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역사의 눈물,
중국의 '티베트 평화 해방 조약 17조' 사기극 전말
Jimie 18.04.28 08:37
중국의 티베트 평화 해방 조약 17조 사기극 전말
1949년 10월 1일, 중국 국민당을 누르고 본토를 장악한 공산당 정부는 '제국주의로 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1950년 10월 7일, 동부 티베트 '참도'지역을 공격하여 달라이라마와 티베트 정부를 압박합니다.
1950년 11월, 티베트 정부는 유엔에 도움을 호소하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으로 인해 정신이 없던 상황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51년 5월 27일, 티베트 남부로 피신해 있던 14대 달라이라마는 라디오를 통해 5월 23일 티베트 정부 대표단과 중국이 '티베트 평화 해방 조약 17조'에 합의했다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베이징에 파견한 티베트 대표단은 조약 체결에 관한 권한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그들을 위협하여 서명하게 했습니다. 17조 전문을 내용상으로 보면 마치 중국이 티베트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면속에 숨겨진 진짜 모습은 흉악한 짐승과도 같았습니다.
한쪽에서는 무력으로 압박하고 베이징으로 불러 들인 티베트 대표단을 위협하여 맺은 조약을 갖고 티베트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워 지금까지 중국 정부에 대항한 티베트인 약 120만명 이상을 죽였으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티베트를 핍박하는 중국 정부를 보면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서 그럴 수 있는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1939년 | 14대 달라이라마 ‘땐진 갸초’(1935~) 환생자로 공식 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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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미국 군인 2명이 최초로 티베트 공식 방문 | |
1947년 | 인도, 영국, 미국, 중국에 통상사절단 파견 : 각 대표단은 티베트 여권으로 여행했으며 인도에서 개최된 ‘아시아회의’ 에서 주권 국가의 대표단으로서 인정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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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7월 | 티베트정부, 라싸 중국 주재관 추방 | |
1949년 8월 10일 | 중국 국민당 정부, 티베트의 2인자 ‘10대 판첸라마’ 환생자 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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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1일 | 중국 공산당 본토 장악 | |
1949년 10월 25일 | 중국, ‘베이징 라디오’는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이며 인민해방군이 ‘제국주의 외세로부터 티베트를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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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1월 2일 | 티베트 외무성, 중국 모택동에게 티베트는 자주 독립국임을 밝히며 국경 문제 등에 대한 협상을 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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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7일 | 중국 인민해방군 4만명, 동부 티베트 ‘참도’ 공격, 당시 대항하던 티베트 군대는 약8,000명. 이틀만에 함락되고 약 4,000명의 티베트인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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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11일 | 티베트정부, 유엔에 중재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 |
1950년 11월 17일 | 14대 달라이라마 지도자로 즉위, 당시 만16세 | |
1951년 1월 | 14대 달라이라마, 티베트와 인도 접경지대인 남부 ‘야뚱’으로 피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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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23일 | 중국, 티베트 정부 대표단과 베이징에서 티베트해방17조 체결. 달라이라마는 피신지역에서 라디오를 통해 이 소식을 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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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8월 17일 | 티베트 남부로 임시 피난했던 14대 달라이라마, 수도 라싸로 귀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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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9월 9일 | 중국 인민해방군 약 3,000명 라싸 진입, 이후 추가 병력까지 도착, 총 약 2만명 주둔. 당시 수도 라싸 인구는 5만명 |
티베트 대표단을 위협하여 강제로 맺은 '티베트 평화 해방 조약 17조'
1951년 4월, 티베트 국가 수반인 14대 달라이라마 '땐진 갸초'(1935~)는
당시 동부 티베트 '참도'지사였던 '응아뾔 아왕 직메'(↓Ngapoi Ngawang Jigme, 1910. 2. 1.~ 2009. 12. 23)를 수석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 5명을 중국 베이징에 파견했으며 중국 대표단은 '리웨이한'(1896~1984)을 수석대표로 하는 4명이였습니다.
대표단에게 주어진 권한은 티베트의 공식 입장을 이야기하고 중국 정부 의견을 들어본 후 중대한 사항에 대한 결정은 티베트 본국 지시를 따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1951년 4월 29일부터 5월 21일까지 네차례에 걸쳐 회담이 진행되면서 중국측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조약 17조 전문에 대해 서명할 것을 강요당한 티베트 대표단은 본국 정부에 연락을 취하려고 했으나 이를 허락해 줄 중국 정부가 아니였습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 대표단에게 위협을 가하고 강제적으로 서명토록 하자 견디지 못한 대표단은 서명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으로 할 뿐, 달라이라마와 티베트 정부를 구속하는 효력이 없다는 것을 중국 정부에게 확인을 받았으나, 티베트 침략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급급했던 중국정부에게는 어림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또한, 티베트 대표단은 국가간 조약에 필요한 '국새'도 없었습니다. 14대 달라이라마가 티베트 남부 '야뚱'으로 피할 당시 대표단에게 권한을 주지 않기 위해 '국새'를 갖고 왔으며 중국 정부는 인장까지도 위조해 날인했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 평화 해방'을 위해 1951년 5월 23일 협정이 체결됐다고 27일 세계에 알렸으며, 당시 피신해있던 14대 달라이라마는 티베트를 고통으로 몰아 넣은 이 엄청난 소식을 중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어야만 했습니다.
1951년 5월 23일, 평화 해방 조약에 양국 대표단이 서명하는 모습. 중국 정부의 선전용 자료로 쓰이고 있다.
" 어느날 저녁 혼자 있는데 매우 색다른 방송이 들려왔다.
중화인민 공화국과 소위 티베트 정부 대표들이 '티베트 평화 해방 협정'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소식이 거칠고 딱딱한 목소리로 발표되고 있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들을 부르고 싶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대변인은 지난 '100여년 동안' 침략적인 제국주의 군대가 티베트를 침략해서 어떻게 온갖 사기와 선동을 일삼아 왔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러한 상황에서 티베트 국민은 극심한 고통과 노예 상태에 빠지게 되었노라'고 떠들었다. 나는 거짓말과 진부한 수사가 그토록 교묘히 섞인 발표를 듣고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사기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한바 '협정'의 조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즉 '티베트 국민은 모두 단합해서 티베트에서 제국주의 군대를 몰아낸다. 티베트 민족은 자신들의 조국인 중화인민공화국에 복귀한다'는 내용이었다. 무슨 해괴망측한 얘기인가? 티베트에 거주한 외국군이라면 최근이라고 해야 1912년 만주군 뿐이었다. 내가 아는한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다.) 그 당시엔 유럽의 어떤 군대도 티베트 국경안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조국에의 복귀는'라는 말이야 말로 후안무치의 극치였다.
티베트는 한 번도 중국의 속국이 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옛 티베트 영토를 돌려줄 것으로 중국측에 요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무엇보다도 중국과 티베트는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혀 다르다.
우리는 언어도 서로 다르며 문자도 서로 다르다. 국제사법위원회의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2년 중국 세력을 축출한 티베트는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인정되는 것이 정당하다.그러므로 티베트는 1911~1912년에 사실에 있어서나 중국의 법에 의해서나, 독립된 주권국가로 재수립된 것으로 본다.'"
- 14대 달라이라마의 자서전, 유배된 자유를 넘어서 中-
중국 중앙인민정부와 시짱 지방정부의 평화적인 해방 협의 17조
중국 인민정부와 티베트 지방정부의 평화적인 티베트 해방에 관한 협의 17조 전문
1. 티베트 인민은 단결하여 티베트에서 제국주의 침략 세력을 몰아낸다. 티베트 인민은 모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의 가족안으로 돌아온다.
2. 티베트 현지 정부는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에 들어가 국방을 강화하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3. 중국인민정치자문위원회 공동 강령에 기재된 민족주의 정책에 따라, 티베트 인민은 인민중앙정부의 통합적 주도 아래 민족적, 지역적 자치를 행사할 권리가 있다.
4. 중앙정부당국은 티베트의 현재 정치 체제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또한 중앙정부당국은 달라이라마의 현재 지위와 역할, 그리고 권한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직급의 관리들이 평상시 직위를 유지 할 것이다.
5. 뺀첸(판첸)라마[각주:1]의 현재 지위와 역할, 그리고 권한은 그대로 유지된다.
6. 달라이라마와 뺀첸라마의 현재 지위와 역할, 그리고 권한이라 함은 13대 달라이라마와 9대 뺀첸라마가 상호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의 지위, 역할, 권한을 의미한다.
7. 중국인민정치자문위원회 공동 강령에 기재된 종교적 자유의 정책은 이행될 것이다. 종교적 신앙, 티베트 인민의 전통과 관습은 존중받을 것이며, 불교 사원들은 보호받을 것이다. 중앙 정부당국은 사원 재원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8. 티베트 군대는 단계적으로 인민해방군내에 편입되고, 중앙인민정부 국방 세력의 일부가 될 것이다.
9. 티베트 민족 교육과 구어와 문어는 티베트의 현실 상황에 맞추어 단계적으로 발전시킬 것이다.
10. 티베트의 농업, 가축 사육, 산업과 상업은 단계적으로 발전시킬 것이며, 인민의 생계수단도 티베트의 현실 상황에 맞추어 단계적으로 개선시킬 것이다.
11. 티베트에서 행할 다양한 개혁과 관련해서, 중앙정부당국의 강제는 전혀 없을 것이다. 티베트 현지 정부가 그 의사대로 개혁을 실행할 수 있으며, 인민측에서 개혁을 요구할 경우, 티베트의 지도자와의 협의를 통해 결정한다.
12. 과거 친제국주의 혹은 친국민당 인사의 경우, 그들이 제국주의와 국민당과의 관계를 결연히 청산하고 파업이나 저항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과거에 관계없이 지위를 유지해도 좋다.
13. 티베트에 진입하는 인민해방군은 위에서 언급한 정책을 모두 준수할 것이며, 물건을 사고 파는데 정당한 거래를 하고 인민에게 속한 바늘 하나, 실 한 타래라도 독단적으로 빼앗지 않을 것이다.
14. 중앙인민정부는 티베트 지역의 모든 대외문제를 책임질 것이다. 인접국과는 평화적으로 공존할 것이며, 평등, 상호이익, 영토와 주권에 대한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공정한 통상 관계를 수립하고 발전시킬 것이다.
15. 협의안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 중앙인민정부는 티베트에 군사와 행정위원회, 군사지역 본부를 설치할 것이며, 중앙인민정부에서 파견한 인사 이외에도 가능한 한 많은 현지 티베트인이 업무에 참여하도록 할 것이다. 군사와 행정위원회에 참여하는 티베트 인사에는 티베트 현지 정부 구성원이었던 애국자나 다양한 지역, 다양한 종파를 배경으로 하는 이들도 포함될 것이다. 중앙인민정부와 여러 관련 지역 대표자들의 협의를 거쳐, 인사 명부가 곧 준비될 것이며 중앙인민정부의 승인을 통과할 것이다.
16. 군사와 행정위원회, 군사지역 본부, 티베트 주재 인민해방군에 들어가는 자금은 중앙인민정부에서 댈 것이다. 티베트 현지 정부는 인민해방군이 식량과 사료, 그외 생필품을 구입하고 운송하는 일을 도와야 한다.
17. 이 협의안은 서명과 날인이 끝나는 즉시 효력을 발휘한다.
지도자 14대 달라이라마,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라싸로 귀환
인도 국경과 인접해 있는 '야뚱'에서 슬픈 소식을 라디오로 들어야만 했던 14대 달라이라마는 많은 고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영화, '티벳에서의 7년' 실제 주인공인 '하인리히 하러'도 서신을 보내 인도 망명을 권했고 큰 형은 미국 방문이 성사되었다며 급히 인도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달라이라마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한국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이 많은 희생을 치르며 언제까지 티베트를 도와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과 언젠가는 또 다시 티베트는 홀로서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점 특히 무엇보다도 전쟁을 하게 되면 티베트인은 물론 미국인과 중국인들의 수많은 인명피해가 뒤따를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야뚱을 떠나 1951년 8월 17일 티베트 라싸에 도착합니다.
처음에는 17조 협의를 지키는 듯 했으나 본색을 드러낸 중국
1951년 9월 9일, 약 3,000명의 중국 인민 해방군이 라싸로 무혈입성하고 뒤이어 추가 병력까지 약 2만명의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심장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당시 기록에 의하면 라싸 주민의 인구는 5만명 정도였습니다.
자칭 '티베트 평화 해방 조약' 14조에 의하면 인민해방군은 정당한 매매행위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인민의 것을 함부로 빼앗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티베트 정부가 공급하는 식량에 대해 값을 치르고 사무실로 쓰기 위한 임대 건물 보상을 하는 등 17조 협정내용을 지키는 듯 했지만 이러한 보상체계는 곧 무너졌고 식량과 숙소를 당연한 권리처럼 요구했습니다.
갑자기 불어난 라싸 인구로 티베트의 빈약한 물자는 바닥이 났으며 곡물가가 두 배이상 폭등하는 등 심각한 위기가 닥쳤습니다. 티베트인들은 분개했으며 침략자에 대한 소극적인 증오는 공공연한 조롱으로 까지 발전했습니다.
1955년 여름, 달라이라마는 캄과 암도지방에서 불안한 소식들을 접하게 됩니다. 중국이 당초 협정내용과는 달리 일방적인 개혁을 시행하고 있다는 내용이였습니다. 사원 재산, 가옥과 토지, 가축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고 대토지들은 몰수되어 중국 기간 요원들에 의해 재분배 되었습니다. 또한, 중국측이 보기에 야만적이고 비위에 거슬렸던 유목민들을 붙잡아 들이기 시작했고 오랜 전통의 불교 활동을 심하게 방해하며 주민들에게 종교를 반대하도록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였습니다.
티베트를 농락한 '마오쩌둥'
1954년 중국 정부 요청으로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전국인민대회에 달라이라마와 2인자 뺀첸라마가 함께 참석을 해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과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마오쩌둥의 달콤한 말에 젊은 청년 14대 달라이라마는 그에 대한 인간적인 매력까지 느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중국이 티베트에 진격한 것은 오로지 티베트를 돕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티베트는 훌륭한 나라입니다. 당신네는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옛날에는 티베트가 중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낙후되어 있고 우리는 당신네 나라를 돕고 싶은 것입니다. 20년안에 당신들은 우리보다 앞서게 될 것이고 그때가서 당신네가 우리를 도와주기 바랍니다"
- 달라이라마 자서전, 유배된 자유를 넘어서 -
1954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 10대 뺀첸라마(왼쪽), 마오쩌둥(가운데), 14대 달라이라마(오른쪽)
그러나, 마지막 회견에서 마오쩌둥은 "당신의 태도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독약과 같습니다. 첫째, 비구승이나 비구니가 독신이기 때문에 인구를 감소시킵니다. 둘째, 그것은 물질적인 발전을 도외시합니다. " 라는 말을 통해 중국이 티베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떻게 할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이후 마오쩌둥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여 티베트인들을 실망시키고 환멸에 빠지게 했습니다.
중국의 살해 위협을 피해 끝내 인도 망명길에 오른 14대 달라이라마
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이후 1951년 5월 23일 강제로 체결된 '티베트 평화 해방 조약 17조'에 따라 티베트 미래를 위해 중국 정부에 협조하나 17조 내용은 침략의 명분을 얻기 위함일뿐 티베트를 위함이 아닌 티베트를 갖기 위한 더러운 욕망에 가득찬 중국의 대사기극에 불과했습니다.
라싸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인민해방군은 14대 달라이라마에게 중국 가무단 공연에 초대했고 관람날짜가 3월10일로 정해지자 중국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티베트 민중들 사이로 퍼지면서 야만적인 중국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수많은 티베트인들이 '여름 궁전 '노르부링까'에 몰려 들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어렵게 라싸를 떠날 것을 결정하고 1959년 3월 17일 밤 10시경, 병사 옷으로 갈아 입고 2대 달라이라마의 남은 탕카를 어깨에 메고 여름 궁전을 빠져 나왔습니다.
'여름 궁전'을 빠져 나올 때 달라이라마의 당초 계획은 인도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피신을 하고 그곳에서 17개 조항의 협정을 거부하며 티베트에서 합법적인 행정권을 가진 정부를 재수립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중국측과 협상을 벌이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달라이라마가 아직 궁전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았던 중국인민해방군은 그 곳을 향해 이틀 동안 포격을 가했고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모인 티베트인들에게 무차별총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보고(사망자수 약 87,000명으로 추산)를 받고 잔인하고 범법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과의 협상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달라이라마는 그곳에서 17개 조항 협정을 거부한다는 공식 선언을 하고 새로운 티베트 정부를 구성한다는 성명을 발표를 한 후 뒤따라 오는 중국 군대를 피해 인도로 망명 후 지금까지 티베트 자유를 위한 비폭력 독립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인도 망명 길에 오른 14대 달라이라마(왼쪽)와 호위 병사들
▲ 1951년 3월 25일, 티베트 대표단이 서명한 조약 17조
※ 참고 문헌
- 달라이라마 자서전, 유배된 자유를 찾아서(정신세계사)
- 티베트 상처 입은 문명(시공사)
- 티베트 달라이라마의 나라(이산)
- 달라이라마 평전(도서출판 바움)
- 티베트 망명정부 동아시아 대표부 사이트 (www.tibethouse.jp)
관련 글 링크
2015/07/07 - 티베트 달라이 라마 공식 즉위 75주년, 사진으로 보는 일대기
2012/03/13 - 중국이 납치한 티베트 11대 판첸라마
2012/07/03 - 티벳 독립 운동史 , 1959년 3월 10일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라'
출처: http://lungta.kr/87 [룽타의 히말라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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