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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 아나운서 30년, 예절교육 40년 인생길

류지미 2024. 3. 14. 16:01

강영숙

전 KBS아나운서 

(현 예지원 원장) 

 

출생1932년

소속예지원 원장

학력연세대학교경영대학원 수료

 

 

강영숙 아나운서 30년, 예절교육 40년 인생길 / 예지원장

이장춘 2008. 7. 5. 03:42
 

강영숙 아나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이크를 잡은 지도 벌써 3년째로 접어드는  서울 중앙방송국의 꾀꼬리

--강영숙 아나운서--

꼬리치마를 입을 자격(?)을 당당히 획득한 후로 처음 맞이하는 새해에

양단으로 아래 위를 쭉 뽑고 인사하는 모습은

마치 꾀꼬리가 꽃밭에 앉은 것처럼 황홀한 그것이었다.

 

전임프로 “꾀돌이 문답”시간에 어린이와의 대화에서 들려주는 간지러울 정도의 따스하고 달콤함과,

대북방송이나 뉴스해설에서 들려주는 가슴이 서늘해 질 정도의 차고 날카로움은

그녀가 함께 지닌 아나운서의 기교이기 전에 날 때부터 가진 성격인 것 같기도 하다.

 

더욱이 머리의 회전율도 남달리 빨라서

약간의 “미스”도 재 빨리 카버 할 수 있는 기지를 가진 그녀에게는

재와 색을 겸비한 규수라는 이외의 다른 형용사를 부칠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아나운서 강영숙 그때 그얘기와 예절교육 / 예지원장

 

 

위 글이 1958년 1월호 방송지에 실린지 54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27살의 젊은시절!

그 아름답던 목소리를 방송 전파에 실려보내면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선망의 대상이었던 강영숙아나운서는 

아나운서가 결혼을 하면 은퇴를 하던 시절이었지만 강 아나운서는 예외였습니다.

 

1957년 방송의 최고 책임자 오재경공보실장 (장관이라고 불렀음)의 주선으로

같은 방송국 한영섭기자와 결혼을 하고 3형제를 기르면서도 1954년에 시작된 아나운서  생활은

1970년대 말까지 KBS와 MBC에서 여성 아나운서로서는 최초로

MBC아나운서 실장과 방송국 국장을 역임했으며 1964년 동경 올림픽 중계방송석에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여류 방송인 클럽회장을 맡았던 강영숙 아나운서는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절실한 뜻을 받들어

1974년 예지원을 창설한 이래 40년을 이어 오면서 35만의 회원을 대상으로 예절교육을 실시해서

이나라 예절의 근본을 확립했습니다.  82세가 된 그때의 강영숙 아나운서는 지금도  여러 방면에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계십니다.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숙명여자대학교 국어 국문학과를 다니던중

6.25전쟁이 일어나고 부산 피난길에서도  방송국에서 방송을 했지만 공개 채용시험이 없어 

정식 아나운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던 터에 

KBS가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고 자리가 잡히면서 1954년, 아나운서 공개 모집이 있었습니다. 

 

임택근,강찬선님 등 부산에서 아나운서를 공모한 후 오랜만에 서울에서 뽑는 아나운서 시험이라 

경쟁이 치열했지만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니고 태어난 강영숙님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서

 이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좌로부터 ,,, 강영숙, 한사람건너 장금자, 윤영중, 김인숙,(정동방송국)

 

 

학교선생님을 직업순위 상위로 생각하던 시절!  1949년, 윤영중(우측 두번째)은 교사의 꿈을 안고  

서울사범학교(교육대학 전신)를  다녔지만  뜻밖에  맞은  6.25 한국전쟁으로 아나운서가 되었니다. 

그때는 강영숙, 김인숙, 장금자,그리고  윤영중 아나운서가 KBS 서울 중앙방송국의 여성 아나운서의 모두였습니다. 

 

 TV방송국도  없고  민영방송도 없던   1950년대!

새로운 소식을 접할 미디어가 별로 없고 마땅히 즐길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KBS 라디오 방송은 늘 곁에 있는 친구였고 마음의 위안을 받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여성 아나운서가 없던 시절이라  그 활동영억은 넓었습니다.

그 시절에 새로 편성된  누가 누가 잘하나. 무엇일까요 등 어린이 공개방송 등

중요한  프로그램이 강영숙 아나운서의 몫이었습니다. 

 

 중앙방송국에서  여성 아나운서의 역할이 차츰 늘어나면서 

청주방송국의 김인숙 아나운서, 이리방송국의 윤영중 아나운서, 부산방송국의 장금자 아나운서 등이 

중앙방송국으로  옮겨왔고 

강영숙 아나운서는 국내방송은 물론 대북방송이나 뉴스, 시사평론 등 다 방면에 걸쳐 영역을 넓혀 갔습니다. 

 

 

*위 아래 사진은 1950년 중반 네사람의 여성 아나운서가  근무 할때의 사진으로 

*위는 정동방송국 현관에서 왼쪽부터 강영숙, KY(성명미상), 장금자, 윤영중, 김인숙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이고

*아래는 노정팔  방송과장님과 왼쪽 두번째부터 김인숙, 장금자, 강영숙, 윤영중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그때는 특히 여자 아나운서의 숫자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늘 라디오나 벽에 걸린 스피카를 들으면서 생활 하던 때라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일상적으로 들려욌고 따라서 아나운서는 국민의 친절한벗이었습니다.

다정다감한 강영숙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한층 더친근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인천 창녕 국민학교 현지 공개방송

 

뉴스나 노래자랑, 음악방송, 주부시간, 대북방송 등 각 프로그램마다

그 성격과 분위기에 맞출 수 있는 재능을 발휘해서 여러 프로그램에서 님의 목소리는 들려왔습니다.

강영숙 아나운서에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한계는 없었습니다. 

 

아나운서 30년을 하는 동안 그 수많은 프로그램을 해 왔지만

그 중에서  제일 마음 닿는 프로그램을 꼽아 보시라고 했더니 어린이 공개방송 "누가 누가 잘하나" 라고 하셨습니다. 

 

1954년에 편성된 어린이 공개방송은

강영숙 아나운서와 함께 탄생했다고  할 만큼 강영숙 아나운서로서는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지금도 TV에서 방송되는 어린이 공개 방송 "누가 누가 잘하나" 프로그램에는 "Since 1954" 라고 큰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1954년부터 이어왔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때 강영숙 아나운서가 1954년 입사하면서 첫 프로그램 사회를 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때는 어른들도 어린이 프로그램을 많이 들을 때였습니다.

 

 

 

 

강영숙 아나운서가 mbc로 옮긴것은 mbc개국 무렵이었습니다.

mbc에서도 방송국 일에, 가정 일에 눈 코 뜰사이 없이 바쁜생활을 했지만

 1960년대 중반 KBS TV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 르로그램이  새로 편성되면서

그 프로그램을 좀 더 잘 제작 해 보려는 송병현 담당 PD의 오청에 선뜻 응해서

그 프로그램을 상당기간 사회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어린이 공개방송에 애정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누가 누가 잘하나 최초의 사회 아나운서 강영숙님이 누가 누가 잘하나 참여 어린이들과 어머니와 함께 한 사진입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여자 아나운서가 평생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자 아나운서는 결혼을 하면 현업에서 물러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있을 때

강영숙을 방송에서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오재경 장관은  강영숙님에게 결혼을 주선했습니다. 

결혼상대는 경무대를 비롯해서 정부부처를  출입하면서 KBS 보도방송의 중심적 역할를 하던 내신부장 한영섭기였습니다.

 

결혼한 뒤 아이 둘 가질 때까지는 방송국에 근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획기적인 일로 둘은 결혼 후에도 같이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3. 4년 지나면서 아이들도 탄생하고 가정일도 바빠 더 이상 아나운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님은 

방송국을  떠나기로 하고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KBS에서 스스로 사직서를 냈다고 뜻대로 가정으로 돌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 발족한 MBC가 그 절호의 기회를 잡아 강영숙님을 MBC로 끌어 들였기 때문입니다.

강영숙 아나운서는 그때 아나운서를 하라는 타고난 운명으로 생각하고 MBC로 향했다고하셨습니다.

친정 KBS에서 같이 활동했던 동기 아나운서이자MBC 아나운서 실장이 된 최계환 아나운서를 비롯해서

여러 동료 아나운서를 다시 만났습니다.

 

1964년에는 선배 임택근 아나운서가 방송책임자로 와서 함께 일하게 되었고 후배최세훈 아나운서도 왔습니다.

MBC 개국 아나운서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서 대한민국 여성으로는처음으로 1964년 도오꾜오 올림픽의 중게방송석에서 마이크를 들었고

최초로 여성 아나운서 실장을 했습니다. 아나운서실장 재직중이던 1973년 국장급 해설위원이 되었습니다.

 

 

해설위원직은 다른 일을 할수도 있는 직책이어서  예지원이 이때 준비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나육영수여사가 나라의 근간을 튼튼히 하려면 예절 바른 나라가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지도자로 부터 전국민이 예의를 지킬 수있도로 해야 된다고 생각 했습니다.

강영숙님은 청와대와 얘기를 나누면서 예지원을 창설했습니다.

 

당시의 김종필 국무총리 부인 박영옥여사를비롯해서 장, 차관 부인들, 고급 공무원, 국회의원,군 장성부인, 

지도층 인사들 부인들이 모두 이 예지원을 다녀갔고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다녀 갔습니다, 

 

1964년도오꾜오 올림픽때 일본 아나운서로 강영숙님과 함께 중계방송을한 고노 기요코 (小野 淸子)여사는 

뒷날 중의원 의원이 되어그의 남편과 함께 예지원에서 한국식 예절 교육을받고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지원을 거쳐간 사람은 40년간 35만명에 달하고 또 그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얘절 교육을실시하는 경우가 많아서

예지원의 예절교육은 전 국민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에지원을 다녀 가신 분 외에도, 방송을 통해서,현장교육과 실습을 통해서 실시한 예절 교육은

알게, 모르게 전국민의 예절에 관한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전통문화의우수성을 살려 자긍심을 갖고 그것을 생활화시키면서

현대인들에게 행동규범과 가치기준을 제시하고,실천 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방송국 일이 끝나면 가정일만 하면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강영숙님은 80을 넘긴  지금까지 공인으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요즈음의  여자 아나운서들의 의상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기회 될때마다 주의를 주지만 이미 변해 버린 세상은 말이 잘 먹히지 않는다고 아쉬워 하십니다. 
예지원일 외에도 원로 방송인들의 모임인 방우회 (한국 방송인동우회) 활동을 비롯해서 활동영역은 넓어 여기서 일일이 열거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신 일들이 많은 것처럼 수상 경력도 많아 1968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을 비롯해서, 문교부 장관상, 국무총리상, 대통령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으셨습니다.
 
 저서로는 1959년 아나운서 초년기에  발행된 아나운서의 벗을 비롯해서, 정감있는 여성,  교양인의 해외여행 등이 있습니다.

 

아나운서 30년, 예지원 40년. 세아들을 낳고 기르며 산 지난날의 세월은 인생을 다 바쳐 살아온 세월이었고, 어렵고 힘들었지만 보람있는 삶을 이어온 인생 역정이었음을 강조 하십니다. 가정에서 아이 기르고 집안 돌보는것이 여성 본연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천하려 했어도 사정은 그렇지를 못해서 밤, 낮 쉴사이 없이 살아온 인생길이었습니다.

 

 

강영숙 아나운서 그때 그시절 그 얼굴 그 목소리 예지원 원장

https://www.youtube.com/watch?v=2kUpP5nTh9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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