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윤회와 호텔서 밀회?”…朴 직접 밝힌 ‘세월호 7시간’ [박근혜 회고록 10 - 세월호 (상)]
박근혜 회고록
박근혜 회고록, 침묵을 깨고, 역사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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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는 내 재임 중 벌어졌던 일들 가운데 가장 처참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먼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30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국민 여러분께 큰 상처를 남기게 된 점에 대해 이 회고록을 빌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이 참사에 대해서는 당시 국정을 책임졌던 내가 누구보다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랬기에 당시 세간에서 나와 관련해 제기됐던 온갖 의혹이나 추문에 대해서 일일이 해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그게 또다시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려고 한다.

세월호 침몰사고 사흘째던 2014년 4월 18일 사고 해역에서 해경과 해군 등이 선체에 공기를 주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2014년 3월 말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가장 바쁜 시기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작은 3월 20일에 열린 규제개혁 장관회의였다. 대통령이 되고 규제개혁을 여러 번 강조해 왔기에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싶었던 나는 당시 회의에서 “물건을 빼앗는 것만 도둑질이 아니라 일자리를 규제로 빼앗는 것도 도둑질”이라고 강조하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현장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면서 회의가 무려 일곱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오후 2시 시작한 회의가 저녁도 거른 채 오후 9시에 끝났을 때 나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이틀 뒤엔 3월 24~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약 14시간의 비행을 거쳐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헤이그는 이미 밤이었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한·중 정상회담을 위해 곧바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야 했다. 북한 핵 문제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문제 등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어 열린 핵안보 정상회담도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등 53개국 정상이 참석한 국제회의였다. 나는 24일 개막 세션에서 기조연설을 맡았고, 다음 날에는 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강행군이 이어졌다. 한·미·일 정상회담은 몸이 너무 안 좋아 링거를 맞고서야 겨우 참석했는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한국말 인사를 제대로 듣지 못해 오해를 받았을 정도였다. 헤이그 일정을 마친 뒤엔 3일간의 독일 순방이 이어졌다.

2014년 3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네덜란드 핵안보정상회의와 독일 순방 등을 마치고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중앙포토
이렇게 5박7일간의 빡빡한 순방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엔 시차 적응까지 겹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일정이 연일 이어졌다. 3월 31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재외공관장 회의가 열렸다. 각국에 파견된 외교관들이 참석하는 행사인데, 나는 4월 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만찬을 주재했다.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이들을 앉아서 맞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입구에 서서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고 각 나라의 상황도 물어보다 보니 선 채로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8일에는 방한한 토니 애벗 호주 총리와 만나 한·호주 정상회담을 가졌고, 14일에는 21명의 대사에게 신임장을 수여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을지 몰라도 실상은 몸이 부서지는 듯했다.
이런 나의 상태가 주변에 아슬아슬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하루는 정호성 비서관이 나에게 “대통령님, 차라리 하루만 일정을 비우고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했다. 사실 나도 ‘이러다가 큰일나겠다’ 싶었던 차라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무리하게 몸을 축내는 것보다 관저에 머무르면서 업무를 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관저라고 해도 서재나 책상 등이 있어 충분히 업무가 가능한 환경이다. 그렇게 해서 쉬기로 한 날이 바로 운명의 날인 4월 16일이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뒤 야당에선 내가 이날 왜 본관에 가지 않고 관저에 머물렀는지를 놓고 여러 의혹을 제기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정호성 비서관은 쉬기로 했던 4월 16일에 나의 연가 신청을 처리하지 않았다. 아마도 비공식적인 자체 휴일 정도로 간주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날을 공식 휴가로 생각했던 나와 혼선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날 무수히 벌어진 혼선의 예고편이었다.
( 강행군 뒤 관저서 휴식… 첫 보고 7~8분 늦어 )
4월 16일 오전은 당연히 공식 일정이 없었지만 일상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관에는 가지 않는 대신 관저에서 그동안 처리하지 못했던 보고서 등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세월호가 기울어진다는 신고가 119에 처음 접수된 것은 이날 오전 8시 54분이다. 김장수 안보실장이 사고 발생을 인지한 것은 9시30분, 상황보고서 초안을 받고 나에게 직통전화를 걸었던 때가 오전 10시 12~13분이었다.
이때까지 사고 사실을 모르고 있던 나는 보고서를 읽다가 참고할 자료를 찾느라 휴대전화를 놔둔 채 다른 방에 가 있었다. 쉬는 날인 만큼 경계심이 다소 느슨해진 면도 있었다. 휴대전화를 그곳까지 들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황이 급박했기에 김 실장은 계속 통화를 시도하기보다 안보실 직원을 통해 상황보고서 1보를 바로 관저로 보냈다. 그때가 오전 10시20분이었다. 많은 이가 비판하듯이 이때 나에게 첫 보고가 들어오는 데 약 7~8분이 늦어진 것이다.
보고서를 받아본 나는 깜짝 놀랐다. 배 안에 수 백 명이나 탑승하고 있다고 하니 무엇보다 이들의 안전부터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곧바로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무엇보다 인명피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객실 곳곳을 다 찾아서 누락 인원이 없도록 하세요”라고 지시했다(오전 10시22분).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 “배 곳곳을 샅샅이 다 뒤져야 합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해경특공대라도 투입해 여객선의 객실과 엔진실까지 철저하게 확인해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세요”라고 주문했다(오전 10시 30분).
이것이 세월호 사고 발생을 인지한 직후 청와대의 첫 대응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해경이 현장에 도착했던 오전 9시30분쯤 세월호는 좌현으로 기울어져 복원력을 상실했고, 1시간 뒤에는 거의 침몰한 상태였다(오전 10시 30분).
하지만 당시엔 아직 현장 화면이 확보되지 않았고, 침몰 사실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구조 장비를 총동원하고 해경이 투입되면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와대의 대체적인 분위기도 그랬다. 이후 국가안보실을 통해 두 차례(오전 10시40분, 오전 11시20분) 상황보고서가 도착했지만, 배가 침몰했다거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하는 내용은 없었다.
( ‘전원 구조’ 보도에 안도… 확실히 안 따진 것 안이했다 )
지금 돌이켜보면 이때 언론 보도와 안보실에서 파악한 숫자가 다른 이유를 더 따져 물었어야 했다. 나는 언론에서 그런 중대한 일을 잘못 보도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고, 약간의 보고 지연이 생긴 것으로 짐작했다. 돌이켜보면 너무 안이한 판단이었다.
야당과 일부 언론은 4월 16일 오전 10시부터 내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방문한 오후 5시까지를 ‘잃어버린 7시간’, 또는 ‘세월호 7시간’이라고 명명하며 의혹을 제기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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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oh****1시간 전
" 전원구조" 오보도 의심스럽다. 전 언론사에 속보로 타전된 그 오보를 보고, 무두들 안심하였다. 우연의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 하지 않나.. 규정을 무시하고 단원고 학생 전원을 세월호에 태워 제주도 보낸 것도 의심스럽고, 모두를 안심시켜 구조 타이밍을 늦춘 것 같은 그 모든 언론사의 오보가 속보로 전해진 일도 너무나 의심스럽다. 그외에도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좋아요34화나요4 -
yhoh****1시간 전
세월호 사건.. 이건 기획된 사건이 아니었는지 규명이 필요하다. 아이들 사고는 가슴아픈 일이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해 누군가 고의로 일으킨 사고라면 철저하게 규명하여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 이 사고 이후 결국, 아무 잘못도 없고 최선을 다한 대통령이 탄핵되었고, 대한민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으며, 현재 진행형이다. 세월호.. 그당시 아이들 수학여행을 보냈던 나로서는 처음 드는 생각이.. 단원고 학생 전원이 세월호를 타고 제주 수학여행? 그당시 수학여행 사고 방지를 위해 인원제한이 있었다. 즉, 500명이 넘는 우리 애들 학교만 해도 수학여행지를 반드시 3군데로 나눠서 보내야 했다. 다른반 친한 친구들과 따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어 아쉬워 했고, 선생님들과 학부모들도 불만의 말들이 많았지만, 그만큼 학생들 안전을 위해 모두들 협조해 주었다. 그런데 단원고 학생 전원이 제주도? 게다가 한개 배를 타고??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다.
답글 2좋아요40화나요5 -
kimy****2시간 전
대통령님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에게 대구에서 힘을 실어주세요. 세월호와 관련된 오해가 많이 회고록 때문에 풀렸습니다!!!!
답글 1좋아요22화나요117
17개 댓글 전체 보기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찾은 박근혜 대통령이 수색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죄송합니다.
190명을 추가로 구조했다는 것은 중복 보고입니다.
잘못된 보고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오후 2시 50분 세월호 사고 현장으로부터 ‘전원 구조’라는 보고를 기대하던 중 이 보고를 받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김장수) 안보실장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고 회고했다.
박 전 대통령이 24일 중앙일보 프리미엄 디지털 구독서비스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의 ‘박근혜 회고록’을 통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침몰하면서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 학생 등 304명이 희생돼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사고다. 세월호 관련 회고는 24~26일 3회에 걸쳐 연재된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벌어졌던 일들 가운데 가장 처참했던 기억”이라며 “국민 여러분께 큰 상처를 남기게 된 점에 대해 이 회고록을 빌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국정을 책임졌던 내가 누구보다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며 고개를 숙였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은 이번 회고록에서 소위 ‘세월호 7시간’ 의혹에 대해 처음으로 소상히 밝혔다.
‘세월호 7시간’은 박 전 대통령에게 안보실로부터 첫 보고가 들어간 오전 10시 20분부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모습을 드러낸 오후 5시 15분까지를 의미한다.
이때의 박 전 대통령의 행적을 놓고 그간 많은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일각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정윤회씨와 모처에서 밀회를 즐겼다,
프로포폴에 취해 있었다,
굿을 하고 있었다 등의 억측이 사실처럼 떠돌았다.
이 때문에 세월호 구조가 늦어지거나 방기했다는 소문이 확산하면서 민심이 악화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사실이 아니다”라면서도 구체적인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번 회고록에서 “당시 세간에서 나와 관련해 제기됐던 온갖 의혹이나 추문에 대해서 해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져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순환이 발생했다”며 16일 오전부터 중대본에 방문하기까지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설명했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첫 보고를 늦게 확인한 점이나 미용사가 관저에 들어왔던 점 등은 시인했다.
또 전원 구조 보도가 오보로 확인된 직후 중대본에 가기로 결정하고도 경호 문제 때문에 2시간 가까이 방문이 지체된 것을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이라고 꼽았다.
'박근혜 회고록' 자세한 내용은 ‘더중앙플러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10편 회고록 주소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1531 입니다..
■ 더중앙플러스 ‘박근혜 회고록’
「

대구 달성군 유가읍 자택의 박근혜 전 대통령.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① “위안부 합의 들은 적 없어” 윤미향 오리발, 말문 막혔다 [박근혜 회고록 1]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6717
② 朴 커터칼 테러때 도착한 쇠고기, 거기엔 아베 편지 있었다 [박근혜 회고록 2]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6960
③ 안 그래도 ‘최순실’ 터졌는데…朴, 왜 논란의 지소미아 집착했나 [박근혜 회고록 3]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7297
④ 김종인ㆍ이준석 회심의 발탁…朴, 뒤지던 선거판 뒤집었다 [박근혜 회고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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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이명박근혜’ 신조어 공격까지…그래도 난 MB 버리지 않았다 [박근혜 회고록5]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8268
⑥ 내가 재계 로비 받은 듯 비난…김종인, 어처구니없었다 [박근혜 회고록 6]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8520
⑦ 안대희ㆍ이완구 다 날아갔다…“가슴 쓰렸다” 총리 잔혹사 [박근혜 회고록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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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朴 “내가 혼외자 터뜨려 채동욱 찍어냈다? 황당하단 말도 아깝다” [박근혜 회고록8]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9967
⑨ 통진당 해산 반대한 문재인…朴 “위기때 실체 드러나는 법” [박근혜 회고록9]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0295
▶특별사면 후 첫 인터뷰: 박근혜 前대통령 침묵 깼다 “탄핵 제 불찰, 국민께 사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5342
」
유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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