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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돌아온 '소양강 처녀'

류지미 2022. 5. 2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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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3.

고향으로 돌아온 '소양강 처녀'

입력 2006. 07. 13. 17:35 수정 2006. 07. 13. 17:35

 

(춘천=연합뉴스) 이해용 기자 = "이제는 마이크를 놓고 어머니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국민 애창곡 `소양강 처녀' 노랫말의 주인공인 윤기순(55.여)씨가 고향인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 돌아와 안착했다.

윤씨는 지난 4월 말 어머니가 식당을 하고 있는 지암리로 돌아와 준비과정을 거쳐 6월 초부터 닭백숙 등을 요리하는 풍전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노래를 좋아하던 그녀가 노래를 배우기 위해 19살 때 춘천을 떠났으니 36년 만에 객지생활을 접고 홀로 남은 어머니 김국하(71)씨 품으로 돌아온 셈이다.

 

7남매의 맏딸로서 노래를 해서 동생들을 키우고 병환이 있는 아버지, 어머니의 살림살이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오기로 다짐했던 결심을 뒤늦게 이룰 수 있었다.

 

윤씨가 `소양강 처녀'가 된 것은 19살 때 노래를 배우기 위해 서울로 갔다 아버지가 소양강에서 잡은 잉어 등을 맛본 반야월 선생 등 10여 명의 일행이 그녀의 고향인 소양강을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그녀의 아버지가 일행과 함께 솥단지와 장작을 배에 싣고 중도에 들어가 어항으로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끓여 먹고 돌아오는데 잠깐 비가 내린 뒤 인상적인 풍경이 전개돼 소양강 처녀 노랫말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그 뒤 서울과 광주, 대전, 대구와 일본 등에서 무명가수로서 밤무대 생활을 해온 윤씨는 20여 년이 흐른 1990년대 초 반야월 선생이 전국노래자랑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TV로 시청하다 소양강 처녀의 탄생 유래를 뒤늦게 알게 됐다고 한다.

 

윤씨는 `이토록'이라는 음반을 내기도 했으나 정작 `소양강 처녀'는 김태희가 부르면서 유명해졌고 한서경이 리메이크하면서 국민 애창곡으로 자리잡게 됐다.

 

춘천시가 작년 소양강 처녀 발상지인 소양강 변에 처녀상을 세운 것에 대해서는 "나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소양강 처녀의 이미지로 만들었으니 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소양강에 볼 것이 별로 없는 만큼 소양강 처녀상 주변이 공원으로 가꿔져 전국적인 명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옛날 소양강 주변은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갈대가 무성했으나 지금은 너무 많이 변했다"며 "앞으로 고향에서 건강한 정신과 몸으로 어머니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 김씨도 "5년 전 남편이 죽고 난 뒤 허전하고 울적했는데 맏딸이 돌아오니 이제는 마음이 든든하다"고 말했다.

dmz@yna.co.kr

 

 

'소양강 처녀' 노랫말 속 주인공

강원수필문학회 春山/박광택

2013.08.02 10:13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춘천에는 영원한 처녀가 살고 있다. '소양강처녀' 노래비(2004,10,8.) 와 처녀동상(2005,11,8.)이 소양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소양2교 인근에 건립되어있다.

1969년에 취입되어 애창 되면서 모르는 이 없는 국민가요 '소양강처녀'는 춘천의 이미지 향상에 크게 기여하는 가요이다. 모든 이의 가슴에 애잔한 사랑의 물결이 일게 하는 매력 넘치는 가요, 국내외 방문객들을 불러 들이며 최상의 인기곡으로 자리매김 한지 40여 년이 흘렀다. 지금도 노래방 선곡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 노랬말 속 주인공을 찾았다.

계곡물이 흐르는 개울가, 벽 없는 객실 탁자에 자리하고 한방 닭요리와 소주를 주문 하면서 주인공 뵙기를 청했다. 잠시후 요리를 직접 챙겨들고 나온 주인공과 자리를 같이했다.(2013,6,21)

 

이야기는 그녀 아버지이야기로부터 시작 된다. 북 강원도 회양(지금의 철원 김화 북쪽 민통선지역)이 고향인 그녀의 아버지(고 윤장원)는 6.25사변 당시 월남했고, 미군부대 근로자로 일하던 중 미군 하사관들이 파주의 어느 계곡으로 가는데 3명의 한국인 근로자가 종행 했다가 지뢰 폭발로 동료 2명이 사망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머리에 큰 부상을 입으면서 한쪽 다리를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일을 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된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춘천으로 이거(移居)하여 상중도와 위도가 보이는 호숫가(사우동, 소양중학교 부근)에서 살게 되었다. 그곳에는 군납을 주로 하는 두부공장이 있었고 가족들이 일을 하며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가난으로 중학교 졸업 후 배움의 길을 계속 갈수 없었고 아버지는 쪽배를 타고 의암호의 여러 섬을 오가며 방울낚시를 주로 했다고 한다.

 

어려운 살림에 왜 그리 동생들은 많이 태어나는지, 7남매 중 맏딸인 윤기순씨는 돈을 벌기위해 1968년 서울로 갔다. 을지로에 있는 <한국가요반세기작가동지회>를 찾았다. 당시나이 17세, 활달한 성격의 용띠처녀는 '왈가닥'이란 애칭으로 노래를 배우며 심부름을 했다.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당시 회장이었고 회원 중에는 2012년 3월에 타계하신 작사가 반야월(본명 박창오, 또 다른예명 진방남, 추미림, 박남포)선생과 작곡가 이 호, 김종한 선생도 소속 되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잘 돌봐주는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하기위해 춘천으로 초청했고 상중도에서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여 대접했다. 이때 왈가닥처녀 나이 18세, 쪽배를 타고 섬을 오가는 과정에서 반야월 선생이 소양강처녀 노랫말 시상(詩想)을 메모했던 것이다. 이 가사는 작곡가 이 호 선생에게 넘겨졌고 가수 김태희가 트로트로 노래해 1970년 가요신인상을 받았다. 그후 편곡 된 노래를 부른 가수는 한서경 이라고 말했다.

 

1971년 그녀는 평소 아껴주던 작곡가 김종한 선생으로부터 가요 몇곡을 받게 된다. '이토록', '나도 모르게', '눈물이 없었더라면' 등 가요와 함께 '윤미라'라는 예명을 받아 취입하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일본까지 오가며 야간업소 출연으로 일하게 되었다.

 

소양강처녀 노랫말속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그녀는 1997년 어느날, 우연히 TV를 시청하고 있던중 반야월 선생이 전국노래자랑 방송에서 소양강처녀 시상을 준 처녀가 윤기순이라고 밝힘으로서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극장식 나이트클럽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아버지가 2001년 74세로 돌아가신 후 2006년, 55세가 된 그녀가 춘천으로 돌아왔다. 밤무대 가수로 버는 돈 춘천 집으로 송금하는 생활 35년이다.

 

오가는 대화 속에

"소양강처녀동상 건립에 대하여...?"

"예쁘게 생긴 건 좋지만 신어 본 적 없는 버선을 신었고, 가난에 빼빼 말랐던 다리가 무 다리인데 치마는 왜 들어 올리고 있으며 갈대는 왜 들고 섰는지? 갈대만 쥐고있지 않아도 내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보아주겠는데...ㅎㅎㅎ"

"떠나고 안 오시는 연인은...?"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연인은 무슨 얼어죽을 연인입니까? 글을 쓰시는 선생님은 사실만의 글만 쓰시나요?"

유모어가 넘치고 왈가닥 성품이 살아있는 반문이었다.

"자신이 '내가 진짜 소양강처녀 주인공'이라고 하는 여인이 있다는데...?"

"아무런 혜택도 없는 소양강처녀, 하고싶으면 하라지."

부연(敷衍) 없이 단호하게 답하는 그녀는 손수 농작물 가꾸느라 그을린 피부에 풀독마저 눈가를 부어 오르게 했다며 안대를 착용 한 사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5자매가 태어난 후로 남동생 형제가 태어났는데 그중 막내 남동생은 미국으로 이민 가고, 모두 출가해서 잘 살고 있지만 그녀만은 결혼을 포기한 채 큰 남동생 가족과 함께 사북면 지암리 계곡에서 민박집을 겸한 음식점 '풍전가든'을 경영하며 노모(78)를 봉양하고 있었다.

 

손님에게 제공되는 식재료는 대부분 자신과 남동생이 직접 경작한 것이라며 힘든 내색을 하지않고 쾌활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환갑을 넘긴 노랫말 속 처녀주인공, 왈가닥 용띠처녀 윤기순(예명 윤미라)씨는 '춘천의 영원한 처녀'로 사랑 받으며 살아가리라. (수필가, 춘천시보 '봄내' 명예시민기자)

 

 

 

소양강처녀 실존 인물 인터뷰

Jul 10, 2020

 

https://www.youtube.com/watch?v=MxNaI-PVRb4

작사가 (故)반야월 선생에게 "소양강처녀" 라는 노랫말의 영감을 준 소양강처녀의 모티브가 됐던 실존인물 윤기순님과의 만남. 작사가 반야월 선생과의 인연으로 탄생한 노래.

 

발표곡 "이토록" "눈물이 없었더라면" "나도 모르게 "

 

너와 나(강수영)/이토록(윤미라)

제조회사 : 71,신진

김종한 작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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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너와 나(강수영)
2.먼훗날(미남성)
3.나도 모르게(윤미라)
4.나의 첫사랑(미남성)
5.차거운 눈길(장정훈)

1.이토록(윤미라)
2.님의 창가(장정훈)
3.못잊을 여인(강수영)
4.당신을 몰랐다면(윤미라)
5.슬픈 첫사랑(장정훈)

 

열여덟 딸기같던… `소양강처녀' 실제 주인공은 2명

국민가요 `소양강처녀' 실제 주인공은 2명


47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
스토리텔링 등 본격 나서

▼17세 소녀 박경희
고 반야월 선생 머물던 여관 딸
쪽배 직접 노 저으며 태워줘
당시 사연 노랫말로 남겨

▼18세 소녀 윤기순
동생 학비 마련위해 상경
고 반야월 선생에 노래수업
춘천 중도서 같이 천렵도


서로 다른 곳에서 `소양강 처녀'로 불리며 살아온 박경희(65·충남 계롱시)씨와 윤기순(62·춘천 사북면)씨가 9일 도청에서 47년만에 처음 만났다. 국민애창곡 소양강 처녀 노래의 실존 주인공인 이들은 그동안 `누가 진짜 소양강 처녀 노랫말의 주인공일까?'라는 의문의 주인공이기도 했기에 처음에는 어색한 모습도 보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박경희)

박경희씨는 1960년대 춘천 소양1교 상류 강변 `호수장'이라는 여관집 딸이었다.

소양강변에 산다는 이유로 학창시절 별명도 `소양강 처녀'였다. 1967년 3월 고(故) 반야월 선생이 시상(詩想)을 찾기 위해 왔다며 여관에 보름간 머물렀다. 반 선생은 소양강 상류 쪽의 작은 섬에 가겠다며 그곳까지 태워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때 그를 태워준 `소양강 처녀'가 바로 당시 17세 소녀 박씨다. 쪽배에 그를 태우고 석양을 등진 채 노 젓는 소녀의 모습에서 첫 가사는 만들어졌다. 박씨는 당시 남자친구가 있었다. 노를 저으면서도 소녀는 남자친구가 보낸 편지를 틈틈히 읽었고 거제도에 살던 남자친구의 편지에는 “여기엔 동백꽃이 한창”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노랫말 2절의 동백꽃 가사는 그 편지 내용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전했다. 반 선생은 서울로 가기 전 “네 사연을 노랫말로 썼으니 음반이 만들어지면 주겠다”며 노 젓는 처녀 뱃사공 박씨의 사진을 선물하고 떠났다.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윤기순)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윤씨는 형편이 어려웠던 부모님을 대신해 열여덟 나이에 동생들의 학비 마련을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한국가요작가 동지회'에서 반야월 선생을 만나 노래수업을 받았고 반 선생은 첫 음반 `이토록'을 만들어줬다. 고마운 마음에 1968년 윤씨의 부친이 반 선생을 춘천에 초대했다. 상중도에서 천렵을 하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고 젖은 윤씨의 모습은 마치 갈대밭에서 외로이 우는 두견새처럼 보였다. 1990년 반 선생이 한 방송에서 중도 천렵 내용과 그 모델이 윤기순이라는 실명을 공개하며 자신이 주인공임을 알게 됐다. 바쁜 일정 속에 혼기마저 넘긴 윤씨는 `소양강 처녀'로 살다 2001년 춘천 지암리에 계시던 부모님들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춘천으로 이사를 와 지금까지 농사일과 가든 경영을 함께하고 있다.

■모두가 주인공

이날 두 `소양강처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참석자들은 두 사람의 스토리를 합해야만 `소양강 처녀' 노랫말의 퍼즐을 완성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생전에 반야월 선생도 주인공을 특정짓기보다는 당시 소양강에 살았던 모든 처녀가 주인공이라고 언급했었다. 두 소양강처녀는 이날 서로의 이야기를 인정했다. `우리가 주인공'이라며 활짝 웃었다.

문화강대국(대표:최정오)은 박씨와 윤씨의 사연을 취합해 스토리텔링화 하고 5월에 동영상을 유튜브와 SNS에 본격 공개할 예정이다.

최영재기자 yj5000@kwnews.co.kr

2015.08.14 / 10:20AM 출처 : 강원일보 / 2015. 4. 10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