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rus
키프로스 Cyprus ,
<터> Kibris ,
<그> Κυπριακή Δημοκρατία키프로스공화국, Republic of Cyprus
어원
키프로스는 헤나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퀴프로스'에서 비롯되었다는 말과 지중해에서 자라는 사이프러스(키프로스) 나무를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다른 학설로는 구리를 뜻하는 키프로스어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조지 도신 박사는 이 섬에 구리 광석이 풍부하여 구리 혹은 청동을 뜻하는 수메르어 낱말에서 키프로스라는 말이 유래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원
키프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아도니스가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풍요로운 남부해안 지대이며 기원전 1만 년경에 수렵과 채집의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기원전 8200년경에는 마을 공동체가 생긴 것으로도 밝혀졌다.
첫 인간의 등장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 육지에서 사람들이 건너오기 시작했으며, 정착지의 이동이 몇차례 전개 되었다.
기원전 3800년경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대부분의 취락지가 파괴되었으며, 기원전 2400년경에는 아나톨리아인들이 이 섬에 오면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대
미케네(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600년경에 키프로스에 처음으로 들어와 섬 전역에 흩어져 살았다.
이 후 다른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1100년경에 들어왔고, 이 때부터 이 섬은 그리스화 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중동 지역에서 이주해온 페니키아인들이 식민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키프로스는 이집트의 지배를 잠시 받다가 기원전 709년에 아시리아에 정복되었으며, 기원전 545년에는 페르시아 영토가 되었다. 이후 50년 뒤 한 차례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이 반란은 아케메네스 황제에 대한 이오니아 도시들의 집단 반란이었다.
나중에 이 섬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이집트의 지배를 차례로 받게 된다.
기원전 58년에는 로마에 병합되었으며, 100년 후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이 영향으로 키프로스 주민과 유대인들이 동맹하여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고 수천 명의 유대인이 죽고 나머지 유대인은 이 섬에서 추방당했다.
중세
395년에 키프로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다가 649년에 이슬람으로 넘어갔다.
1191년, 제3차 십자군 전쟁 당시 리처드 1세가 이곳을 점령하여 보급기지로 이용하였다.
이 후 십자군이 철수하면서 이 섬의 지배권이 성전 기사단에게 넘어갔고 예루살렘의 왕위를 잃은 프랑스의 '기'가 이 섬을 매입하여 왕위에 올랐다.
1489년, 이 섬은 코르나로 여왕이 퇴위하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여왕은 자크 2세의 미망인으로, 키프로스 왕국의 마지막 군주였다.
베네치아는 키프로스를 상업 중개지로 이용하였으며, 수도 니코시아을 요새화하였다.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키프로스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1539년 오스만 제국은 키프로스의 주요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여 악명을 떨쳤고, 베네치아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도시 곳곳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70년 오스만 제국의 6만 대군이 키프로스를 공격하였다.
이때 주민들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오스만의 군대에게 무릅을 꿇었다.
이후 저항했던 주민 2만명이 처형되었으며 모든 교회와 공공 건물, 궁궐이 약탈을 당했다.
오스만 제국은 키프로스 섬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정치적 자치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무거운 세금 때문에 1572년부터 약 100년간 28번의 반란이 일어나 술탄을 괴롭혔다.
1872년 이 섬의 인구는 144,000명으로 늘어났는데, 그 가운데 무슬림은 4만 4천명이었고, 기독교인은 10만명이었다. 비율은 정확히 3대 7이다.
대영 제국의 지배
1878년, 터키와 러시아의 전쟁 이후 이 섬의 행정권은 대영 제국에 양도되었다.
대영제국에 있어 키프로스는 자국 식민지 통로에 자리잡은 군사 요충지나 다름없었다.
이 섬은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오스만 제국이 독일편에 서자 영국은 키프로스를 병합하였다.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신생 터키 공화국은 키프로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1925년 키프로스는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1950년 이 섬의 남부 출신의 기독교도들이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그리스와 통합하는데 찬성했다.
그러나 이 선거는 북부의 터키계 무슬림이 거부했기 때문에 효력이 의문시 되었고, 영국은 헌법을 제정하여 제한적인 자치권을 제안하였다가 철회하였다.
그러자 1955년 남부에서 전사 민족단이 창설되어 무장 투쟁으로 그리스와 통합하고자 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에 맞선 북부의 터키계 주민들도 터키 저항단을 조직하여 국가의 분할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이 섬이 비극으로 가는 시작이었다.
독립
1960년 8월, 키프로스는 영국, 그리스, 터키가 맺은 협정에 의해 독립국으로 선포되었다.
영국은 두 곳의 군사 지역만 보유하고, 정부 공직과 공무를 두 민족에게 할당하였다.
북부 터키계에 정치적 거부권을 부여하며, 의회와 행정부에 30% 비중을 보장하였고 영국, 그리스, 터키 등 세 국가의 모국 보장권을 부여하였다.
1963년 남북이 내전으로 치달았는데, 그 배후엔 그리스와 터키가 있었다.
이후 그리스계 지도자이자 대주교인 마카리오스 3세가 긴장 완화를 위해 개헌을 요구하였다.
이때 국제연합이 개입하여 급박한 시점에 국제연합군을 파견하였다.
그리스의 음모
1970년대 초에 집권한 그리스 군사정권은 마카리오스 3세의 정책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섬의 병합을 위해 반대파의 관심을 돌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1974년, 군사정권의 공작에 의해 키프로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리스 군사정권은 강제로 니코스 삼손을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그는 민족주의자이긴 했으나, 그리스의 뜻대로 병합을 선언하지 않았으며,키프로스가 계속 독립 상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섬의 평화를 위해 그리스의 기대를 외면했다.
터키의 침공
그러나 터키 정부는 이에 불안을 느끼고 영국의 개입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실현되지 않자, 터키는 헌정질서를 복원한다는 명분으로 키프로스를 침공하였다.
그리스는 새로운 준군사 단체를 조직하여 침략자에게 저항할 것을 발표하였으나, 이는 역효과를 내어 터키가 점령한 지역의 그리스인이 대거 추방되었다.
수적으로 불리한 그리스 군대는 터키의 진격에 저항하지 못하였다.
국제 사회는 휴전을 요구하였으며, 터키는 섬 북부의 37%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써 북쪽에 있던 17만명의 그리스계와 남쪽에 있던 5만명의 터키계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결국, 이 전쟁으로 키프로스의 남북 경계선이 확실해져버렸다.
1983년 북부 지역이 독립을 선언하고 터키가 승인했으나 국제 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분쟁으로 인해 그리스계 1,534명과 터키계 502명이 행방불명 되었다.
국제사회는 여전히 남부에 정통성을 부여한 섬 전체를 하나의 국가로 간주하였다.
분단
1974년에 벌어진 터키 침공은 키프로스 정치의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현재 키프로스 북부엔 국제협약을 위반하고 약 10만명의 터키인들이 이주해 있다.
터키 군대가 북부 영토를 장악한 이후 남부 정부는 북부의 모든 통관항을 봉쇄한다고 발표하였다.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남쪽의 그리스계는 2004년 유럽연합의 회원국이 되었다.
키프로스는 사실상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키프로스 공화국(남부)은 입헌 민주주의 국가로 경제적 발전을 이루며 번영을 누리고 있다.
또한 여러 국제 기구의 회원국이며, 키프로스 섬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받고 있다.
반면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는 북키프로스는 터키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2004년 UN 사무총장이었던 코피아난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재안을 내 놓았다.
양측에 남북의 연방제와 평화안을 담은 '아난 계획'을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찬성한 터키계와는 달리, 그리스계는 이를 거부하였다.
한 때 이 섬은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분쟁으로 피신한 레바논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2008년에는 양측의 분위기가 완화되어 32년간 남북을 가로 막았던 장벽이 철거되었다.
이 장벽은 키프로스 분단의 강력한 상징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이 두 지역은 30년간의 분쟁으로 그 골을 메우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군사적인 우세를 믿고 분열을 자처했던 북키프로스는 지금 공존을 원하고 있으나,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는 남키프로스는 오히려 강경한 입장으로 돌변했다.
온건했던 남부와 강경했던 북부, 이제는 서로의 입장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출처]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10339
키프로스 Cyprus의 분단
<터> Kibris ,
<그> Κυπριακή Δημοκρατία키프로스공화국, Republic of Cyprus
인구 : 1,268,467명 (2024년 추계)
수도 : 니코시아
면적 : 9,251.0㎢
민족 구성 : 그리스인(77%), 터키인(18%) , 언어 : 그리스어, 터키어
종교 : 그리스정교(78%), 이슬람교(18%)
북위 35°45′∼34°30′(남북으로 약 97km 뻗어 있음), 동경 32°15′∼34°30′(동서로 약 225km 뻗어 있음) 사이에 놓인 키프로스 섬은 지중해에서 3번째로 큰 섬으로 터키 남쪽 64km, 시리아 서쪽 97km, 이집트 나일 강 삼각주의 북쪽 402km 지점에 있다. 해안선 길이는 782km이다.
키프로스가 분단된 것은 터키군이 북부를 점령한 1974년이다.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는 했지만 기독교(정교회) 그리스계와 이슬람 터키계의 오랜 내전이 빚은 결과다.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은 그리스계 남부의 정식 국가명칭은 키프로스공화국이다. 2004년 유럽연합(EU)에, 2008년 유로존(유로화 사용국)에 가입했다.
키프로스 내 영국령 군사기지,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
지중해 동쪽 끝, 아름다운 휴양지 키프로스(Cyprus)는 인구 약 80만명이 거주하는 작은 섬나라다. 바다 건너 북쪽으로는 터키, 동쪽은 시리아와 레바논, 남쪽은 이집트, 서쪽은 그리스와 접하고 있다. 키프로스는 1960년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했지만 지금도 그 흔적은 남아 있다. 키프로스 내 영국의 주권기지영역(Sovereign Base AreaㆍSBA),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다.
아크로티리는 키프로스 남서쪽 끝에, 데켈리아는 남동쪽에 있는 라르나카만에 면해 있다. 두 지역은 영국군의 중간 집결지이자 부대 훈련소로 사용되며, 영국군 3,000여명이 주둔하고 있다. 주둔부대의 사령관이 두 지역을 통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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