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장릉(莊陵)과 사릉(思陵)

류지미 2022. 7. 22. 07:18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장릉(莊陵)

 

세상에 가장 비참하고 참혹하고

애처롭고 안타까운,

 

쓸쓸하고 슬프고

서러운,

...

그 어떤 죽음이 있다면...

 


조선 제 6대 왕 단종은 숙부.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1456년 박팽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고
다음해인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에 유배되었다.

 

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

https://www.youtube.com/watch?v=escxhSElsCM 

 

말을 탄 금부도사가 폐주 앞에 나타났다. 청년 군주는 자신의 해금 소식을 알리려고 달려온 관리인 줄 알고 버선발로 나섰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사약이 들려 있었다. 죽음의 약사발을 앞에 둔 단종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잃은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밤마다 잠 청해도 잠들 길 바이없고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끝없는 한이로세.

울음소리 새벽 산에 끊어지면 그믐달이 비추고

봄 골짝에 토한 피가 흘러 꽃 붉게 떨어지는구나.

하늘은 귀먹어서 저 하소연 못 듣는데

어쩌다 서러운 이 몸의 귀만 홀로 밝았는고.


<자규시(子規詩)>다. 궁중에서 나온 한 마리 원통한 새, 단종 자신이 바로 그 두견새다. 인정 많은 조선의 백성은 쫓겨난 임금의 시를 노래로 불렀다.

 

끝까지 사약을 거부하던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목이 졸려 죽었으니 《연려실기술》의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금성(金城)의 옥사와 단종의 별세> 조에 그날의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 하나가 항상 노산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기니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 뇌우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청년 군주의 나이 16세. 한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였으니 어린 조카를 위해 보위를 물려받았다는 세조의 강변은 거짓이다. 굳이 정사를 멀리하고 야사를 인용해 그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당시 정사가 야사보다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록의 기록은 이렇다. "노산군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자결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설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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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端宗哀史)

 

단종(端宗, 이름; 홍위 弘暐 )은 조선 제 6대 왕.

재위 1452년(단종 즉위년)∼1455년(단종 3)

시호는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1441년 8월 9일(음력 7월 23일) 문종과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출생

1448년 7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세종의 원손).

1450년 9살 ,조부 세종대왕이 죽고 아버지 문종이 왕으로 즉위하자 바로 왕세자로 책봉.

 

세종의 적장손이자 문종현덕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나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세종이 사망한 뒤 문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왕세자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현덕왕후가 산후 후유증으로 죽었고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도 단종이 어렸을 때 사망했으며 마지막 남은 직계 존속인 아버지 문종마저 지병이던 등창의 재발과 악화로 사망하면서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혈혈단신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올라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의 보좌를 받게 되었다.

 

1452년 6월 1일 (음력 5월 14일) 문종이 승하하자 1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453년 음력 10월, 계유정난(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을 죽이고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1454년(단종 3년) 3월 숙부 수양대군이 실권장악.

1455년 7월 25일 (음력 윤 6월 11일),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다.

 

1456년 음력 6월 단종복위 (사육신)사건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1457년 9월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사건으로, 금성대군 사사,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등되어 10월에 사약을 받았는지? 자결? 타살? .... 고 이홍위(李弘暐)는 16세 나이로 이승을 떠났다.

.

1681년(숙종 7)에 신원이 되어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에 묘호는 단종으로 복위되고 능은 장릉(莊陵)...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장릉(莊陵)

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월읍 영흥리 1090-1

 

의덕단량제정순왕후(端良齊敬定順王后) 사릉(思陵)

 

단종대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여산송씨(礪山 宋氏 ; 1440~1521)

세조 3년(1457년) 폐위 , 숙종 24년(1698년) 복위

 

부사 송계성의 증손녀이고, 지중추원사 송복원의 손녀이며,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이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우가 있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1453년(단종1)간택되어

1454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세조1)세조가 즉위함에 따라 의덕왕대비에 봉하여졌으나

1457년(세조3)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궁에서 쫓겨나 관비가 되었다.

 

1457년 12월 노산군(단종)이 사사된 후 한평생 단종의 명복을 빌다가

1521년, 81세 세상을 떠나다.

 

1698(숙종24)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되자 다시 정순왕후로 추복 신위가 창경궁에 옮겨졌다.

시호는 의덕단량제정순왕후(端良齊敬定順王后)이고 능호는 사릉(思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있다

 

 

제6대 단종, 정순왕후 송씨[사릉(思陵)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108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현 칠보면)에서 태어났으며,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영돈녕부사로 추증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 송현수를 따라 한성부로 이사하였다.

 

김종서의 사후 1454년에 간택령에 따라 왕비교서를 받고 즉위하였다. 남편 단종이 강등되면서 군부인(君夫人)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되었다. 이후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남편 단종의 명복을 빌다가 사망하였으며, 그의 능의 소나무는 동쪽 방향으로 굽는다는 전설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친정마저 풍비박산 난 상태였던 그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한편, 그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씨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큰 바위를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이후 세조는 그에 대해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1521년, 81세로 세상을 떠나다.

 

후일,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동망봉 근처 지역이 채석장으로 쓰였으며 그 바위는 깨어져나가버렸다. 2011년 현재, 서울 종로구 낙산 근처인 이곳 동망봉 남쪽에는, 동망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