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 홍씨 死因엔 “성관계로 음부 곪아” 주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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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날 온라인상에서는 김 후보의 또 다른 과거 발언이 재조명되면서 논란이 됐다. 당시 김 후보는 유튜브에서 조선 정조 임금의 부인 원빈이 요절한 이유가 무리한 성관계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그 내용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외에도 김후보는 ‘이화여대생 미군장교 성 상납’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군 위안부 성관계’ 등의 과거 발언이 재조명되면서 사퇴 요구를 받았다. 작년 12월 유튜브 ‘서울의소리’에서는 윤석열 정부를 연산군 시절에 빗대며 ‘스와핑’ 등의 성적 발언을 해 논란이 됐다. 위안안부가족협의회, 일분군대위안부희생자자료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도 김 후보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조선일보
원빈 홍씨, "1년 만에 OO한 이유" (정조의 간택후궁) #옷소매붉은끝동 #정조 #원빈
https://www.youtube.com/watch?v=qpYeAS4Ypew
1. 전무후무한 후궁 책봉
원빈홍씨는 정조의 간택후궁으로, 아버지는 홍낙춘, 어머니는 이유의 딸입니다. 동복오빠는 홍국영이며, 조선 역사상 살아서도 죽어서도 전무후무한 예우를 받은 조선 최초의 ‘무품 빈’ 후궁이었습니다.
1778년 6월, 13세의 어린 나이에 원빈 홍씨가 28살의 정조의 후궁으로 책봉됩니다. 보통 관례와 계례를 15세에 치르므로, 매우 이른 나이였습니다 원빈 홍씨에 대한 예우는 매우 파격적이었는데요, 다른 후궁들과 달리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까지 간택의 모든 절차를 거쳤으며, 가례의 의절과 의장은 대명집례와 당나라와 명나라의 예를 모두 찾아본 다음 시행하였습니다.
원빈 홍씨는 조선 최초의 ‘무품 빈’으로 입궁했고, 빈호에는 으뜸 원(元) 자를 썼습니다. 일개 후궁에 대한 이런 무리한 예우는 자연스레 왕비였던 효의왕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이름에다 '으뜸 원'자를 쓴 뜻이 흉하니라"라고 언급하였는데, 당연히 왕비를 제치고 후궁이 '으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2. 화무십일홍,
1년 만에 요절 하지만 원빈 홍씨는 입궐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1779년 5월, 창덕궁 양심합에서 14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이를 두고 야사에서는 정조와 합궁하고 출혈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하기도 하는데요, 그럴 만도 한 게, 당시 정조의 나이는 28살이었지만 원빈 홍씨는 만 12~13세로 이제 막 초경이 시작된지 얼마 안된 아직 어린 소녀였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후사가 급했다면 충분히 자라 가임기에 들어선 10대 중후반의 후궁을 간택하는 게 맞았습니다.
하지만 홍국영의 무리한 욕심 때문에 미처 나이가 차기도 전에 후궁으로 들어서며 일이 복잡해진 것입니다.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에서는 정조와 원빈이 동침하던 밤에 큰 소동이 벌어진 것을 두고 상궁 두 사람이 "어른이 아이 버선에 억지로 발을 디밀어 넣으면 어떻게 되겠소?"라고 에둘러 표현했으며, 강미강의 로맨스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는 남몰래 마음에 두고 있던 덕임에게 너는 언제 초경을 시작했냐고 물으면서 원빈이 너무 어려서 합궁하기 곤란하다며 남모르는 고충을 토로합니다. 홍국영은 원빈이 초경을 했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말도 합니다.
[조선후궁열전] 홍국영의 누이로 전문후무한 예우를 받았으나 요절한 원빈 홍씨(元嬪 洪氏)
https://www.youtube.com/watch?v=slYvHB1qo0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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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빈 홍씨(元嬪 洪氏)는 정조의 간택 후궁으로 아버지는 홍낙춘이며, 어머니는 이유의 딸이고 동복오빠가 홍국영입니다.
조선 역사상 살아서도 죽어서도 전무후무한 예우를 받은 유일한 후궁인데 가계를 살펴보면,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홍이상이 8대조이고, 정명공주의 남편 영안위 홍주원이 6대조 조상입니다.
따라서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과 연결되어 있으며, 원빈 홍씨와 정조는 12촌이 되며 5촌 당고모는 경주 김씨 김한희의 부인이자 김면주의 어머니였습니다. 김면주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그 오빠 김귀주와 6촌으로 홍국영이 정조 시대를 다루는 사극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유명해서 집안이 이미 왕실과 인연이 있다는 점은 간과되는 편입니다.
정조 2년인 1778년 5월 2일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빈어를 간택하라는 언서를 내리는데 정순왕후는 “불행하게도 중전에게 병이 있어서 후사를 볼 가망이 없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금혼령과 함께 간택이 치러지고, 1778년 6월 13세의 어린 나이에 후궁으로 책봉되는데 보통 관례와 계례를 15세에 치뤘습니다.
원빈 홍씨에 대한 예우는 파격적이었는데 후궁들은 대부분의 절차를 의례적으로 행했지만 홍씨는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까지 간택의 모든 절차를 거쳤습니다. 가례의 의절과 의장은 대명집례와 당나라와 명나라의 예를 모두 찾아본 다음 시행했고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는데 채제공이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다음, 대전에서 중궁전까지 순서대로 인사를 끝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숙창궁의 승언색이 채제공에게 오자 놀라서 “세자를 탄생한 빈궁이 아니면 문안할 수 없는 것이 예법인데, 누가 이를 예로 정하였는가? 유독 하늘에는 두 해가 없는 이치를 모르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원빈이 간택후궁 중에서도 후사를 넓힌다는 뜻으로 들어온 인물이기는 했지만, 엄연히 왕비인 효의왕후가 건재하고 세자를 낳지도 않았는데 원빈에 대한 예우가 선을 넘었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