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다움 백과
거인군단 모아이가 지키는 이스터섬
Easter Island in Chile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이스터섬에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400년경부터 거대한 조각상 모아이를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수천 킬로미터 바다를 지나 섬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모아이를 만들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되어 있는 조그마한 이스터섬에 현대인을 경탄케 하는 ‘모아이’라는 거대한 석상들이 바다와 내륙을 향해 어지럽게 놓여 있다. 모두 900여 개지만 400여 개만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키가 3.5~5.5미터에 달하고 무게가 20톤 정도이다. 큰 것은 키가 22미터에 무게가 150톤에 이르는 것도 있다. 대부분 400~1680년에 만들어졌지만 11세기경에 가장 많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1722년 부활절에 처음으로 이 섬에 도착한 네덜란드의 야코프 로헤벤 제독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섬을 키가 10미터도 넘는 거인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제독은 세 척의 배를 조심스럽게 섬에 접근시켰다. 제독 일행이 상륙하자 여러 가지 색을 몸에 칠한 원주민들이 환영 나왔는데 원주민들은 보통 키에 붉은 머리칼의 백인이었고 로헤벤 일행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건 단순한 석상에 불과했다.
로헤벤은 섬에 도착한 날이 부활절임을 기념해 섬 이름을 이스터섬(부활절의 섬)이라고 붙였다. 그는 후에 이스터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섬에는 단단한 나무도 없고 밧줄도 없었는데 그와 같이 거대한 석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터섬은 남태평양에 위치한 조그마한 바위섬이다. 남태평양은 미크로네시아(작은 섬들) · 멜라네시아(검은 섬들) · 폴리네시아(많은 섬들)의 세 문화권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중 폴리네시아는 하와이제도와 뉴질랜드 그리고 이스터섬을 꼭짓점으로 하는 거대한 삼각형 해역이며 그 해역에는 350개나 되는 많은 섬이 있다. 폴리네시아의 동쪽 끝(남위 27도 10분, 서경 109도 21분)에 지구에서 가장 고립된 섬으로 불리는 이스터섬이 있다. 타이티섬에서 4000킬로미터, 하와이에서 8000킬로미터, 호주에서 9000킬로미터, 칠레에서 380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서울에서 1만 5000킬로미터, 가장 가까운 대륙인 남아메리카에서도 3800킬로미터, 타이티섬에서 4000킬로미터 떨어진 이스터섬은 그야말로 절해고도이다. 섬은 삼각형 모양인데 각 꼭짓점 부근에는 화산이 있다.
1888년 이래 칠레공화국의 영토가 된 이 섬은 에스파냐 말로 ‘이스라 데 파스크와(파스크와섬)’가 공식 명칭이다. 섬 원주민들 사이에선 ‘라파누이(큰 섬)’로 불렸으며 옛부터 전해오는 이름은 ‘테 피토 테 헤누아’로 ‘지구의 배꼽’이란 뜻이다. 이 말은 옛날 폴리네시아인들이 최초로 이 섬을 발견했을 때 붙인 이름이다. 먼 바다에서 이 섬을 본 사람들이 화산에서 뿜는 연기가 하늘과 섬을 한줄기 탯줄처럼 연결하는 광경을 보고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원주민들은 이스터섬을 지구의 배꼽으로 불렀다. 지금도 이스터섬에는 지구의 배꼽임을 표시하는 상징물이 있다.
이스터섬의 면적은 179제곱킬로미터이며 섬의 생김새는 북쪽의 라노아로이, 동쪽의 포이케, 남서쪽 끝의 라노카오의 세 개의 사화산을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고립되어 있으나 문화적으로는 폴리네시아 지역과 연관되어 있어 이 섬 특유의 독특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기후는 아열대기후이며 천연자원이 적고 종려나무는 많지만 식물의 생장은 느리다.
로헤벤이 상륙한 이후 이스터섬의 역사는 비참한 운명에 시달리게 된다. 첫 방문자인 로헤벤 일행은 섬 주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그들이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은 그들을 환영했지만 생명에 위협을 느낀 로헤벤 일행은 열두 명의 섬사람을 부당하게 사살했다. 1805년에는 미국인들이 섬 주민 22명을 노예로 데려갔고 1862년에는 페루의 악명 높은 노예상들이 이 섬의 왕과 승려 대부분을 사로잡아 구아노(새똥이 굳어 돌처럼 된 비료) 광산에 인부로 데려갔다. 이 노예상들에 의해 이스터섬의 고대왕국은 1862~1870년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다. 최대 1만 5000여 명이나 살고 있었던 이 섬에는 침략자들의 만행과, 천연두 · 매독 같은 전염병에 의해 1877년경 불과 110명의 원주민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1888년 칠레가 이스터섬을 병합한 뒤 인구는 계속 늘어 현재 4000여 명에 이른다.
이스터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고대왕국이 멸망한 후부터 고조되었고 엉뚱한 신화와 전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스터섬의 모아이가 사라진 아틀란티스대륙의 후예들이 만든 작품이라는 주장이 있었고 바다 속에 가라앉은 무대륙의 종교 중심지라는 주장도 있었다. 심지어 이스터섬이 한때 이집트와 교류하면서 거대한 석상을 만드는 기술을 받아들였다는 말도 떠돌았다. 게다가 모아이 머리 위의 붉은색 모자 형상을 외계인이 우주모를 쓴 형상이라고 하면서 외계인이 모아이를 만들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었다.
이스터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전문 학자들도 이스터섬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스터섬의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과학적으로 밝히려고 노력했다. 남아메리카에 퍼져 있는 전설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유사성을 검토하고 태평양의 해류 연구나 식물 분포 등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들의 연구와 조사가 진행될수록 이스터섬의 신비는 점점 밝혀지기 시작했다. 외계인이 모아이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책을 팔기 위한 장삿속이었고 모두 거짓말이었다. 이스터섬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극적인 우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원시적인 도구를 사용했던 원주민들은 거대한 모아이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모아이의 재질은 화산석인데 화산석은 돌연장으로도 단시간 내에 조각할 수 있을 정도로 무르다. 제주도에서도 화산석으로 돌하르방을 손쉽게 만들었다. 대규모의 조각을 할 때에도 수준 높은 기술이 요구되지 않는다.
조각된 모아이를 옮기는 방법도 비교적 간단하다. 노르웨이의 헤이엘다르는 1956년 섬사람들 180명을 동원해 12톤의 모아이를 6.5킬로미터 떨어진 해안까지 한 달 만에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정교한 Y자형 나무로 만든 썰매를 이용하면 적은 수의 인원으로도 쉽게 거대한 모아이를 옮길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실험에 사용한 모아이는 지금도 아나케나해안에 서있다.
이스터섬의 석상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고 많은 학자들이 그 신비를 풀기 위해 도전했다.
모아이를 세우는 방법도 간단하다. 정교한 지렛대를 사용하면 25~30톤에 달하는 거석도 간단히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지 주민들을 동원해 모아이를 세우는 작업을 재현해보니 놀랍게도 열두 명의 인원으로 18일 만에 모아이 하나를 세울 수 있었다. 어떤 기계장치의 도움 없이도 거석을 세울 수 있었다.
이스터섬 주민들이 모아이의 운반 및 설치 작업을 재현하고 있다.
한편 이스터섬 주민들의 언어를 해석하면 억측에 휘둘렸던 문제들이 쉽게 풀린다. 섬사람들은 모아이가 쓰고 있는 붉은색 모자를 ‘푸카오’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작은 쪽머리(뒤통수를 틀어 올린 머리모양)라는 뜻이다. 이스터섬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런 형태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고 많은 인디언들의 머리색이 붉다는 점을 생각하면 붉은 모자의 정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모아이는 누구를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일까? 우주인이 자신을 모델로 해 조각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제외하면 진실은 너무나 소박하다. 모아이의 모델은 바로 원주민들의 선조로서 왕이나 고관들 또는 원주민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때때로 조각가나 신격화된 사람의 이름이 모아이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독특한 형태 때문에 모아이의 빨간 모자가 우주인이 썼던 우주였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학자들은 모아이보다는 ‘말하는 목판(롱고롱고)’에 더 주목했다. 이 목판은 남태평양 섬들에서 최초로 발견된 원주민 문자이기 때문이다. 이 목판에 관심을 가졌던 최초의 유럽인은 프랑스 선교사인 외젠 에이로 신부였다. 그가 1860년대에 이 목판을 발견했을 때 이스터섬 주민들은 섬의 역사를 풀어줄 열쇠인 목판들을 장작으로 때고 있었다. 노예상들이 섬의 지도자들을 살해하거나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이 목판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에이로 신부가 목판의 중요성을 간파했을 때는 겨우 21매의 목판만이 남아 있었다. 언어학자들은 여러 해 동안 이 목판과 씨름했다. 처음에는 목판의 기호가 아무 의미도 없는 도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 기호들을 파나마의 어느 인디언 부족들이 사용하는 그림문자와 관련짓기도 했고 이집트의 상형문자, 인도의 인더스 계곡에서 발견된 4000년 전의 문자와 연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해답은 찾지 못했다.
상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1953년 독일의 토마스 바르텔이 목판 해석에 도전했다. 그는 이 목판에서 약 120개의 기호가 그 자체로서 완결되는 단어 또는 사상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독을 하려면 어떤 단서가 있어야만 했다. 그는 지난 세기에 이스터섬을 탐험한 프랑스의 테파노 조상 주교의 이야기에서 단서를 찾았다. 조상 주교는 젊은 시절 타히티섬에 갔다가 그곳에서 전문적 영창자(롱고롱고 부르는 사람) 훈련을 받았다는 이스터섬 출신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바르텔은 조상이 준 영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상 주교가 적은 몇 줄의 폴리네시아 문자가 나의 로제타석이 되었다. ······ 처음 몇 문장의 의미가 풀리기 시작했던 그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1960년부터 바르텔은 목판의 해석을 발표했다. 목판의 내용은 대부분 신에 대한 기도, 성직자의 말씀, 섬의 신화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는 글의 줄(行)이 마치 밭고랑이 만들어질 때처럼 연결되며 줄이 바뀔 때마다 거꾸로 새겨져 있어 매번 판을 돌려 읽어야 하고 이런 서법(書法)은 수마트라에서 마르케자스제도에 이르는 남태평양의 다른 섬들에서도 발견된다고 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번역이 신뢰성을 얻기에는 목판의 숫자가 너무 적다고 격하했다. 하지만 바르텔은 그 문자가 폴리네시아인 방랑자들에 의해 개발되었음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했다.
과거 이스터섬에선 제비갈매기가 섬에 도착할 무렵 높은 벼랑에서 뛰어내려 모토누이섬까지 헤엄을 쳐서 새의 알을 가져오는 의식을 치렀다. 맨 먼저 알을 가져온 사람은 새인간이란 칭호를 받고 바위에 새겨졌고 1년 동안 섬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이 의식은 1870년까지 지속되었는데 86명의 새인간 기록이 바위에 남아 있다.
한편 이스터섬에는 섬의 기원과 모아이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이스터섬에 정착한 최초의 이주민은 ‘호트 마트아’를 추장으로 한 단이족(귀가 작은 민족)이다. 추장 호트 마트아는 마르케이자스제도의 히바섬에 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벌어진 장이족(귀가 큰 민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마트아는 이스터섬으로 옮겨와 호트 마트아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장이족이 다시 섬을 침략해서 섬 전체를 지배했다. 장이족은 단이족이 반란을 일으킬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대규모 건설 작업을 감행했다. 그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모아이 조각이다. 장이족은 농사를 지을 시간을 제외하고는 단이족을 모아이를 만드는 노동에만 전념하게 했다. 그런데 장이족은 사람을 잡아먹는 습관이 있어 단이족의 아이들을 잡아먹었다.
오롱고 마을은 새인간을 뽑는 의식을 위한 임시 거주지였다.
참다못한 단이족은 결국 전쟁을 일으켰고 승리를 거두었다. 장이족은 이스터섬의 동쪽에 있는 포이케반도로 도망한 뒤 커다란 구덩이를 팠다. 단이족을 유인해 그 속에 몰아넣은 다음 불태워 죽이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단이족의 공격에 밀린 장이족은 자신이 판 불구덩이 속에서 죽어야만 했다. 권력을 되찾은 단이족은 장이족이 자행한 탄압의 상징이었던 모아이를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제단의 길이가 50미터에 이르는 아후에는 거대한 석상이 있다. 과거 이스터섬에 살던 사람들이 조상의 영혼을 모시던 장소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죽으면 아후에 뼈를 묻었다.
이 전설을 바탕으로 포이케 지역을 조사했는데 깊이 4미터, 길이 12미터의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채취한 재를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조사해보니 단이족과 장이족 간의 전쟁은 1680년 전후에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전쟁으로 인한 화재 때문에 이스터섬의 울창했던 숲이 황폐해졌다는 설도 있다.
섬 곳곳에 모아이가 있지만 바다 가까운 곳에 특히 많다. 쓰러져 있는 모아이들은 근래에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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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주립박물관의 데이비드 스티드먼 박사는 특이한 방법으로 이스터섬을 연구했다. 그는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에서 발견된 화석더미를 분석하여 원주민들이 어떤 동물을 먹었는지를 추적했다. 이스터섬의 화석 중 물고기 뼈의 비율은 전체의 4분의 1도 안 됐지만 돌고래 뼈의 비율은 3분의 1이었다. 이는 원주민들이 먼 바다로 나가 돌고래를 포획했다는 걸 의미한다.
한편 이스터섬에서 발견된 올빼미 · 왜가리 · 앵무새 · 뜸부기 등의 조류와 들쥐 화석을 분석한 결과 약 1600년 전 이스터섬은 지상낙원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곧바로 파국을 맞게 됐을 것이라고 한다. 울창하던 숲이 800년경부터 급속히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섬 주민들이 카누를 만들고 석상을 운반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원주민과 함께 섬에 상륙한 들쥐 때문이라고 한다. 이스터섬에는 들쥐의 천적이 없었기 때문에 들쥐의 수는 급속히 불어났고 불어난 들쥐들이 나무의 씨와 싹을 모두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폴리네시아인들은 현대적인 항해 도구 없이도 오랜 경험을 통해 뛰어난 항해술을 갖고 있었고 배 제작 기술도 뛰어났음이 밝혀졌다. 심지어 수천 킬로미터를 항해해 남미 사람들과 고구마 등을 무역한 것으로도 보인다.
1500년경에는 숲이 더욱 파괴되었고 생존환경도 더욱 악화되었다. 카누를 만들 수도 없었고 숲에 살던 조류들도 사라졌다. 새로운 카누를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섬사람들의 주요 식량이었던 돌고래의 사냥도 불가능해졌다. 당시의 돌고래 화석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이후 숲이 사라지고 토양마저 황폐해지자 주민들은 인육을 먹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종족 간 전쟁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스터섬의 전설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스터섬 주민들의 언어에는 아직 식인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다. 섬사람들은 아주 화 날 때 ‘네 어머니의 살코기가 내 이빨 사이에 끼여 있다’라고 말한다.
이스터섬은 1990년대에 큰 전기를 맞았다. 케빈 코스트너가 제작한 영화 〈라파누이〉 덕분이다. 영화의 수익금 상당액이 섬으로 돌아갔다. 한 해에 한 번씩 오가던 수송선은 40여 일에 한 번씩 섬을 찾아오며 매주 여덟 편의 비행기가 오간다. 교통편이 늘어남에 따라 연간 관광객 수도 1992년 4700명에서 최근 5만 2000명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자연사박물관에는 이스터섬의 유적들이 실물로 전시되어 있다.
이스터섬 곳곳에는 이처럼 채 완성되지 않은 모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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