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袁世凱)
(1859~ 1916)

홍헌제 | 洪憲帝
대청 제2대 내각총리대신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
중화제국 초대 황제
홍헌제 | 洪憲帝
1898년엔 황제를 배신했고, 1911년엔 제국을 배신했으며, 1915년엔 공화국을 배신한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군벌, 즉 북양군벌의 수장이며,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초대 총통이고, 중화제국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다.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공화국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를 자칭한 중국 역사상 최악의 한간(漢奸)이라고도 불린다. 군사적 역량은 탁월하나 적과 결탁하여 자신의 나라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오삼계와 여러모로 닮았다.
중화제국 때문에 선통제가 아니라 이 사람이 중국 역사상 최후의 군주라는 주장도 있지만 정사복벽과 만주국 때문에 다르게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공화국의 대통령(총통)[13]과 군주국의 군주를 둘 다 해본 사람이다.
한국과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재하면서 내정 간섭을 수행한 악연이 있다.
3.1. 출생과 양자 입적
숙부였던 위안바오칭은 매우 기뻐하며 열심히 양자를 키웠는데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제일 유명한 선생을 붙여줬지만 위안스카이는 도통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대신 말타기를 좋아하고 무예를 열심히 익히는 등 문(文)보다 무(武) 쪽으로 지나치게 열정을 보였다.
그래서 위안스카이는 진사 시험도 3번씩이나 떨어진 백수였는데 이것을 보면 위안스카이가 별 볼일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당시엔 진사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중국에서 진사가 되려면 먼저 강 부현에서 생원자격 얻은 사람들 중에서 피튀기게 경쟁하여 각 성에서 뽑는 거인이 되어야 하며 이런 십몇개 성에서 보낸 수천명의 거인들 가운데서 300등안에 들어야 하기에, 세계에서 가장 붙기 어려운 관리 임용 시험이었다. 당대의 지성인으로 손꼽혔던 손문조차도 시험에 계속 낙방하다가 결국 관리 진출을 포기하고 의원으로 활동했다.
3.2. 조선에서의 감국(총독)
청일전쟁 패전 후 위안스카이는 이홍장으로부터 넘겨받은 북양군을 틀어쥔 상황에서 1898년 광서제와 캉유웨이가 주도하는 변법자강운동에 협조하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대부에게 이를 밀고하면서 뒤통수를 날려 변법개혁을 박살내고 수구파에게 정권을 넘기는데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위안스카이가 한간(漢奸) 소리를 듣게 되는 시발점이자 경력 가운데 가장 극적이면서 유명한 사건이다. 이 결과 광서제는 유폐당하였고 나중에 서태후가 죽기 전날에 갑자기 죽었는데 2008년 광서제의 머리카락을 조사한 결과 다량의 비소가 발견되면서 독살로 밝혀졌다.
3.3. 의화단 사건 진압과 권력 접근
한동안 청의 외무부(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총리아문이 폐지되고 그 대체 기구로 외무부 신설) 총리교섭통상대신이었으나, 청의 마지막 구심점이던 서태후가 죽은 뒤 황제 푸이의 섭정으로 오른 순친왕의 압력으로 낙향했다. 순친왕은 위안스카이를 애초부터 못마땅했었고 심지어 죽이려는 계획까지 했었다.
3.4. 백수에서 청나라의 실권자로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속으로는 청조를 타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단 신해혁명군의 세력을 꺾는 선에서 상황을 멈춘다. 1912년 1월, 위안스카이는 공화파의 쑨원(손문)과 협상 테이블에 앉고 간단한 조건을 내건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황제 폐하도 버리고 청나라도 버릴 테니 쑨원님이 가지고 있는 혁명 정부 대총통 자리를 내놓으라"라는 것.
쑨원은 공화국을 건설할 것과 수도를 난징으로 바꿀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요구했고 협상은 타결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 있는 심복 돤치루이(단기서)에게 황제 퇴위를 준비시켰고, 그의 군대가 자금성을 점령하자 같은 해 2월 12일 선통제를 퇴위시켰다. 이로서 청나라는 멸망하고, 위안스카이는 대총통 자리에 취임하며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야사로 위안스카이를 청조가 재등용할 때, 청나라 황족 중 하나가 '위안스카이는 사마의와 같은 자다.'라고 경고했다는 설이 있다. 중국사에서 사마의는 망탁조의라 하여 대표적인 역적으로 꼽히는데, 위안스카이 또한 그런 식으로 반역자가 될 것이라는 뜻.
3.5. 독재자의 길, 그것을 넘은 황제의 길
3.5.1. 정적 암살과 매국 행위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옛 심복인 국무총리 탕사오이가 공화사상에 물들어 말을 듣지 않자 압박하여 내쫓았고 1912년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을 일으켜 혁명당원을 제거하는 한편 빌미를 잡힌 리위안훙을 굴복시켰다. 1913년 선거에서 국민당이 압승하자 위협을 느껴 만만한 외교관 출신의 루정샹을 총리에 삼았다가 생각보다 너무 만만하자[23] 내무총장 자오빙쥔을 국무총리로 삼은 후 새 총리로 유력하던 전 농림총장이자 국민당 대리 이사장인 쑹자오런의 암살을 사주하였다. 쑹자오런은 당시 31살의 젊은 나이로 국무총리에 임명되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시 쑹자오런이 이끌던 국민당의 인기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에게 있어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에 국민당이 반발하여 1913년 7월 계축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혁명을 일으키자 이를 2개월 만에 간단히 진압했다. 그리고는 '공민단'이라는 정치 깡패 집단을 사주해 의회를 개박살내고, 1913년에는 국무총리 슝시링을 겁박하여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켜 버렸다.
여기에 열강 5개국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차관을 들이는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켰고 국민당 해산 이후에 정족수 부족으로 정회되어 유명무실해진 국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하여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까지 단행하면서 실로 '매국 행위 + 독재자'가 되어간다. 1914년 5월 1일에는 중화민국 신약법을 발표, 종신 임기에 세습까지 법률로 보장받게 된다.
3.5.2. 홍헌제제, 황제 즉위

이렇게 모든 정적들을 물리치자, 위안스카이는 모든 중국 권력가들의 영원한 꿈인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 그 야심의 일환으로 위안스카이는 사천도독 윤창형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1914년 12월 20일, 정식으로 공자를 숭상하기 위한 사천전례를 부활하고 12월 23일에 거대한 규모의 제사를 지냈다. 위의 사진이 당시의 모습으로 왼쪽에서 두번째있는 수염 하얀 노인이 위안스카이다.
전부 왕처럼 보이겠지만 위안스카이 혼자만 흉배를 달고 있기 때문에 바로 구분이 된다. 면류관의 평천판에는 면류가 없으며 곤복도 무슨 해괴망측한 정체불명의 형태로, 주나라식 의복도 아니고 단령도 아닌 이상한 모습인데 곤룡포에 들어가는 흉배와 어깨 장식이 아니라 12가지 문양이 수놓아져야 한다. 나름 주나라 시대의 복식을 재현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색한 건 사실이다. 1644년부터 청나라의 중국 정복이 실시됨에 따라 한족 중심의 화이관을 무너뜨리기 위해 의복과 문화 그리고 사상을 크게 탄압해 한족 왕조의 문화가 상당수 소실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1일 국체를 논한다는 이유로 참정원을 소집하여 황제로 추대되었고 12월 12일에 이를 받아들이면서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측근들을 귀족으로 책봉하였으며 12월 31일에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정해서 초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를 홍헌제제라고 한다.
3.5.3. 단 한 사람을 위한 신문
당시 중국의 언론은 모두 위안스카이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군주제를 찬성했는데 일본 외무성이 중국에서 발행했던 신문인 순천시보는 위안스카이보다 강한 일본을 빽으로 업고 있어서 위안스카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공무를 보면서 시세파악을 위해 순천시보를 틈틈이 보곤 했는데 큰 아들 위안커딩은 황태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가 순천시보를 보고 칭제를 포기할까 우려하여 위안스카이를 위한 순천시보를 따로 조작하여 군주제 찬성 여론을 싣게 했다. 이리하여 위안스카이 한 명만을 위해서 위조된 '위안커딩 특제 순천시보'가 위안스카이에게 계속 전해지게 되었고 위안스카이는 모든 여론이 자신의 즉위를 찬성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돤치루이나 펑궈장, 쉬스창 같은 인물들은[25]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에 계속 반대하고 있었지만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를 좌천시키는 등 거의 막무가내로 밀어붙혀 그동안 위안스카이에게 충성하던 측근들도 반감을 품게 된다. 물론 대놓고 개길 힘이 없던 측근들은 대부분은 겉으로는 어서 황제에 즉위하라고 갖은 아양을 떨며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환영하는 척 했다.
3.6. 21개조 요구에 서명, 매국
다만, 이 21개조 요구 수용으로 위안스카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있다. 일본이 비밀리에 요구한 21개조 요구가 민중들에게 전해진 것은 위안스카이가 고의로 흘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실제로 이 조약으로 말미암은 고민이 위안스카이를 죽음(1916년)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다른 유럽 강대국들과 부지런히 접촉하면서 중국을 협상국에 끼게 하고 또 일본의 조건을 완화하려고 시간을 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라 개입할 여유가 없었고, 협상에 도움이 될 학생들의 봉기를 무력 진압하려 든 것은 문제였다.
3.7. 호국전쟁과 몰락
3.7.1. 군벌의 위협

1915년 무렵의 위안스카이.
1915년 12월 23일 차이어, 량치차오, 리례쥔, 탕지야오가 위안스카이에게 24시간 내로 제재를 취소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토벌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내왔지만 전국의 군벌들이 입을 모아 제재를 칭송하던 와중에 위안스카이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갑자기 거기서 왜 나오냐는 반응이라서 무시하였고 결국 12월 25일 전계군벌과 량치차오가 운남성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호국전쟁이 일어났고 루룽팅 등의 군벌들이 관전하다가 대거 합세했다. 호국군은 초기에 조금 주춤했으나 북양군이 잇달아 패하면서 각성이 잇달아 가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옌시산, 장쭤린 등 즉위를 부추기던 쫄따구들은 입을 쓱 씻거나 심지어는 아예 단절 및 독립을 선포하기까지 했고 장쉰, 펑궈장, 진윈펑 등의 측근들까지도 퇴위를 종용하면서 위안스카이는 궁지에 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위안스카이의 딸 숙정이 자신이 좋아하던 잠두콩을 사오라고 여종에게 시켰다. 여종은 잠두콩을 순천시보에 싸서 왔는데 숙정은 아버지가 평소에 읽던 순천시보와 잠두콩을 포장할 때 쓴 순천시보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숙정은 위안커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위안커원도 자신이 얼마 전에 위안스카이가 읽는 순천시보와 시중의 순천시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에 숙정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냐면서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고해 바쳤고 격노한 위안스카이가 다음날 위안커딩을 불러서 사실을 추궁했다. 위안커딩은 겁에 질려 사실을 털어놓으며 용서를 빌었고 위안스카이는 그 자리에서 위안커딩을 채찍으로 후려갈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나라를 말아먹은 놈이라고 크게 꾸짖었다.
이 때부터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은데, 위안커딩은 위안스카이의 믿음이 덜해지자 심지어 동생들을 죽이려는 사변까지 계획했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저 황당한 조작 사건으로 비웃음이나 받고 있지만, 당시의 위안스카이는 나름대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무엇보다도 '단 한 명을 위해서 신문을 찍는다'라는 발상의 전환이 정말 대단(대범?)한 사건이었다.
3.7.2. 울분 속에서 사망하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실망 속에서 분노와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리위안훙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주라고 유언한 후 1916년 6월 6일에 요독증이 악화되어 급사하면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26][27] 그래도 공화국 대통령과 제국 황제를 전부 경험한 지배자의 장례식답게 1916년 6월 28일의 장례식만큼은 황제의 예우를 받으며 성대하게 치러졌고 북양정부의 실력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아버지를 부추겼던 위안커딩은 장례 기간 내내 위안스카이의 시신 앞에서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라고 울부짖었다고 하며 위안스카이의 셋째 첩 김씨가 위안스카이를 따라 죽으려고 시도하다가 저지되었지만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3.7.3. 장례식

1916년 위안스카이의 장례식
위안스카이 사후에는 북양군벌은 안휘군벌과 직예군벌로 분열되어 안직전쟁, 강절전쟁, 제노전쟁이라는 격렬한 내전을 벌였고, 또한 장훈복벽, 호법전쟁 등의 대규모 내전을 야기했다. 이후 동북 지방은 봉천군벌까지 발흥하면서 1차 직봉전쟁, 2차 직봉전쟁, 손봉전쟁, 직봉풍전쟁 등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통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중국은 군벌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고통받았다.
난세의 실력자로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결국 그것이 실패했다는 점에서 종씨인 원술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물론 원세개는 군재만은 확실했지만, 영도력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3.7.4. 무덤 원림
문화대혁명 때는 마오쩌둥이 '특별히 남겨서 반면교사로 삼을 것'이란 명령을 내려서 홍위병들의 파괴를 피할 수 있었다는 야사가 있다.[28] 실제로는 홍위병들이 이 무덤도 폭약으로 폭파하려 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콘크리트로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서 가장자리만 조금 깨진 채 무덤 자체는 멀쩡하게 남았다고. 2013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됐다.
시진핑이 헌법개정을 통해 사실상 종신독재자가 됨으로써 중국 네티즌들이 위안스카이의 고사를 빗대어 폭풍까임을 행하자, 위안스카이의 이름이 금지어가 되었다는 낭설이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4. 후손
위안스카이는 17명의 아들 중 김씨가 낳은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과 이씨(김씨의 몸종 출신 이씨)가 낳은 다섯째 아들 위안커취안(袁克權)을 가장 총애했는데 특히 위안커원은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 후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실 우씨가 낳은 적장자 위안커딩(袁克定)은 독일과 영국에 유학을 다녀온 자신이 대통을 이어야 한다고 여겼지만 위의 사건과 특히 1913년 승마를 하다 떨어져 한쪽 다리를 저는 바람에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빌헬름 2세를 예방했을 때 중국에서 군주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부추김을 받고는 신나서 순천시보 조작 사건을 비롯하여 군주제 선동 여론을 일으키고 다녔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톈진의 독일 조계지에 숨었으나 과거처럼 권력에 눈이 멀어 행패를 부리고 다니진 않았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로부터 한간이 되라는 회유를 받았으나 거부하고 궁핍하게 살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문사연구관 연구원이 되어 일하다가 1958년에 사망했다.
1914년 위안스카이의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 등이 중국과 미국의 골동품상과 결탁하여 당태종의 무덤인 소릉(昭陵)에 있는 육준(六駿)의 석각을 훔쳤다. 소릉에는 당 태종이 전쟁에 썼던 여섯마리의 준마(駿馬)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이름은 특륵표(特勒驃), 삽로자(颯露紫), 청추(靑騅), 권모과(拳毛瓜), 십벌적(什伐赤), 백제오(白蹄烏)이다. 위안커원 일당은 삽로자와 권모과 두 석각을 훔쳐갔으며 4년 후인 1918년 다시 잠입하여 나머지 네 석각도 훔쳐가려 했으나, 중간에 현지 주민들에 의해 발각되어 반출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때 화를 면한 네 석각은 현재 시안비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미 해외로 반출된 두 석각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에 있기 때문에 이 두 석각은 시안비림 박물관에 레플리카로 전시되어 있다.

위 석각은 미국으로 반출된 삽로자로 잘 보면 군데군데 금이 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너무 무거워서 훔쳐가기 편하게 여러 조각으로 잘라냈기 때문이다. 출처 반면 시안에 있는 삽로자와 권모과의 레플리카는 당연히 잘라 낸 흔적이 없다.
위안커원은 원래 샹치와 마작 유단자로서 명성을 날렸었다. 위안커원은 한 때 후계자 1순위였지만 머지않아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황제 자리에서 밀려나고 병사한 후에는 다시 장기와 마작으로 일생을 지냈다가 1931년 톈진에서 향년 42세로 사망했다. 사실 더 유명한 것은 아버지 위안스카이의 대총통과 황제 시절 위안커원의 기녀 출신 측실이 무려 785명이나 있었다는 것이다. 위안커원의 셋째 아들 위안자류(袁家騮)는 물리학자로써 미국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석좌교수를 지냈고 대만에서 국립타이완대학 대우교수를 지내다가 2003년 향년 91세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위안자류의 부인은 장쑤성 타이창 출신의 물리학자 우젠슝(吳健雄)으로 베타 붕괴를 발견하고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미국 물리학회 첫 여성 학회장, 울프상 최초의 물리상 수상, 맨하튼 계획 참여, 과학자 중 최초로 살아 생전 자신의 이름을 딴 소행성(2752 우젠슝)을 가진 저명한 물리학자이다. 1997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이후 위안자류는 2001년 미국 시민권자 신분으로 남동생과 아들, 손주 등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자녀가 32명, 손자만 79명이었던 만큼 자손들도 매우 많은데, 가끔 중국이나 미국 등지에서 활동 중인 후손들의 행적이 보도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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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국대신 위안스카이와 감국대사(監國大使) 싱하이밍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일본에 조선의 "소유권"을 포기한다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조선은 청의 속국이었다는 뜻. 조선을 창건한 이성계가 조선과 화령(和寧)이라는 두 개의 국호를 명나라에 보내어 '결재'를 받았을 때부터 조선은 중국의 일부가 된 셈이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전 조선 공문서나 각종 문헌에 중국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이 독자적인 연호(광무)를 사용한 것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2년 후인 1897년이다. 대한제국 이전의 조선은 중국의 일개 자치구 정도였던 셈.
500여 년 계속된 중국인들의 조선에 대한 뿌리 깊은 인식이 인위적인 조약이나 역사적 사건만으로 간단하게 지워지진 않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의 고위 관료 가운데 "얼마 전까지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최근 어느 책에서 봤는데, 1945년 장개석이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장개석의 머릿속엔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에 빼앗긴 조선을, 일본이 중국에 항복했으니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것 같다. 미국과 소련이 중국(국민당)을 배제하고 한반도에 진주하자 중국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며 "땡강"을 부렸을 법도 한데, 그런 흔적은 아직 보지 못했다. 6.25 때 장개석이 한반도에 파병하겠다고 했지만 미국이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원세계(袁世凱), -요즘은 '위안스카이'가 올바른 표기법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겐 지명도가 꽤 높은 쪽에 속한 중국인이다. 임오군란 진압차 조선에 들어와 고종을 부하처럼 대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다. 원세개를 감국대신(監國大臣)이라고 하는데, 공식 직함인지 별칭인지 모르겠다. 감국(監國)이란 직함은 정복지를 황제 대신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일종의 황제 대행이라고 한다. 통상의 총독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이라고 한다.
며칠 전 주한중국대사 싱하이밍(邢海明)이 이재명을 집으로 불러 저녁을 먹인 뒤 일국의 대사로서는 주제넘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말을 했다고 해서 언론에서 시끄럽다. 외교 문외한이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말인데, 0.74%만 극복했으면 대통령이 됐을 뻔했던, 평소 순발력이 좋은 데다 사이다처럼 시원한 "말 펀치"를 잘 날린다는 이재명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듣고만 있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싱하이밍 옆에 공손하게 앉아 있는 이재명의 영상을 보면서, 조폭처럼 생긴 자(조폭이 아니라는 해명이 있었음)가 성남시장 책상 위에 구둣발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을 때, 그 옆에 서있던 이재명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싱하이밍도 원세개를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고, 원세개처럼 행동하고싶은 욕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싱하이밍의 "이재명 면전 발언"은 원세개 시대와 다른 점을 감안한 표현일 뿐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 정권의 외교 관리에게 그렇게 말했다간 당장 반격 받을 것을 우려하여 외교에 무지몽매할 것 같고, 친중적인 이재명을 활용한 게 아닌가 추측된다.
[출처] 감국대신 위안스카이와 감국대사(監國大使) 싱하이밍|작성자 필코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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