연구자의 한 사람인 고노시 타카미쓰(神野志隆光)는 『가키노모토노히토마로(柹本人麻呂) 연구』7) 생몰 미상인 이 가인(歌人) 만엽집을 대표하는 가인 중의 한 사람으로 가성(歌聖)이라고 불린다. 주로 침통하고 장중하며 격조 높은 노래를 지었다.)라는 책에서, 이 병사의 노래에 나타나는 여행자(旅人)와 가족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즉, 그 관계는 '공감적(共感的)'이고, '주술적(呪術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노래에 자주 등장하는 '이하후(齋ふ)' - 목욕재계하고 신에게 기원하다 -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노래는 '이하후'의 성질을 잘 나타내고 있는 노래이다.


큰 배를 거친 바다에 띄우고 떠나시는 당신 무사히 빨리 돌아오세요.
아무 일 없기를, 하고 당신이 목욕재계하며 신에게 기원해 준다면
바다의 파도가 무수히 일어나도 사고가 나겠는가.


이 노래는 권15의 '사신을 신라에 파견하는 노래들'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부부가 서로 주고받은 것이다. 여기서 아내는 남편의 무사 귀환을 신에게 기원하고, 이에 대해 남편은 아내가 나의 안전을 기원해 주면 무사히 고향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이하후'를 통해 가족과의 이별을 읊은 병사의 노래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서정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일까? 첫 번째, 가족을 대표하는 아버지가 병사인 아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노래가 있다.


집에 남아서 그리워하고 있는 것보다는 네 허리에 차는 칼이라도 되어 (너를) 지켜주고 싶다.


이 노래에서는 "칼이라도 되어 (너를) 지켜주고 싶다"는 표현이 인상 깊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차는 칼이라도 돼서'에는 집에서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아들 곁에 있으면서 아들의 안전을 기원하고 싶다는 아버지의 심정이 담겨 있다. 두 번째, 병사가 가족에게 자신의 안전을 기원하라고 요청하는 노래가 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되새 오리 민댕기물떼새와 같이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되돌아올 때까지 목욕재계하며 내 안녕을 신에게 기원하면서 기다려줘요.
아버님 어머님 목욕재계하며 내 안녕을 신에게 기원하면서 기다려줘요. 쓰쿠시의 바다 밑바닥에 있다는 진주를 기념 선물로 가지고 돌아오는 날까지.


세 번째, 병사가 자기 자신의 안전과 무사를 기원하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어머님과 아버님을 위한 것이 된다는 노래가 있다.


두려운 신이 계시는 고개에 누사()8) 신도(神道)에서 신에게 기도할 때또는 액풀이할 때 쓰는 종이ㆍ삼 따위를 오려서 드리운 것을 말한다.)를 바쳐서 신에게 나의 안녕을 기원하는 이 목숨은, 어머님과 아버님을 위해서이다.


예를 들면 권20에 있는 옛 병사의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다.


천지의 신들에게 누사를 바쳐 신에게 자신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다녀오세요. 당신, ()를 생각하신다면.


여기서 '나'(=아내)는, "당신 몸은 당신만의 것이 아닙니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런 아내의 의식이 있었기에 "두려운 신이 계시는···"과 같은 노래가 만들어졌던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병사가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노래가 있다.


마당 한가운데 계시는 아수하(阿須波)9) 곡물신인 오토시노카미(大年神)의 아들이다.)의 신()에게 섶나무 바쳐 나는 목욕재계하며 신에게 안녕을 기원한다.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아시가라(足柄)의 고개10) 가나가와현(神奈川縣)에서 시즈오카현(靜岡縣)으로 넘어가는 고개 중의 하나다.)에 계시는 신으로부터 통행 허가를 받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는 넘어간다. 용맹한 남자조차 멈춰 서서 주저하는 후와(不破)의 관문11) 예전에 기후현(岐阜縣)에 있던 관문이다.)을 넘어간다. 쓰쿠시의 곶에 주둔해 나는 목욕재계하며 신에게 안녕을 기원하리라. 모든 사람이 건강하기를 신에게 빕니다. 돌아올 때까지는.


이상과 같이 '이하후'라는 표현을 통해 검토해 본 병사의 노래에 나타난 서정세계는, 지금 우리들이 흔히 겪는 군대로 떠나는 아들의 심정 및 그를 떠나보내는 부모님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1천2백여 년 전의 시가집인 『만엽집』에 실린 병사의 노래가 보여주는 서정세계는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보편적인 인간성을 읊고 있는 노래가 많이 실려 있는 『만엽집』은 편찬 당시부터 지금과 같은 폭넓은 독자를 획득했던 것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3. 창조된 고전으로서의 『만엽집』


『만엽집』은 『겐지이야기(源氏物語)』12) 생몰 미상인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작품으로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92)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총 54()으로 구성되어 있다. 궁정 생활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랑이야기를 그렸고 주인공은 히카루 겐지(光源氏)이다.)와 더불어 일본인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고전 작품이다. 그와 같은 사실은 우리나라의 KBS에 해당하는 NHK(일본방송협회)의 '인간 강좌'와 같은 방송 교재가 『만엽집』에 관한 특집을 종종 다룬다든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 강좌에 『만엽집』에 대한 강의가 거의 빠지지 않는다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만엽집』은 '일본문화의 위대한 유산'인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사를 보건대, 7~8세기와 같은 이른 시기에 『만엽집』과 같은 시가집이 만들어진 것은 일본뿐이라는 것은 '일본 문화의 위대한 유산'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일본인들을 더욱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만엽집』의 작자가 다양한 계층이었다는 것이다. 즉, 작자가 천황이나 귀족뿐만이 아니라 농민ㆍ거지 등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식은 일본에서 현재 출판되고 있는 『만엽집』에 관한 전문서나 일반 서적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 집필된 『만엽집』 관련 서적의 기술에서도 종종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일본 열도의 동쪽에 해당하는 관동 지방의 농민이 지었다고 하는 노래가 『만엽집』에 실려 있다는 것은, 다양한 계층이 『만엽집』의 작자였다는 주장의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한자(漢字)를 읽고 쓸 수 있는 것은 귀족 계층이었다. 또한 농민들의 노래가 보여주는 5음절과 7음절이라는 형식은 귀족의 그것과 동일하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관동 지방의 농민들이 읊었던 노래를 순수하게 농민들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을까?


『만엽집』의 작가층이 천황이나 귀족뿐만이 아니라 농민, 거지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기존의 인식이 정치성을 띤 것이라는 게 최근에 시나다 요시카즈(品田悅一)라는 소장학자에 의해 극명히 밝혀졌다. 즉, 그는 『창조된 고전ㆍ캐논 형성ㆍ국민국가ㆍ일본문학』(1999)에서, 국민가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만엽집』은 사실은 '국민적' 시가(詩歌)의 부재를 보상하기 위한 일종의 심리적 등가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만엽집』은 일본의 가면 음악극인 노가쿠(能樂)13) 일본 예능의 하나로 가무극인 노()를 가리킨다.)와 같이 일본의 근대국민국가 형성기에 '국민의 고전'으로서 만들어진 작품들 중 가장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편찬된 후 1천여 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었던 『만엽집』은 근대 국민국가 형성기에 화려하게 부활되는데, 이와 같은 성격을 보이는 『만엽집』은 언제 누구에 의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을까?


4. 한국에서의 『만엽집』


인터넷 검색창에서 '만엽집'을 입력하면, "『만엽집』은 한국어로 불려졌다" 혹은 "『만엽집』은 그 대부분이 고대 한국어로 읊어졌다"로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식'은 어떻게 우리 사회에 정착되었을까? 『만엽집』이 한국의 일반 독자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영희씨가 이 시가집에 실려 있는 노래를 조선일보에 일요 연재로 소개하면서부터다.14) 그는 1993 5월부터 1994 7월까지 써 온 '노래하는 역사' 노래하는 역사(1994 9, 조선일보사), 또한 2000년부터 2001년에 걸쳐 연재된 '속 노래하는 역사' 노래하는 역사 2(2001 6, 조선일보사)로 각각 엮었다.) 그는 『노래하는 역사』 시리즈의 집필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8세기 초에 나온 일본 고전을 우리 힘으로 다시 해독해 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대어를 재구성하고, 한 일 고대 교류사를 새로이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말과 우리 역사의 보물 창고는 일본에 있다. 이것을 언제까지 방치하여 둘 것인가.


『노래하는 역사』 시리즈가 화제가 된 이유는 첫째, 이영희씨는 고대 한반도에서 쓰였던 말로 『만엽집』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의 해석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만엽집』 해석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이다. 그 한 가지 예가 '치하야부루(知波夜夫流)'다. 이 어휘는 권2에 처음 등장하며, 『만엽집』에서 총16개가 보인다. 일본의 연구자는 이 말을 '힘이 세고 난폭한 모양'으로 풀고 있는 반면, 이영희씨는 '왕 베어 버려' 또는 '남근 베어 버려'로 해석한다. 그는 고대 일본어인 '치'는 고대 한국어에서 '왕' 또는 '남근'의 뜻이었고, 고대 일본어인 '하야부루'는 전라도 방언인 '~해부르(=해버려)'가 변한 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영희씨의 『만엽집』 해석에 대해 성신여자대학교의 박일호 교수는 회의적이다. 그는 일본에서 출판된 『국문학 해석과 교재의 연구』(1996)에서 이렇게 지적하면서 이영희씨의 견해를 비판한 바 있다.


현대 한국어의 음()을 고대 일본어의 음에 대응시킨다든지 한국어의 음과 일본어의 음을 혼용하여 훈독을 하는 등, 언어학적인 규칙(rule)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서적이영희씨의 또 하나의 만엽집(もうつの萬葉集) -은 단지 문자의 기원이나 한자의 구성 원리를 살펴서 거기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덧붙이기만 함으로써 언어의 의미를 확대하는 수법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해석이라기보다는 연상과 유추에 의한 창작에 지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박교수의 지적은 이영희씨의 『만엽집』 해석에 대한 일본 학계의 반응과 거의 일치한다. 이영희씨의 시도는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더 나아가 『만엽집』 해석에 있어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고대 한반도의 우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고대 한반도의 언어와 문화가 『만엽집』의 형성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의 노력을 모두 부정하는 것 또한 바람직한 자세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영희씨의 시각이나 『만엽집』에 미친 고대 한반도의 언어와 문화의 영향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본 학계의 자세와는 달리, '고대 동북아시아'라는 관점에서 『만엽집』을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5. 『만엽집』과 고대 동북아시아


앞에서 『만엽집』의 표기 스타일을 설명할 때 예로써 들었지만, 『만엽집』에는 우리말의 '가을바람(秋風)'에 해당하는 '아키카제(あきかぜ)'라는 말이 56개 정도나 된다. 그리고 이 표현이 쓰인 적지 않은 노래는 '가을바람'을 배경으로 하여 만나지 못하는 이성 혹은 죽은 배우자에 대한 그리움을 읊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격의 노래가 신라 시대의 향가에도 보인다. 월명사가 죽은 여동생의 명복을 빌면서 극락세계에서 왕생(往生)하기를 염원한 작품이라는 「제망매가(祭亡妹歌)」가 바로 그것이다.


생사(生死) 길은 /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 나는 간다는 말도 / 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 한 가지에 나고 / 가는 곳 모르온저. / 아아 / 미타불(彌陀佛)에서 만날 나 / () 닦아 기다리겠노라.


한편, 이상과 같은 '가을바람'을 배경으로 한 서정성은 중국의 6조(六朝)15) 중국에서 후한(後漢) 멸망으로부터 수()의 통일 전까지 지금의 남경에 도읍을 둔 오()ㆍ동진(東晋)ㆍ송()ㆍ제()ㆍ양()ㆍ진() 6개 왕조를 아울러서 부르는 말이다.)나 당나라 초기의 한시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고대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는 '가을바람'을 매개로 한 서정성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결국 『만엽집』에 실려 있는 노래들은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성을 지금의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문화공동체로서의 고대 동북아시아의 모습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고전으로서의 『만엽집』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더 생각해 볼 문제들]


1. 만엽집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 인문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가?
상대(上代)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나라로서는 당시의 동북아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참고해야 할 문헌이 바로 만엽집이다.


2. 우리나라에서의 만엽집 연구 현황은 어떠한가?
아직 만엽집의 완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개론서로는 고() 김사엽의 일본의 만엽집(1983)이 있고, 최근 나온 연구서로는 이연숙의 한일 고대문학비교연구(2002), 박상현의 만엽집과 정치성(2004), 임성철의 만요슈와 고시조의 화조풍월(2005), 구정호의 만요슈(2005) 등이 있다.


3. 만엽집은 어떻게 연구하는가?
만엽집은 한자로만 쓰여 있다. 따라서 만엽집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고사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만엽집에 관한 적지 않은 주석서도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만엽집, 박상현>

 

오토모노 야카모치(일본어: 大伴家持, 718년경 ~ 785년 10월 5일)

오토모노 야카모치(일본어: 大伴家持, 718년경 ~ 785년 10월 5일)는 일본 나라 시대 말기의 관리이자, 《만요슈》 제4기의 가인(歌人)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집안인 오오토모 집안은 원래 야마토 조정에서 대대로 무예를 맡아온 무문(武門)이었다. 할아버지 야스마로(安麻呂), 아버지 다비토(旅人)와 함께 고급 관리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덴표(天平) 시대의 정쟁을 헤치고 엔랴쿠(延曆) 연간에 이르러 주나곤(中納言)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한 많은 인생 경험을 심화시키고 자연을 단순한 감각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심정(心情)의 상징으로 다루어, 근대적 가풍(歌風)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력

덴표 10년(738년)에 내사인(內舍人)을 맡고 있었던 기록이 보이며, 덴표 12년(740년)에 일어난 후지와라노 히로쓰구(藤原廣嗣)의 난의 평정을 기원하는 쇼무(聖武) 천황의 이세(伊勢) 행차에도 따라갔다. 덴표 17년(745년)에 종5위하 관위를 받았으며, 이듬해 3월에는 궁내소보(宮内少輔), 7월에는 엣추노카미(越中守)가 되어 덴표쇼호(天平勝寶) 3년(751년)까지, 엣츄노쿠니를 다스리는 동안 220여 수에 달하는 노래를 읊었다고 전한다.

 

쇼나곤(少納言)이 되면서 수도로 귀경한 뒤, 덴표쇼호 6년(754년) 병부소보(兵部少輔)로 임명되어 이듬해 나니와(難波)에서 방인(防人)의 검교를 맡게 된다. 이 때의 방인과의 만남이 《만요슈》의 방인가수집(防人歌収集)으로 엮여 실려 있다. 덴표호지(天平寶字) 2년(758년)에 이나바노카미(因幡守)가 되었으며, 이듬해 1월에 읊은 이나바 고쿠후(國府)에서의 노래는 《만요슈》의 맨 마지막에 실린 노래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덴표호지 원년(757년)에 고켄(孝謙) 여제를 폐위하고 다른 황자를 즉위시키려다 발각된 다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야카모치는 이 난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후지와라노 요시쓰구(藤原良繼) ·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石上宅嗣) · 사에키노 이마에미시(佐伯今毛人) 등 세 명과 함께 당시의 권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의 암살 계획을 입안했다고 여겨진다. 암살 계획은 미수에 그쳤고, 덴표호지 7년(763년)에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야카모치도 체포되었지만, 후지와라노 요시쓰구 한 명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면서 문죄를 면했다. 하지만 이듬해(764년)에 사쓰마노카미(薩摩守)로 좌천된다. 진고케이운(神護景雲) 원년(767년) 다자이쇼니(大宰少弐)로 옮겨진다.

 

진고케이운 4년(770년쇼토쿠(稱德) 천황이 승하한 뒤, 좌중변(左中弁) 겸 중무대보(中務大輔)라는 요직을 맡게 되었다. 같은 해에는 정5위하로 승진했다. 고닌(光仁) 천황의 치세에 야카모치는 식부대보(式部大輔)ㆍ좌경대부(左京大夫)ㆍ위문독(衛門督) 같은 수도의 요직이나 가즈사(上總)ㆍ이세 같은 대국의 카미(守)를 역임하는 한편, 호키(寶龜) 2년(772년)에는 종4위하, 호키 8년(777년) 종4위상, 호키 9년(778년) 정4위하로 순조롭게 승진해 나갔고, 호키 11년(780년) 참의로서 공경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이듬해인 호키 12년(781년)에는 종3위가 되었다.

 

간무(桓武) 천황의 치세인 덴오(天應) 2년(782년) 정월에는 황족 히카미노 가와쓰기(氷上川繼)의 난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아 잠시 삭탈관직되어 수도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석 달 뒤인 4월에 죄를 사면받고 참의로 복직, 이듬해인 엔랴쿠 2년(783년)에 주나곤의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엔랴쿠(延曆) 4년(785년) 겸임하고 있던 무쓰안찰사(陸奥按察使)ㆍ지절(持節) 정동장군(征東將軍)의 직무 수행을 위해 머무르고 있던 무쓰(陸奧) 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68세였다.

 

숨을 거둔 직후, 새로 축조중이던 나가오카쿄(長岡京)에서 일어난 후지와라노 다네쓰구(藤原種繼) 암살 사건에 야카모치 자신도 관여했었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고, 그의 시신은 땅에 묻히는 것을 허락받지도 못하고 제명되었다. 아들 나가누시(永主)는 오키(隱岐) 국에 유배당했다. 헤이안쿄(平安京)로 수도를 옮기고 간무 천황이 숨을 거두고 난 뒤인 다이도(大同) 3년(806년)에야 죄가 사면되어, 종3위 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가인(歌人)으로서의 야카모치

그가 지은 와카는 장가ㆍ단가 합쳐 모두 473수가 《만요슈》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는 《만요슈》전체 분량의 1할이 넘는다. 이를 통해 《만요슈》의 최종 편찬자는 바로 오토모노 야카모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만요슈》에 실리지 않은 다른 와카도 있는데 덴노의 명으로 편찬된 《슈이와카슈(拾遺和歌集)》에 3수의 와카가 실린 이래로 칙선(勅撰)[1]으로 편찬된 와카집에 실린 것은 모두 60수에 달한다. 그의 노래 가운데 하나인 '바다에 가면(원제: 海ゆかば)'[2]은 태평양전쟁 당시에 일본군의 군가로서 그 가사가 쓰였으며(작곡: 노부토키 기요시) 일본군 병사들에게 옥쇄를 장려하는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勅撰

천황의 명으로 특별히 편집된 것을 말한다.

 

* 海ゆかば

원래는 무쓰노카미였던 구다라노고니키시 쿄후쿠(百濟王敬福)가 무쓰노쿠니에서 황금을 발견한 것을 경축하기 위해서 야카모치 자신이 읊었던 노래의 일부분이었다. 그 중 군가의 가사로 쓰인 대목은 "바다에 가면 젖은 송장, 산에 가면 잡초 무성한 송장, 대군(大君)의 곁에서 죽을 수 있다면 죽어도 편안히 죽으리라(海行かば水漬く屍 山行かば草生す屍 大君の辺にこそ死なめ かへり見はせじ)"이다.

계보

  • 아버지: 오토모노 다비토(大伴旅人)
  • 어머니: 다지히노 이라쓰메(丹比郎女)
  • 부인: 사카노우에노 오이라쓰메(坂上大嬢) [3]
    • 아들: 오토모노 나가누시(大伴永主)

*坂上大嬢

일명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大伴坂上大嬢). 덴표 4년(732년)무렵과 덴표 11년(739년)무렵에 야카모치와 단가를 주고 받았던 것이 알려져 있으며, 야카모치의 정실이기는 하지만 야카모치의 아들인 나가누시의 생모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