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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 (宋海) , 본명 송복희 (宋福熙)

류지미 2022. 6. 8. 13:04

2021.11.24

 

송해가 대구 달성공원에서 통신병으로 복무할 당시

군대 선임이 혼자였던 송해에게 여동생을 소개시켜줬는데, 그녀가 바로 송해의 아내인 석옥이(충주석씨) 여사다.

2018년 01월 20일 83세의 일기로 타계한 석옥이씨의 발인은 22일 오전 10시에 진행. 고향 함박산 송해공원에 안장되었다.

 

대구 달성군 비슬산해발1000m 산마루에 자리잡은 대견사. 실향민인 송해선생님의 부인 고향에 세워진 송해공원

 

 

송해공원이 있는 마을 기세리는 임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충주 석씨 석언우(1576~1609)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동네다. 석언우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사당 인산당(仁山堂)이 충주 석씨 대종당(大宗堂)이다. 송해 선생의 부인인 석옥이 여사 역시 충주 석씨다.

 

 

 

 

 

2021. 9. 16. 23:31

송해 (宋海) , 본명 송복희 (宋福熙), 아호 나팔꽃 인생

출생 1927427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황해남도 재령군)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본관 여산 송씨

현직 전국노래자랑 로고 MC

신체 158cm, 60kg, 250mm, A

 

가족

아내 석옥이(1934~2018)

장녀 송숙경, 차녀 송숙연, 장남(1966~1986)

사위 김학수, 양희천, 외손주 3(김혜림, 양정우, 양정하)

학력 황해도 해주예술학교 성악과

데뷔 1955년 창공악극단 데뷔 66년차

 

송씨는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51년 한국전쟁 당시 피난 대열에 섞여 부산으로 내려왔다.

1955년 ‘창공악극단’을 통해 데뷔했고,

1988년부터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해왔다. 34년간 공개 녹화를 통해 1000만 명 넘는 사람을 만났다.

 

2022년 5월  23일 기네스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 세계기록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KBS 연예대상 공로상, 백상예술대상 공로상, 한국방송대상 공로상,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출신 방송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연예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현역 최고령 연예인으로 대한민국 방송계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방송계의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게 너무나 당연한 일로, 사실상 현재 남아 있는 방송인 가운데 송해를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나마 송해 다음으로 방송계 큰어른인 이순재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정도. 다만 이순재보다도 7살이나 위인데다 데뷔도 2년 빠르기 때문에 역시 그에게도 대선배인 것은 마찬가지.

 

본업은 코미디언으로 유머 1번지와 코미디 하이웨이[10] 등에 계속 출연했던 과거가 있으며 현재는 주로 MC로 활약하고 있다.

 

2. 상세

그의 삶 자체는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이기 때문에, 송해 관련 인터뷰나 많은 프로그램에서도 다뤄졌는데, 1927427일 생으로 본명은 송복희. 일제강점기에 태어났기에 창씨개명을 했는데, 그것도 복 자라고 한다.

 

고향은 황해도 재령군이며, 어릴 적부터 끼 많은 개구쟁이로 동네에서 꽤 유명했다고. 아버지, 어머니, , 여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형은 자신이 해주예술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갈 길을 가겠다고 집을 나갔다고 한다.

 

1949년 황해도 해주예술전문학교 에 만 22세 나이로 입학해서 성악을 공부한 바 있었다. 이는 그가 월남 후 남한에서 전공을 살려 방송인의 삶을 산 계기가 아닐까 싶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본래는 '창공악극단'이란 이름의 순회 악단에서 가수를 했는데, 악단 공연의 특성상 진행을 하면서 입담을 살려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MC 경험을 쌓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학업은 오래가질 못하고, 이듬해 6.25 전쟁이 터지자 초기에는 고향에 머물렸는데, 당시 구월산 일대에 활동하던 공산당 유격대의 모병을 피하려고 인근 마을에 숨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는데, 1.4 후퇴가 벌어지던 때에 다시 나가려는데, 당시 어머니가 "얘야, 이번엔 조심해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걱정 마세요."라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나왔는데, 그것이 마지막 인사이었다. 바로, 북한 인민군의 진주로 인해 재령에서 해주, 해주에서 연평도로 피란을 떠나 연평도에서 미 군함에 타면서 부산까지 내려왔다. 이 때부터 지금의 이름 즉, 실향민으로 바닷길을 건너오면서 바다 해() 자를 예명으로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고인은 1927년 4월27일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토현리에서 송제근과 박신자의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송복희. 오민석 단국대 교수(시인‧문학평론가)가 펴낸 『나는 딴따라다 - 송해평전』(스튜디오본프리, 2015)에 따르면 부친은 숙박업체와 주막을 운영했는데 일터 따라 가족이 자주 이사했다고 한다. 재령군으로 옮긴 것은 고인이 초등학교 다닐 때다. 그가 전쟁통에 징집을 피해 고향을 떠났을 땐 가족 중 어머니와 8~9세 연상의 형님, 7~8세 연하의 여동생만 생존해 있었다.

 

황해도 재령. 그리운 어머니를 두고 떠나온 곳.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와중에 혈혈단신 남하할 땐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이번에는 조심하거라” 하며 눈물짓던 어머니와 툇마루에 앉은 여동생이 23세 청년 송해 뇌리에 남은 마지막 모습이다. 그렇게 시작된 유랑 길이 평생 그를 서민의 벗, 무대 위의 ‘광대’로 이끌었다.

 

피난선이 도착한 부산항에서 그는 앞 사람만 따라다니다가 군에 입대해서 통신병으로 복무하면서 1953727일 휴전 메시지를 직접 타전하기도 하였다. 그 때 당시 쓰던 모스 부호를 아직까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당시 군대 선임이 혼자였던 그에게 여동생을 소개시켜줬는데, 그녀가 바로 그의 부인인 석옥이 여사였다.

 

3일 밤낮 항해 끝에 배는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한에서 생존 분투가 시작됐다. 전쟁통이라 군 입대를 통해 생계를 해결했다. 육군 통신학교에 배정돼 혹독한 무선 훈련을 거쳤다. 고인은 1953년 7월27일 모스 부호로 전군에 휴전협정 조인을 알린 최초 군인들 중 한명이다. 이 기간 군예대 활동도 했다. 북한에서 해주음악전문학교(성악과)에 다닌 게 보탬이 됐다. 3년 8개월간 군복무를 마치고 54년 8월 제대했다.

 

군 제대 이후에는 상술했던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연예 활동을 시작했으며, TV 방송이 시작한 후에는 여러 방송사를 넘나들면서  조연급 코미디언으로 대활약하였는데, 코믹 프로그램을 할 때는 주로 고학력자를 풍자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포지션은 만자이 용어로 츳코미다. 배삼룡, 구봉서와 같이 출연한 '그 시절 그 쑈'의 영상, 해당 영상은 2002년에 연기하였다. 여러 방송사들 중에서 특히, KBS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듯하다.

 

과거 동양방송이 매일 아침 AM 라디오 채널을 통해 방영하던 생활정보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19]의 진행을 맡으면서 운전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이때 운전자들이 교통 통신원을 조직하여 그 제보를 활용한 시스템은 현재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각종 교통방송에서도 활용하고 있다. 다만, 후술할 1986년 아들의 오토바이 교통사고 이후 그 충격으로 한동안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하면서 17년 동안 맡아온 진행자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누가 뭐래도 방송인 송해와 한몸인 프로가 ‘전국노래자랑’이다. 1980년 11월 첫 전파를 탄 ‘전국노래자랑’ 마이크를 그가 넘겨받은 것은 61세였던 88년. 그는 2년 전 교통사고로 스무살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를 공개무대 현장으로 끌어들인 이가 배우 안성기의 친형이기도 한 안인기 KBS PD다. 고인은 PD 출신이자 영화제작자였던 그의 부친과 오랜 마작 친구 사이였다. 88년 5월 경상북도 성주 편을 시작으로 91년 몸이 좋지 않아 6개월 쉰 것과 말년을 제외하곤 녹화에 불참한 적이 없다.

 

고인은 평생 '딴따라'를 자처했고 대중문화예술인이란 데 자부심을 가졌다. 2003년 김대중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 받았을 때 수상소감이 “나는 딴따라다. 영원히 딴따라의 길을 가겠다”였다. 2015년 은관문화훈장 수상 땐 “대한민국 대중문화 만세!”라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생전 그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송해 1927’(감독 윤재호)이 2020년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선보였다. 60여년을 해로한 부인 석옥이 여사를 2018년 1월 지병으로 먼저 보냈다. 유족으로 두 딸과 손주들이 있다.

 

송해 - 아주까리 등불(1990)

https://www.youtube.com/watch?v=yulNISiJV7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