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배우 왕수복민요독창회(1997)
https://www.youtube.com/watch?v=-KlHjDFJ_Y4
일본말로 우리민요 부르기 싫어서 가수활동도 은퇴했을 정도로 자긍심도 무척 강했던 왕수복.
80 고령에 이와같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무대에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00:00 시작
00:23 입장
00:44 시작 인사
02:12 #어화_우리_농민들아 원곡: #태평연 #태평가 / 작사: 강남월/ 작곡:정사인 / 원곡가수: 선우일선 북조선 개사: 미상. 05:03 #몽금포_배노래
09:04 #룡강기나리. 제자1: 연분홍, 왕수복, 제자2: 하늘색 (왼쪽에서 오른쪽 순서)
14:16 #노들강변(신민요). 제자3: 흰저고리 다홍치마
16:38 #느리개타령
18:25 #영천아리랑
20:45 #뻐꾹새
23:10 #배꽃타령
25:44 #능수버들. 제자2: 남색 오지랍 흰 치마.
29:24 #버들노래. 왕수복(노랑치마)
35:07 #꼴망태목동
33:45 #경상도아리랑 제자1: 색동저고리 다홍치마
36:55 #밀양아리랑 왕수복(연두색)
39:14 #매화타령
41:28 #오직_한마음(민요풍). 제자2, 제자3, 왕수복, 제자1 (왼쪽에서 오른쪽 순서)
43:41 끝인사3
본명 왕성실
출생 1917년 4월 23일
사망 2003년 6월 1일(86세)
대한제국 평안남도 강동군 보통학교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평양기생학교에 입학하였다.
기생학교에서 다양한 기예를 배워 기생이 되었다. 노래에 재능을 보인 왕수복은 10대 중반이던 1933년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울지 말아요〉와 〈한탄〉을 취입하여 최초의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가 되었다.
이듬해 데뷔한 선우일선과 함께 기생 출신 신민요 가수로 쌍벽을 이루었다.
1935년에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선우일선, 이난영, 전옥에 앞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유행가의 여왕'으로 불리며 인기 정상에 있던 193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개인 교습으로 서양 음악을 공부했다. 이후 메조소프라노 가수로 변신하여 주로 조선 민요를 서양 성악 창법으로 불렀다. 당시 인터뷰를 통해 "최승희씨가 조선무용을 살린 것처럼 나는 조선의 민요를 많이 노래하고 싶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소설가 이효석과 경제학자 김광진의 연인으로도 유명하다. 1942년 이효석이 사망할 때 임종을 지켰고, 이후 시인 노천명의 연인이었던 김광진과 결혼하였다. 김광진이 월북했을 때 함께 평양에 남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정착했다.
(소설가 이효석 선생이 왕수복 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눈을 감았다고 양명문 시인이 1978년 무렵 언급~~)
1953년에 중앙라디오 방송위원회 전속가수로 가수 활동을 재개한 뒤, 1955년에는 국립교향악단 성악가수가 되었다. 1959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훈배우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말년까지 최고의 대우 속에 활동하고 사후에는 애국렬사릉에 묻혀 있다. 1965년에 김광진과 함께 판문점을 관광하는 모습이 포착되어 대한민국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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