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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월이 피운 영혼의 詩, 빛을 발하다

류지미 2024. 4. 30. 07:45

[단독] 목월이 피운 영혼의 詩, 빛을 발하다

양민경2024. 4. 20. 05:01
 
박목월 시인 미발표 육필 詩 중
대표 신앙시에 담긴 시심을 읽다
<font color=green>이미지를 크게 보려면 국민일보 홈페이지에서 여기를 클릭하세요</font>그래픽=신민식


‘제마다 수저의/가볍고도 못질한 중량을//진실로 늘 두푼이 부족한/가계를 위하여/…아아/자고 나면/뜰에 살픈 뿌린 싸락눈/하느님의 은총을.’

 

 

‘얼룩 송아지’ ‘나그네’ ‘청노루’ ‘4월의 노래’ 등 서정적 시어로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 시인 박목월(1915∼1978)의 ‘우감·이수’(偶感·二首) 일부다. 궁핍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는 시인의 신앙관이 두드러지는 이 작품은 ‘청록파’로 불리며 한국 현대시사(史)에 큰 족적을 남긴 시인의 미발표 신앙시 중 하나다.

 

 

지난달 12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46년 만에 시인의 미공개 육필 시 166편을 공개한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발간위·회장 우정권 교수)는 “초기 김소월과 김영랑의 시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 목월은 ‘동요와 불안’ 속에서 ‘성서의 세계’로 들어섰다”고 평했다. 초기엔 동심과 자연, 중기엔 어머니 등 가족, 후기엔 기독교 신앙으로 시인의 관심이 옮겨갔다는 분석이다.

이번 미발표 시 중 신앙시로 분류된 시는 총 9편이다. 발간위는 “미발표 유작 가운데는 시인이 신앙의 길에 발을 딛게 된 내적 인과를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 있다”고 전했다. 국민일보는 미발표 신앙시 가운데 수작으로 꼽힌 3편과 어머니를 다룬 미발표 시 1편에서 ‘목월이 만난 하나님’을 소개한다. 이중 신앙시 ‘찬가’와 어머니를 다룬 시 ‘무제’의 내용, ‘우감·이수’ 육필 원고 일부는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겨레의 고난과 함께한 하나님
 

발간위는 동리목월문학관이 소장한 육필 노트 18권에 시인의 장남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자택에서 보관한 육필 노트 62권을 6개월여간 분석했다. 발간위는 이들 시를 ‘신앙’을 비롯해 ‘일상적 생활’ ‘동심’ ‘가족과 어머니, 그리고 사랑’ 등의 7개 주제로 분류했다.
 

이들 중엔 해방과 전쟁, 근대화를 배경으로 한 시도 여럿 발굴됐다. 신앙시로 분류된 ‘찬가’(讚歌)에도 시대의 아픔이 반영돼 있다. ‘오오 오십년/겨레가 굴욕의 구렁텅이에//나라가 수난의 구렁텅이에/빠지는 그전날밤에 눈을 뜨시고//…밤에 홀로 잠이 오지 않는 밤에/홀로 사람을 사모하는 이 고독을. 뼈가 휘어지게 외롭다.’

 

박목월 시인의 장남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18일 경기도 성남의 한 카페에서 부친의 신앙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남=신석현 포토그래퍼


여기서 오십년은 6·25전쟁이 일어난 해를 뜻할 가능성이 크다. 시인의 장남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는 18일 경기도 성남의 한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겨레가 굴욕의 구렁텅이에 빠졌다’는 표현을 볼 때 오십년은 전쟁을 뜻할 것”이라고 해석했다. 발간위 소속 유성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역시 “시에 ‘9월 26일’이라 적힌 부분이 있는데 아마 서울 수복이 있던 1950년 9월 28일 그 어름에 쓴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이어 “수난의 시절 뼈가 휘어지게 외로울 때 함께한 신에게 감사하는 기도가 담긴 시”라고 말했다.

 

궁핍한 삶에 만나를 주는 하나님
최근 공개된 목월의 미발표 신앙시 ‘우감·이수’의 육필 원고 일부.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 제공
 

‘우감·이수’는 ‘신앙적 달관’의 정서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시의 후반부에는 가계를 꾸리기 위해 고된 노동을 하는 시인의 모습이 나온다. ‘진실로 늘 두푼이 부족했던’ 탓에 식솔들 숟가락엔 가벼운 중량의 음식만 담길 따름이다. 이런 가운데 목월은 뜰에 내려앉은 싸락눈을 보며 구약성경 속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만나’를 떠올린다. 만나는 이집트(애굽)에서 나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하나님이 내려준 식량이다. 쉽사리 형편이 나아지지 않음에도 비관치 않고 일용할 양식을 만나로 보며 하나님 은총에 감사하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발간위에서 신앙시를 분석한 전소영 홍익대 국어국문학과 초빙교수는 “밤 사이 서리처럼 내린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이 굶주림을 채운 걸 환기하면서 적은 양식이라도 마음을 비우고 노여움 없이 살고자 다짐하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 고독한 인생의 한 줄기 빛
 

‘세상에서/온전한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다만/당신을 향한/믿음과/참음으로 헤쳐가는 생활의 심연.’ ‘우감·이수’와 함께 미발표 신앙시의 정수를 보여주는 시 ‘빛’의 일부다. 박동규 교수도 이 시를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새벽에 문득 주님의 말씀을 떠올린’ 시인은 세상에 온전한 것이 없으며 모든 건 자연의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한다. 발간위 회장 우정권 단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목월의 시에는 고독하고 좌절하는 시인의 내면세계가 반영된 작품이 적잖다”며 “그럼에도 목월은 믿음과 참음으로 생활의 심연을 헤쳐나가리라 말한다. 이런 좌절과 아픔을 이겨내는 힘은 신앙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목월의 신앙 꽃피운 어머니
 

서울 효동교회 장로였던 목월은 어머니 박인재 여사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담긴 시에 기독교적 상징이 적잖은 이유다. 이번 미발표 시에도 신앙시로 분류되진 않았지만 어머니를 ‘순례자’로 부각한 시가 있다. ‘가족과 어머니, 그리고 사랑’으로 분류된 시 ‘무제’다.
 

‘그 긍정의 환한 세계.//…이제 어머님에게는/모든 것이 가볍다 하신다./목이 거신 향나무 십자가./고되고 무거운 것이 표백된/어머님의 마르고 빛나는 길.’ 전소영 교수는 “십자가의 길을 걷듯 고난의 삶을 걸어온 시인의 어머니는 팔순을 넘어 타인을 돌보는 아가페적 사랑을 성취한 모습으로 그려진다”고 했다. 전 교수는 “원래도 목월의 가슴에 신앙의 씨앗이 잠복해 있었지만 이를 꽃으로 피어나게 한 건 어머니”라고 해설했다.

 

 

시를 위해 기도했던 목월
 

“이번 작품 공개로 박목월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즐거움이 더 커지길 바란다.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간직한 비밀을 공개한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다.”
 

부친의 미발표 작품을 공개한 소회를 묻자 박 교수가 내놓은 답이다. 공식 등단한 1939년부터 별세한 78년까지 목월 선생의 시 세계에서 신앙은 ‘모든 작품을 감싸는 힘’ 그 자체였다.

 

박 교수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처지를 솔직히 고백하며 신앙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목월의 신앙시 핵심”이라며 “아버지의 시 속 하나님은 ‘일월(日月)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하나님을 자연에서 찾고자 했다”는 이유다. 그는 “아버지는 사과 한 알, 꽃 하나 피는 것에서 섭리를 찾으셨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목월은 말년에 시어가 나오지 않으면 기도를 한 뒤 다시 시 짓기에 몰두했다고 한다.

 

유 교수는 “박목월의 하나님은 일상에 지친 소시민을 위로하는 하나님”이라고 봤다. 작품 가운데 “율법적이기보단 함께하는 절대자의 속성이 여럿 발견된다”는 이유다.

 

목월은 별세 전 몇 년간 신앙시 작성에 몰두했다. 윤동주 정지용 김현승의 시와 비견할 양질의 작품을 남겼지만 이에 관한 조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박 교수는 “한국 기독교는 한국 문학의 사상적 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종교적 언어를 쓰지 않더라도 기독교적 사랑을 표현했던 목월의 신앙시 같은 작품이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고 했다. 전 교수도 “미학적 가치를 지닌 한국 기독교시가 많음에도 관련 연구는 미미한 편이다. 시인의 작품도 마찬가지”라며 “이번을 계기로 목월의 신앙시 연구가 활성화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성남=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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