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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김광진 노천명 왕수복 , 네 사람의 엇갈린 사랑

류지미 2023. 10. 29. 19:10

이효석 김광진 노천명 왕수복의 엇갈린  사랑

 

이효석 (1907. 02. 23 -1942. 05. 25)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학과졸업 35세 작고 메밀꽃이 필무렵 강원 평창출신

 

왕수복 (1907년 - 2003년) 북한의 최고 공훈가수  평남 강동출생 평양기생학교출신 북 최고 공훈가수 

 

노천명 (1911년 - 1957년) 시인  대표작  사슴  일제 찬양시로  친일인사로 분류 친일인사로 분류됨

 

김광진(1903~1981) 동경대 경제학부 출신 학자 ,경성제대 법문학부  부수(副手)를 거쳐 조수(助手) 북한 경제통

 

왕수복은 소설가 이효석과 경제학자 김광진의 연인

1942년 이효석이 사망할 때 임종을 지켰고, 이후 시인 노천명의 연인이던 김광진과 결혼. 김광진의 월북행에 동행하여 평양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중앙라디오 전속가수, 교향악단 성악가수로 활동했다. 

 

그 후 공훈배우칭호를 수여받고 살다가 2003년 86세를 일기로 타계. 애국열사릉에 잠든 남편 김광진과 합장됐다

 

-이효석 (1907.02 23,~1942.05.25)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학과졸업 35세 작고 메밀꽃이 필무렵 강원 평창출신

-왕수복 (1907년 - 2003년) 북한의 최고 공훈가수  평남 강동출생 평양기생학교출신 북 최고 공훈가수 

-노천명 (1911년 - 1957년)시인  대표작  사슴  일제 찬양시로  친일인사로 분류됨

-김광진 (1903년~1981년) 동경대 경제학부 출신 학자 경성제대 법문학부  부수(副手)를 거쳐 조수(助手)북한 경제통)  

 보성전문교수이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김광진은 시인 노천명과 결혼직전까지 간 연애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그는 본부인이 있었지만  왕수복과 ....


----이들의 엇갈린 4인의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이야기---


소설가 이효석은 1940년도 아내를 먼저 보내고  홀로 지내다 당시 가수로서 최고위 명성울 떨치던  평양기생학교 출신 왕수복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이효석은  뇌막염으로 병상에 있어 왕수복은 정성껏 간호하나 결국1942년 이효석의 눈을 감기고 서울로 올라와 가수활동을하다.  당시 동경 상대출신 김광진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김광진은 당시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던 노천명과 약혼을 하였으나 사실은  북에 결혼한 부인이 있어 참 얄밉게 두다리 걸쳐 사랑한 남자로 해방되기전 김광진은 왕수복과 함께  북으로 가 두 사람  모두 성공하여 김광진은 북한의  경제학자 교수로서  관료로 승승장구하여 공훈 경제학자 공훈가수로  해피엔딩 주인공이며  김광진은 1981년 사망 ,왕수복은 2003년도 사망.  왕수복은 우즈베키스탄  공연장면 유튜브가  있어 우리와 함께한 시대를 산 여인이다.


 
                                                                                         이효석 사진

보성전문교수이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김광진은 시인 노천명과 결혼직전까지 간 연애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는 본부인이 있었다. 김광진은 해방 이후 스타가수 출신 왕수복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왼쪽은 노천명, 오른쪽은 왕수복.

 

‘김광진씨는 금년 삼십세의 독학자(篤學者)다. 키가 보통 키보다 조금 크고 몸이 후리후리한 것이 강하고 얼굴빛이 햇볕에 탄 것 같은 건강색을 띄고 있다.정규 대학 교육을 받은 연구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1930년대, 보성전문(고려대전신) 교수들을 소개하는 연재기사가 신문에 났다. 메이지대 법학부 출신 최태영,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 유진오 같은 신진 법학자들과 함께 나란히 소개된 이는 경제학자 김광진이었다.

 

1928년 도쿄상과대(히토쓰바시大) 상학부를 졸업한 김광진(1903~1981)은 같은해 경성제대 법문학부 부수(副手)를 거쳐 이듬해 조수(助手)로 임용된 엘리트였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전체에 조선인 조수가 6명 밖에 없었을 때였다. 정식 관등(官等6)까지 받은데다, 월급(60원)도 초년 신문기자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김광진은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을 인수한 1932년 보성전문 전임강사로 채용됐다.1934년5월12일 오후7시 종로중앙기독교청년회강당에서 파시즘을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서 '파시즘의 성립'을 주제로 강연한 김광진 보성전문학교 상과 교수. 함상훈, 신남철이 연사로 나섰다. 보성전문학생회가 주최하고 조선일보 학예부가 후원했다. 조선일보 1934년 5월12일자

 


◇체홉 ‘벚꽃동산’으로 만난 김광진과 노천명


이 근엄한 학자도 ‘연애의 시대’를 피해갈 수없었던 모양이다. 스물 셋 시인 겸 기자 노천명(1911~1956)과 사랑 빠졌다. 두 사람이 만난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일본 유학파들이 만든 신극단체 극예술연구회(이하 劇硏·극연)가 1934년 12월7일~8일 오후6시30분 경성공회당에서 올린 체호프 연극 ‘앵화원’(櫻花園·벚꽃동산)이 계기가 됐다. 극연 창립 3주년 겸 체호프 서거 30주년 기념공연이었다. 

 

당시는 여배우들이 부족했는데 모윤숙, 노천명 같은 엘리트 신여성이 가세하면서 이 연극은 화제를 모았다. 조선중앙일보 기자였던 노천명은 라네프스카야의 딸 아냐로 무대에 섰다. 김광진이 ‘배우 노천명’을 보고 마음이 끌린 것이다. 서른 한살 김광진은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스물셋 노천명은 미혼이었다. 둘은 사랑에 빠졌고, 결혼 약속까지 오갔다. 하지만 김광진이 본처와 이혼을 하려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결국 이혼을 결행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됐다.

 

이화여전 출신의 시인 노천명과 보성전문교수 김광진의 연애는 문화계의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스캔들이었다. 여기에 현민 유진오가 기름을 끼얹었다. ‘김강사와 T 교수’로 이미 유명 작가였고, 김광진과 같이 보성전문 교수였던 현민이 1939년 2월 ‘문장’창간호에 두 사람의 연애를 떠올리는 단편 ‘이혼’을 발표한 것이다.

 


‘윤희와의 관계도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그런 ‘오입’에 조금 털돋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든 것이 방귀가 잦으면 똥을 싼다는 격으로 이번에는 어찌어찌하다가 일이 커지고 만 것이다.’둘의 연애를 지저분한 관계로 묘사한것도 모자라 ‘심각한 미움을 품은 하얀 눈을 재신에게 던졌다. 보기만해도 몸서리치는 무서운 눈이었다’처럼 노천명을 연상시키는 문장이 입길에 올랐다. 

 

그러자 여성 문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모윤숙, 최정희, 이선희 셋이 유진오를 찾아가 항의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유진오는 소설속 주인공과 노천명은 전혀 상관없다고 부인했다. 황금찬 시인이 최정희에게 직접 들었다며 남긴 회고(‘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저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효석 연인 왕수복과 결합


김광진은 1939년 보성전문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양에 돌아가 사업가로 변신했다. 1940년 1월 평안상사 전무, 같은 해10월 조선제정공업주식회사 감사에 취임했다. 못을 만드는 회사였다. 마침 ‘가수왕’ 왕수복(1917~2003)도 평양에 돌아와 있었다. 평양 기생 출신 가수 왕수복은 1935년 월간 ‘삼천리’ 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를 차지할 만큼 유명한 스타였다.

 

왕수복은 1936년 도쿄음악학교에 건너가 성악을 배우면서 이탈리아 유학까지 꿈꿨다. 하지만 행동에 옮기진 못했다. 그러던 왕수복이 고향에 다니러왔다가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이효석을 만나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숭실전문·대동공전에서 가르치던 이효석은 1940년 아내와 사별하고 막내아들까지 잃으면서 방황하던 때였다. 이효석이 1942년 5월 숨을 거둘 때까지 왕수복은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런 왕수복이 열네살 연상인 김광진을 만나 가정을 꾸린 것이다.

 


◇김일성대학 창립 주역


해방 후 김광진은 김일성대종합대학 창설 주역으로 변신한다. 홍종욱 서울대교수에 따르면, 1945년8월17일 김광진은 조만식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결성에 참여했다. 같은달 27일 소련군 지시로 건준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합작,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됐다. 당시 민족계열과 공산계열이 16명씩 균형을 맞춰 구성했는데, 김광진은 민족계열로 참여해 상공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김광진은 당시 조선공산당원이었다는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력균형을 깨기 위한 공작에 참여한 것이다.

 

김광진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가르칠 교원을 유치하기 위해 1946년1월 서울에 내려와 도쿄상과대학 3년 선배인 백남운을 만나 지식인의 월북 공작을 의논했다고 한다. 이어 1947년 1월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부장을 맡았다. 김광진의 임명일은 1946년8월1일로 전 교원중 가장 빠른 것으로 보아 김일성대학설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음을 짐작할 수있다.

 

1965년 5월10일 판문점에 김광진 왕수복 부부가 나타났다. 왕수복은 가수 이난영의 동년배라고 소개하고 같은 시기 활동한 전옥 등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김광진도 평양고보 동기생인 홍종인과 보성전문 동료교수였던 유진오와 친구라고 소개했다. 조선일보 1965년5월11일자

 


◇애국열사릉에 합장된 김광진과 왕수복


이후 과학원 후보원사, 원사로 승진하면서 고대에서 식민지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분야를 다룬 논문을 발표하면서 북한 역사학계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다산 정약용의 사회·경제사상’같은 논문을 쓰면서 정약용 연구에도 가세했다.

 

정치적으로는 조국평화통일위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김일성 훈장까지 받았다. 1981년 세상을 뜨자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왕수복은 결혼 직후 주부로 살다가 가수로 복귀했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타쉬켄트 등으로 해외공연을 다니면서 공훈배우가 됐다. 여든이던 1997년에도 민요독창회를 열 정도로 정정했다. 2003년 세상을 뜬 왕수복은 이듬해 애국열사릉에 잠든 남편 김광진과 합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