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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겨눈 배신의 입맞춤

류지미 2023. 6. 11. 08:50

예수를 겨눈 배신의 입맞춤

 

올리브산의 겟세마니에는 거대한 올리브나무가 있었다. 어른들 여럿이 손에 손을 잡고 둘러서야만 껴안을 수 있을 만큼 컸다. 그 근처에 돌판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MY FATHER, IF IT BE POSSIBLE, LET THIS CUP PASS FROM ME ; NEVERTHELESS NOT AS I WILL, BUT AS THOU WILT.(Matthew 26:39)”

 

올리브나무들 곁에는 장미가 피어 있었다. 풀들도 자라고 있었다. 그 사이를 거닐며 잠시 묵상에 잠겼다.

예수가 성전 경비병들에게 체포된 곳은 겟세마니 동산이었다. 그곳에는 올리브나무가 가득했다고 한다. 지금도 겟세마니 동산에는 아름드리 올리브나무들이 서 있다. 백성호 기자

 

2000년 전 이곳에 엎드려 기도했던 예수. 그가 섰던 삶과 죽음의 갈림길. 어쩌면 예수에게는 그 길이 갈림길이 아닐 수도 있었을까. 예수의 눈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가는 외길일 수도 있었을까.

 

그런데도 예수가 겟세마니에서 털어놓은 “너무 괴로워 죽을 것 같은” 심정과 피처럼 흘린 땀방울은 우리의 어깨를 토닥인다. 예수 역시 우리처럼 번민하고, 그 번민을 뚫고 갔다는 사실이 소나기 같은 위로와 용기로 우리를 적신다.

 

바로 그때였다. 예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성전의 사제들과 경비병들이었다. 그들이 어둠을 뚫고 예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몰려왔다. 손에 횃불과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를 찾았을까. 어두운 밤, 예수와 제자들만이 은밀히 움직였을 텐데 말이다.

 

성전 경비병들 앞에 유다가 있었다.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처럼 말이다. 유다는 예수에게 다가와 “스승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며 입을 맞추었다. 텔레비전도, 신문도 없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캄캄한 밤이었다. 성전에서 온 이들은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몰랐을 터다. 한밤중이라 얼굴을 식별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와 올리브산으로 올라가는 길. 왼편 언덕이 올리브산이다. 백성호 기자

 

유다가 그 문제를 해결했다. 예수에게 건넨 ‘배신의 입맞춤’으로 말이다. 그들은 ‘유다가 입 맞추는 사람이 예수’라는 신호를 미리 주고받았다. 입맞춤과 함께 성전의 경비병들이 예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욱하는 성격의 베드로가 칼을 뽑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러 용도로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니기도 했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는 대사제의 종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상대방의 귀가 잘려 피가 흘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예수가 입을 뗐다. 그의 말은 뜻밖이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오 복음서 26장 52절)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복음서 18장 11절)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도 예수의 가르침은 달라지지 않았다. 예수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고 했다.

 

칼이 뭔가. 분노다. 예수는 “네가 꺼낸 분노를 다시 근원으로 되돌려라”고 말한 셈이다. 우리는 수시로 가슴에서 칼을 꺼낸다. 분노의 칼, 증오의 칼, 두려움의 칼, 원한의 칼을 자꾸만 칼집에서 꺼낸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말한다. “도로 칼집에 꽂아라!” 무슨 뜻일까. 포맷을 시키라는 말이다. ‘0’으로 되돌리고, ‘공(空)’으로 되돌리고, 고요로 되돌리라는 뜻이다.

예수가 겟세마니 동산에서 바위에 엎드려 기도하며 땀을 피처럼 흘렸다는 곳이 여기다. 지금도 이곳에는 당시에 있던 올리브나무의 후손들이 자라고 있다. 백성호 기자

 

예수의 눈에는 빤히 보인다. 칼을 꺼낸 자는 칼로 망하고, 분노를 꺼낸 자는 분노로 망하고, 원한을 꺼낸 자는 원한으로 인해 망한다. 왜 그럴까. 그 칼이 상대를 찌르기 전에 자신을 먼저 찌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했다.

 

왜 다시 칼집일까. 칼이 들어간 자리, 분노가 들어간 자리, 원한이 들어간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칼을 도로 칼집에 꽂는 일이야말로 ‘나의 십자가’다. 증오를 다시 칼집에 꽂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십자가다. 성전 경비병들에게 체포되는 급박한 순간에도 예수의 눈, 예수의 말씀은 이치를 관통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똑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달리 말한다.

“이 잔은 내 잔이 아니오. 저 잔을 주시오. 저게 내가 원하는 잔이오.”

 

예수는 달랐다.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칼부림 속에서도 예수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기꺼이 잔을 마셨다. 그 잔의 이름은 ‘십자가’였다.

예수가 겟세마니 동산에서 바위에 엎드려 기도했다고 전해지는 장소다. 이 바위 앞에서 가톨릭 사제와 신자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다. 백성호 기자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이 예수가 엎드려 기도했던 겟세마니의 바위 앞에 엎드려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린다. 그 위로 고요가 흐른다. 저들은 무엇을 찾고 있을까. 저들은 무엇을 구하고자 기도할까. ‘나의 뜻’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뜻’일까.

 

짧은 생각

 

 

예수는 왜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 칼집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내가 꺼낸 분노가
내 마음에서 나왔듯이
그 분노의 칼을
다시 집어넣을
칼집도
내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따집니다.

장부가 칼을 뺐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지,
다시 칼집에 꽂으면
어떡하나.

이 말은
초지일관하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메시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가 설한
분노의 칼은
그것과 좀 다릅니다.

왜냐고요?
그 칼에는
독기가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분노의 칼을 뽑을 때
독이 없을 때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중팔구
거기에는 독기가
서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독기는
상대방에게 가닿기 전에
어김없이 자신을 먼저
적시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을 찌르기 전에
자신을 먼저
찌르는 법입니다.

 

 

화병이라고 아세요?
화가 너무 나서
병이 된 겁니다.
그게 화병입니다.
어른들은
화병에는 약도 없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병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화병에도
약은 있습니다.

내가 꺼낸
화의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면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화의 칼에도
어김없이
독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 칼을
자꾸 꺼내다 보면
어느새 내가 먼저
그 독에 중독되고 맙니다.
칼을 꺼낼 때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먼저
찔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걸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말했습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그렇게 자신을
회복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런 물음도
생깁니다.
분노의 칼을 빼서
상대방을 쳐버리면
평화가 올 텐데
왜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라는 걸까.

 

맞습니다.
칼로 상대를 쳐도
평화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화는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잠깐만
평화를 느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평화는 다릅니다.


분노의 칼을
칼집에 다시 꽂은 뒤에
찾아오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평화는
본질적 평화입니다.
시들지 않는
평화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그런 평화 속에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백성호의 예수뎐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