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청령포 장릉 단종
청령포에 흐르는 눈물
[ 寧越 淸泠浦 莊陵 ]
종목명칭분류지정(등록)일소재지면적소유자(단체)관리자(단체)
명승 제50호 |
영월 청령포 장릉 (寧越 淸泠浦 莊陵) |
자연유산 / 자연경관 / 지형지질경관 |
2008년 12월 26일 |
강원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번지 등 |
204,241m2(지정구역) |
국유 |
강원 영월군
[네이버 지식백과] 영월 청령포 장릉 단종 [寧越 淸泠浦 莊陵] - 청령포에 흐르는 눈물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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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명칭분류지정(등록)일소재지면적소유자(단체)관리자(단체)
문화유산채널 7분 다큐 "조선왕릉 5부, 청령포[淸泠浦]에 흐르는 눈물, 장릉[莊陵]" 편
영월 청령포는 어린 나이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서쪽은 육육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 형성된 곳으로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을 비롯하여 단종의 어가 주변에 조성된 크고 오래된 소나무림이 270° 돌아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조선시대에 왕릉은 도성 10리 밖, 100리 내에 조성했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은 유일한 능이 청령포 인근의 장릉(莊陵)이다.
소년 왕 단종은 왜 도성이 아닌 강원도 영월에 묻히게 되었을까. 왜 정순왕후의 능 옆에는 일반인의 묘가 함께 있을까.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법하지만, 어린 왕과 어린 왕비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았다.
영월 청령포 장릉 단종 [寧越 淸泠浦 莊陵] - 청령포에 흐르는 눈물
https://www.youtube.com/watch?v=mbmZRqbK7Po
조선왕릉 5부, 청령포에 흐르는 눈물, 장릉
열두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태어난 다음 날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인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소년 왕 단종. 강원도 영월 땅에서의 유배 생활은 하루하루가 눈물이요 한숨이요 그리움이었다. 시신과 함께 강물에 버려진 채 어쩌면 영원히 묻혔을 소년왕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 곳. 장릉이다.
강원도 영월군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청령포.
단종의 유배지다. 서쪽으로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나머지 삼면은 물로 둘러싸여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출입조차 할 수 없는 곳.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유배생활을 했다. 수십년에서 수백년 된 소나무들이 들어차 숲을 이루는 송림, 이곳에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집이 있다. 어린 단종에게, 떠나온 한양은 그리움이자 두려움이었다. 언제 어떤 바람이 또 불어닥칠지 모르는, 숨죽인 하루하루가 눈물 속에 그렇게 흘러갔다.
이곳엔 수령이 600년이 넘는,유명한 소나무가 한그루 있다.
쫓겨난 어린 왕이 걸터앉아 하염없이 한양을 바라보며 한숨 지었다는 나무. 단종의 애달픈 유배 생할을 지켜보았으니 볼‘관’이요,한양을 바라보며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소리‘음’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이른바 ‘관음송’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유배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또 한차례의 단종복위사건이 발각되면서 단종은 결국 영월 관아인 관풍헌에서 사사되고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다.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 하였으나’ 영월의 하급관리였던 엄흥도가 몰래 거두어 자신의 선산에 암매장했다.
잡초에 가려 제사지내는 이도, 찾는이도 없던 단종의 묘는 그후 240년이 지난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고 모양새를 갖췄다. 장릉 경내에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과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을 기리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 급하게 잡은 터여서일까? 장릉으로 오르는 언덕은 경사가 가팔라 직접 오르기 어렵다. 정자각 뒷문을 열면 능침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나, 장릉의 경우엔 가파른 언덕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급경사의 언덕을 우회해 오른 후, 완만한 능선을 따라 걸으면 그제서야 능침이 나타난다. 능침 공간 역시 다른 왕릉과 비교해 상당히 단출하다. 왕릉의 예에 따라 삼면에 곡장, 즉 낮은 담장은 둘렀으나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추존된 왕이니만큼 병풍석도 없고 난간석도 없다.
그러나 그보다 가슴 아픈 것은 수백리 밖, 평생 그리워만 하다가 만나지 못한 정순왕후에 대한 그리움이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자 정순왕후 역시 서인이 되어 궁밖으로 쫓겨났다. 이후 여든 한 살 나이로 세상을 뜰때까지, 평생 단종을 향한 그리움으로 살다간 정순왕후.능호를 사릉이라 붙인 이유다. 다른 왕릉과는 달리 사릉은 일반 묘역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서인 신분으로 죽은 정순왕후를 거두는 이가 없자,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시가에서 자신들의 선영에 왕비를 모신 까닭이다. 사릉 역시 장릉과 마찬가지로 규모가 소박하고 석물이 단출하다. 왕릉조성 당시 대군부인의 예로 조영된 탓이다.
남양주에서 영월까지, 혹은 영월에서 남양주까지 조선 왕릉의 왕과 왕비 중 가장 멀리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 해야하는 단종과 정순 왕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래 5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조영돼 온 스물 일곱 왕과 왕비의 조선 왕릉은 장릉이 있으므로 해서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월 청령포 장릉 단종 [寧越 淸泠浦 莊陵] - 청령포에 흐르는 눈물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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