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박재란 - 왜 몰라요

류지미 2022. 5. 25. 18:28

Korean Arts

2021. 4. 3.

박재란 - 왜 몰라요(1957년)

1957년 촬영 영상을 1962년 제작하여 문화영화로 방영된 기록 영상을 2016년 7월 9일 KTV 즐거운 쇼 中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1hfUbALRj5E

 

[추억의 가수] 히트곡 제조기 박재란의 '왜 몰라요'

 

17살에 ‘럭키 모닝’으로 데뷔한 후 '산 너머 남촌에는’, ‘왜 몰라요’ 등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시키며 국민가수 반열에 올랐다.

 

 

박재란(한국 한자: 朴載蘭, 본명(本名)이영숙(한국 한자: 李英淑), 1938년 12월 16일(1938-12-16) ~ )은 대한민국 여성 가수작사가이며 영화배우, 뮤지컬배우이다.

 

 

본관공주(公州)이며 경성부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기도 인천 제물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녀는 아직 일제 강점기 시절이던 1943년(4세 시절) 일가족과 함께 충청남도 천안에 이주하면서 이후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8세 시절이던 1947년에 부친상(父親喪)을 치렀으며 1953년 이영숙(李英淑) 본명으로 주한 미8군 무대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가수데뷔를 하였다.

이후 오르가니스트작곡가 박태준(朴泰俊)에게 발탁되어 박태준을 사부(師父)로 모시고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 김광수를 사숙(師叔)으로 모시며 박태준의 문하에서 음악 수련을 하며 박태준에게서 박재란(朴載蘭)이라는 예명을 얻었다.

 

1957년 17세에 정식 가수 데뷔하였고 이후 《뜰 아래 귀뚜라미》, 《러키 모닝》, 《코스모스 사랑》,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 등을 비롯한 노래들이 히트하였다. 1년 후 1958년에는 파인 김동환기타리스트작곡가 김동현작곡한 《산 너머 남촌에는》을 불러 연이은 히트 기록하였고, 이듬해 1959년 영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의 단역 출연을 통하여 영화배우 데뷔하였다.

 

같은 해 1959년에는 당시 미국 가수기타리스트작사가영화배우 벌 아이브스(Burl Ives)가 미국 시인라디오 MC였던 웨블리 에드워즈(Webley Edwards)와 공동으로 영어 가사작사하고 작곡 한 《Pearly shells》라는 노래 작품을 작사가 전우한국어 가사로써 번안 작사하고 박춘석이 편곡한 《진주 조개잡이》라는 노래를 받아 불렀다. 이 노래 작품은 국내에서 1960년대1970년대 여름 애창 노래 가운데 인기 애창 번안곡에 손꼽히는 노래가 되었다.

 

[추억의 가수] 꾀꼬리 아가씨 박재란의 '산넘어 남촌에는'

1965

박재란 노래

김동환 작사, 김동현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_uxNLEHNp6M

 

박재란 "'딸 박성신, 심장마비 사망…두번째 남편 마약 후 실종"[아침마당]

"수차례 극단적 선택 시도 했다"…기구한 인생사 고백
"딸들도 원망해, 현미가 오해 풀어줘" 고마움 전하기도

 

(서울=뉴스1) 김학진 기자 | 2021-03-10 07:49 송고 | 2021-03-10 10:04 최종수정

 

KBS1 프로그램 '아침마당' 방송화면 갈무리 © 뉴스1

 

가수 박재란이 두 번의 이혼을 겪은 아픔과 함께 기구한 인생사를 고백했다.

지난 9일 방송된 KBS1 프로그램 '아침마당'속 코너 '화요초대석'에는 가수 박재란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먼저 이날 박재란은 자신의 수입에 대해 "많이 벌었다. 하지만 그때는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하루에 여섯 군데씩 공연을 다니고 그랬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평생 그렇게 돈이 들어올 줄 알았다"고 떠올렸다.

 

또한 첫 번째 결혼 실패 후 두 딸들과 헤어졌고, 미국으로 이주를 했다는 박재란은 "미국으로 가서 한인 사회에서 노래하며 돈을 벌었다. 행사가 많았다. 당시 행사비가 우리나라 돈으로 최소 1000만원 정도였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그런데 두 번, 세 번 사기를 당했다. 세상을 잘 몰라 사람을 잘 믿었다. 다 진심이라고 생각했다가 큰 실패를 겪었다"고 고백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더불어 박재란은 "그런데 내가 영주권이 없었다. 불법체류를 하면서 험난하게 살았다. 추방당할 위기였다. 이러한 한계가 있었고 결국 유치장까지 갔다"고 고백했다.

이런 그에게 두번째 결혼의 순간이 찾아왔다고. 박재란은 "나를 좋아하는 연하의 남성과 라스베이거스로 가 결혼을 해 영주권을 취득했다"며 "두번의 결혼 실패를 하기는 정말 싫어 노력했다"고 떠올렸다.

박재란은 또 "이 양반이 친구를 잘못 만나서 아편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집에 안 들어오고 행방불명이 됐다. 1년이, 2년이 지나도 집에 안 들어오더라. 어디서 어떻게 사는 줄도 몰랐다. 오늘처럼 개방된 세상이라서 아무렇지 않게 여기지 않지만, 당시에 여자는 정말 정조를 지켰어야 했다"고 말하며 오열했다.

박재란은 "몇번씩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바닷가에 나갔다. 신발까지 벗었다. 그런데 보이지 않은 신께서 나를 돕더라. 내가 이대로 죽으면 가족과 딸들을 어쩌나 싶었고, 다시 일어나 보자고 마음먹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박재란의 둘째 딸은 7년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박재란은 이를 밝히며 또 한번 눈물을 쏟았다. 이와 함께 둘째 딸인 가수 박성신의 활동 영상이 공개됐다. 박재란은 딸의 목소리가 들리자 귀까지 틀어 막았다.

이에 김재원 아나운서는 "소식도 타향에서 들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엄마를 떠나보낸 딸의 마음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원망은 풀었나"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를 들은 박재란은 "다 내가 나빠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딸들 마저 오해를 하더라. 가수 현미씨가 도움을 줬다. 나는 미국에 있다 보니 현미가 딸들에게 내 상황을 다 전해서 오해를 풀어줬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은 내가 뭘 잘못한 줄 알더라. 현미는 정말 감사한 사람"이라고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한편 박재란은 1940년 생으로 올해나이 82세다. KBS 4기 전속가수에 합격하며 가수로 데뷔한 그는 '산 너머 남촌에는', 코스모스 사랑',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 등의 노래를 히트 시키며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또한 차녀 박성신도 가수로 활동했으나, 2014년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45세로 별세했다.


khj80@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