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석굴암 백년의 빛

류지미 2024. 3. 29. 04:52

김윤길  09.11.25 22:00

 

1938년 석굴 전체가 해체된 직후의 모습입니다

 

내부 환경과는 달리 외부는 말끔히 단장되어 관광객들의 필수 여행코스가 되었습니다.

 

 

석굴암 관련 책을 만들었습니다.
<석굴암 백년의 빛>이라는 제목입니다.


책에 수록된 사진 중에
1909년 조선통감부 소네 부통감 일행이 석굴암을 방문하여 촬영한 사진(최초의 석굴암 사진으로 알려짐)과
세키노 타다시라는 동경제국대 교수가 촬영한 사진 등 희귀사진 2컷을 올립니다.


이 사진으로 보니 석굴암은 전실 등 상당부분이 붕괴된 모습입니다.
19세기말에 경주지역에 일어난 지진의 영향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만 ......

 

 

 

 

 

 

석굴암 백년의 빛

 

 

석굴암은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인 751년에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으로 만든 인공 사원 안에는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보살상과 십대 제자, 사천왕과 인왕상, 팔부신중 등이 배치되었습니다. 세계 어디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아름다움과 독창성을 지닌 석굴암은 1995년에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우리 문화의 자랑거리를 넘어 세계 인류가 함께 지켜가야 할 문화유산이 된 석굴암은, 그러나 지난 백 년동안 수난과 영광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그 백년동안 석굴암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 지난했던 시간을 되짚어볼 수 있는 전시회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석굴암 백년의 빛’ 이란 제목의 이번 특별전은 석굴암을 단일 주제로 한 전시회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전시회로 지난 100년간의 석굴암 사진자료를 집대성하였으며, 석굴암 관련 유물들도 함께 전시되고 있습니다. 사진자료를 통해 석굴암의 역사를 짚어보고 앞으로의 연구와 보존에 대한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의도 된 이번 전시회는 조계종과 동국대학교 공동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지난 30여년간 석굴암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를 쓴  성낙주(석굴암미학연구소장)선생님의 자료가 바탕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이 된, 우리 문화 최고의 자랑거리인 석굴암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지금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909년 4월말에 석굴암을 찾은 조선총감부의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석굴암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돌과 기와 더미가 쏟아져 폐허가 되다시피한 석굴암에서 검은 제복을 입고 칼을 찬 일본인들이 본존불의 무릎과 돌위에 함부러 앉아 있습니다. 마치 조선을 짓밟고 있는 일본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석굴암을 다녀간 후 석굴암 감실 앞쪽에 봉안되어 있던 보살상 2구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현재까지도 2구의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1910년(추정) 어느 화창한 봄날에 석굴암을 찾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앞쪽에 있는 세 명의 민간인은 서 있거나 돌무더기에 앉아 있는데 반해, 사진 중앙에 앉은 제복차림의 관헌은 본존불 대좌에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걸터 앉아 있습니다. 일본인에게 석굴암은 한낱 점령지의 전리품일 뿐이었습니다.

 

 

석굴암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총독부 관리나 일본에서 건너온 관광객, 그리고 수행여행단이 거쳐가는 필수코스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올 때 손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낙서를 남겼습니다. 본존불 앞 쌍석주에 빼곡하게 낙서가 적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 곳이 위대한 불교성지라거나 문화유산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끄러운 행위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으신가요?   

 

 

석굴암이 인기를 끌자 동양헌 사진관에서는 석굴암에 관한 설명문과 약도를 곁들인 사진첩을 발간하였습니다. 조각상을 합하여 모두 36매의 사진인데 1912년 늦가을에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석굴암석불위치약도'를 잘 봐 주시기 바랍니다. 앞 쪽 좌우에(1,2,3과 25,26,27번) 모두 여섯 구의 팔부신중만이 적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은 모두 8구인데 아수라상과 금시조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두구의 상은 나중에 발견됩니다. 동양헌 사진첩을 비롯하여 석굴암 관련 사진은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됩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카테가 1912년 11월 8일에 총독부를 방문한 후 보수공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 1913년 10월부터 1915년 8월까지 1차 수리공사가 시작됩니다. 2차공사는 1917년에, 3차공사는 1920년-23년에 진행됩니다. 석굴암이 창건된 후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지만 석실법당 전체를 해체하는 공사는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1938년 석굴 전체가 해체된 직후의 모습입니다.

 

 

석실법당 전체를 해체작업할 때 본존불과 천개석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겹의 비계를 설치하였습니다. 본존불과 천개석은 나중에 재조립할 때 중심을 잡기위해서라고 합니다.

 

 

전실의 팔부중 가운데 빠져 있던 금시조상과 아수라상이 공사 도중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는 이미 석굴암 재조립을 위한 측량 도면이 완성된 상태라서 양쪽에 3구씩 세워놓기로 한 계획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옹색하게 다음과 같이 배치하였습니다. 

 

 

세 구의 신중상옆에 새로 발견한 아수라상과 금시조상이 꺾인 채 배열되었습니다. 이 배치는 196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복원공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그대로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석굴암에 대한 보수공사가 끝나고 기차터널처럼 변한 석굴암 입구가 만들어졌습니다. 원래 주실 앞에 세워져 있던 전각을 만들지 않아 전실과 주실이 모두 습기와 곰팡이로 덮이게 되었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주실 위에 잡석과 기와가 덮여 있던 원래 구조를 버리고 시멘트를 발라서 석실내부가 누수로 인해 청태와 오염물이 끼어 석실환경이 급속도로 악화된 것입니다. 급기야 일제는 1927년에 석실내부의 오염물을 제거하기 위해 증기보일러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석굴암 보존에 더욱 큰 해를 끼치는 장치였습니다.

 

 

내부 환경과는 달리 외부는 말끔히 단장되어 관광객들의 필수 여행코스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석굴암을 담은 사진엽서가무수히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그 엽서를 보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석굴암을 찾았습니다.

때론 수학여행으로, 때론 단체관람으로, 그리고 때로는 몇몇 회원들의 기념관광으로 석굴암은 몸살을 앓았습니다.

 

 

석굴암은 바다와 인접한 해발 565미터의 산중에 위치해 있습니다. 눈비와 안개가 잦고 바람이 거세고 겨울에는 평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온도가 내려갑니다.  1962년 기상자료에 의하면, 연중 123일 안개가 끼고, 134일 비가 내리고, 40일 눈이 퍼붓고 110일 결빙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염분이 섞인 해풍, 벌레와 짐승 등의 침입도 석굴암 훼손의 큰 원인입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석굴암 조각들이 천 년의 세월을 잘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석조지붕 상부에 기와층과 토석층이 번갈아 덮여 있고 맨 위에 기와층이 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입구에 보호전각이 있어 비바람과 짐승으로부터 석굴을 보호했기때문입니다.

 

이런 구조적인 이해가 없이 진행된 보수공사로 인해 비가 내리면 천정석이나 벽면을 타고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일제가 시멘트 봉분을 만든 후 50년동안 파괴된 속도는 통일신라에서 일제시대까지의 1.200년동안 훼손된 속도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빗물이 흘러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11면관세음보살상의 모습의 1930년대 사진입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석굴암을 돌볼 겨를이 없이 방치한 가운데 6.25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사진은 본존불의 어깨와 가슴에 새똥이 말라붙어 있고 온 몸에 곰팡이와 이끼로 심하게 오염된 사진입니다. 1951년 김한용이 찍은 사진입니다. 

 

 

 1960년대 들어서 문화재관리국의 주도하에 복원공사가 추진되었습니다. 시멘트 두겁을 철거하고자 했으나 견고한 두껍을 철거하는 충격으로 내부 조각상에 피해가 예견되어 결국 원래의 두겁에서 1미터 이상의 공간을 두고 새로 시멘트 두겁을 시공하였습니다. 결국 2중의 시멘트 구겁을 시공하게 된 것입니다.

 

 

일제가 만든 기차터널같은 진입로의 옹벽도 제거되었습니다. 옹벽이 제거되자 전실의 공간이 넓어져 구부러졌던 평면도가 반듯하게 펴졌습니다.

 

 

 

그 결과 구부러진 채 배열되어 인왕상과 마주보고 있던 아수라상이 반듯하게 배열되었고, 금시조상도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십일면 관세음보살의 머리 위의 화신불 중 잃어버렸던 상을 복원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9면 관세음보살'이라 불렸던 상이 다시 '11면관세음보살'이 되었습니다.

 

 

사천왕 중 북방 다문천왕의 보탑도 되찾았습니다.  .

 

(조정육) 씀.. 계속,,,,

 

 

 

이런 노력과 의지속에서 1997년 석굴암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석굴암에 빠져 석굴암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이 번 전시의 바탕이 되게 했던 석굴암미학연구소장 성낙주 선생님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고결한 책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먼 후손들에게, 혹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석굴암을 온전하게 전해 주는 일이 그것입니다. 석굴암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탯줄을 감고 태어난, 그리하여 가장 한국적인 동시에 고대 동서양의 예술 및 종교의 영적 아우라가 응결된 인류의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조정육)

 

 

『석굴암 백년의 빛』(동국대학교출판부:200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