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단종의 슬픔을 간직한, 육지 속의섬,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

류지미 2022. 7. 20. 18:34

단종의 애환이 살아 숨쉬는 육지 속의 작은 섬, 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

 

 

두견새 우는 청령포

이만진  작사 / 한복남 작곡 /심수경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escxhSElsCM 

 

1. 왕관을 벗어놓고 영월땅이 웬말이냐,
두견새 벗을 삼아 슬픈노래 부르며,
한양천리 바라보고 원한으로 삼년세월,
아, 애달픈 어린임금 장릉에 잠들었네.

2. 두견새 구슬프게 지저귀는 청령포야,
치솟는 기암절벽 구비치는 물결은,
말해다오 그 옛날의 단종대왕 귀양살이,
아, 오백년 그 역사에 비각만 남아있네.

3. 동강물 맑은 곳에 비춰주는 달을 보고,
님 가신 뒤를 따라 꽃과 같이 사라진,
아름다운 궁녀들의 그 절개가 장하고나,
아, 낙화암 절벽에는 진달래 피고 지네.


청령포로 가려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입장료는 성인을 기준으로 1인 3천원의 입장료가 있으며배 운행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수시로 운행이 되고 있으며 2008년 12월 국가지정 명승 제50호로 지정된 곳이다.

 


조선 제대 왕인 단종은 숙부.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1456년 박팽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되어 모두 죽음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고
다음해인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서, 남,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으로
현재 단종어소, 단묘재본부시유지비, 금표비, 관음송, 노산대, 망향탑 등이 있다.

 


작은 유람선을 타고 청령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반겨준다.

이 소나무 수림지는 2004년 산림청이 천년의 숲으로 지정하였으며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거송들이 들어 찬 수림지로 단종 유배지를 중심으로 주위에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다.


수림지에 도착하면 바로 앞에 단종어소가 자리 잡고 있다.

단종어소 바로 앞쪽에 초가집이  있는데  이 가옥은 다른 설명이 없다. 아마도 단종을 수발하던 궁녀와 관노들이 생활한~
 


초가의 방과 부엌에는 침모가 생활한 모습의 인형이 전시되어 있어 그 때의 집 내부 모습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단종어소 (端宗御所)는 단종이 유배  생활하던 장소로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단종어소 내부에는 단종대왕의 모습 재현

 

단종대왕을 알현하는 선비의 모습 재현

 


 단종대왕이 입었던 곤룡포와 신발 등  물품  전시

 

 

 

단종어소의 뒷 모습- 낮으막한 굴뚝, 낮은 담장

 

단종어소 바로 앞 담장에 소나무 한 그루가 담장 밖에서 단종어소 방향으로 엎드리다시피 한 모습으로
유배된 단종을 애절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 하여 흥도 소나무라고 불리고 있다는...



담장 밖에서 단종어소를 향하여 재배를 올리는 듯 그 모습이  기이하면서도 애절하다.


엄흥도(嚴興道)는 어떤 인물인가?


엄흥도가 영월호장(寧越戶長)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 받고 있는 인물이다.


현재 영월 장릉에는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영조 2년(1726년)에 세운 "엄흥도 정여각"과 엄흥도 박물관이 있다.

                                                                  영월 장릉에 있는 엄흥도 장여각(嚴興道 旌閭閣)

 



단종어소 바로 앞에 있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는 1457년 6월 22일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대왕께서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셨던 곳으로
당시 이곳에 단종대왕의 거처인 어소가 있었으나 소실되고
영조 39년(1763년)에 이 비를 세워 어소 위치를 정하고 있다.

비의 총 높이는 162cm로서 1단의 화강석 기단위에 오석으로 된 비석을 세우고
비 앞면에는 "端廟在本府時遺址碑" (단묘재본부시유지)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 涕敬書令原營竪石地名 淸泠浦
(세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 체경서영원영수석 지명 청령포)로 음각되어 있다.

 

금표비(禁標碑)는 단종께서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시던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비석으로

뒷면에는 "東西 三百尺 南北 四百九十尺 此後 泥生亦在當禁崇禎九十九年"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 차후 니생역재금숭정구십구년) 이라 음각되어 있다.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승정99년"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단종이 해질 무렵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노산대(魯山臺)~

노산대(魯山臺)는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로 유배된 후 해질 무렵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노산대~ 지금은 전망대 형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노산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답지만
노을에 쓸쓸히 앉아 오도가도 못하는 단종의 처지에서는 처량함만 밀려들었을지도 모를 일...

임금을 염려하고 그리면서 기도하고  있을  왕후는 어이 안녕하신지... 소식조차 알길 바이 없는 세월이다.


노산대에서 잠시 단종의 시름을 생각해 보고 내려오면 그곳에는 거대하고 멋스러운 청령포 관음송이 자리를 잡고 있다.

청령포 관음송은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높이 30m, 가슴높이의 기둥둘레가 5m이며  지상 1.2m에서 두가지로 갈라졌는데  두 가지의 밑 둘레는 각각 3.3m 와 2.95m라...
이 관음송의 나이는 확실하지 않으나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서 약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부르는 것은 이 소나무가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볼 관觀), 들었다(소리음 音)다 하여 관음송이라는 이름이 전한다.




선착장으로 향하며 관음송에서 단종어소를 다시 한번 뒤 돌아 본다.



관광객들이 쌓은듯한 돌탑.
어린 단종의 애절한 넋을 위로하면서 쌓은 돌탑이리라.


단종의 애절한 사연(哀史)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령포를  둘러싸고 흐르는 강물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어린 단종대왕의 애절함과 슬픈 사연이 가슴 아린 아픔으로  강물에 흐르는  영월 청령포

 

                                                                                  영월 청령포 매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