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星州 李氏, 이조년(李兆年)& 이창민(李昌民)

류지미 2022. 8. 9. 21:02

백년설 (白年雪)

두견화 사랑 1939년, 나그네 설움 1940년, 번지 없는 주막 1940년,

산팔자 물팔자 1940년, 대지의 항구 1941년, 고향설 1942년.

 

 

생애 및 활동사항

 

백년설(白年雪, 본명 :이창민 李昌民 1914년 1월 19일 ~ 1980년 12월 6일)은 대한민국가수이다.

이창민(李昌民)으로 개명하기 前 이름은 이갑룡(李甲龍)· 이갑용(李甲勇)이다.

본관은 성주 이씨(星州 李氏).

 

1915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이갑룡(李甲龍)이며, 1964년 이창민(李昌民)으로 개명했으나, 백년설이라는 예명이 잘 알려져 있다. 작사가로서는 향노(鄕奴), 이향노(李鄕奴) 등을 사용했다.

 

1928년 성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이듬해 성주농업보습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다. 이후 상경하여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한 후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한다. 1938년 문학을 공부할 목적으로 일본에 유학했으나, 고베(神戶)에서 당시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이던 박영호(朴英鎬)의 권유로 전기현(全基玹) 작곡의 「유랑극단」을 취입, 1931년 1월 가수로 데뷔해 큰 인기를 얻었다.

 

1941년 태평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체결했고 ‘나그네 설움 ’, ‘번지없는 주막 ’, ‘복지만리’ 등을 유행시키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일제는 그를 침략전쟁의 선전에 이용했다. 1942년 그가 취입한 ‘모자상봉’은 일본의 유명한 군국가요를 번안한 것이며, 지원병 선전을 위해 제작한 ‘조선해협’의 주제가 ‘조선해협’을 부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다수의 군국가요를 취입했으며, 1941년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조선연예협회와 조선악극단 후원으로 조직된 재선부대연예위문단의 일원으로 일본군 부대와 육군병원 등에서 공연했다. 1942년에는 만주건국10주년기념 만주개척촌위문연예단의 단원으로 순회공연에 참여했다. 1944년 음반제작이 중단되면서 공연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는 태평양악극단, 악단 제일선, 무궁화악극단 등의 공연단체와 무대에 서기도 했으나, 고아원 운영과 사업체 경영에 주력했다. 1950년대에는 가수와 작사가로서도 활동하면서, 1956년에는 대한레코드작가협회 감사, 평화신문사의 사업국장, 1958년에는 센츄리레코드사 문예부장 등 사업에도 관여했다. 대표곡으로는 ‘두견화사랑’, ‘나그네설움’, ‘ 번지없는 주막’,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등이 있다.

 

1958년 대한가수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지냈으며 1961년에는 한국연예협회 기획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3년에 은퇴했다. 가수인 심연옥과 결혼한 뒤, 평생 그가 추구하던 목적과 의미있는 삶의 일환으로 여호와의 증인에 귀의, 이후 연예계 관련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국제 무역을 운영하다가 1979년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족과 함께 (아내와 심연옥과의 슬하 남매 5녀, 6남) 이민을 갔으며, 약 2년 후인 1980년에 미국에서 별세했다.

 

고향 성주에 생가가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건물로 대체되었고,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의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b8EfGZobTI

 

星州 李氏(성주이씨)

 

 

경상북도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문성왕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성씨는 경주 이씨로부터 갈라져 나왔으며 시조인 이순유(李純由)는 알평의 후손으로 신라 말엽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경순왕조(敬順王朝ㆍ927~935년)에 재상(宰相)까지 올랐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이순유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 살았다고 한다.

이순유의 11세손 이장경(李長庚)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로 슬하에 다섯 아들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 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충렬왕 이후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星州李氏)라고 하게 되었다.

한편, 이천년(李千年)의 둘째 아들 이승경(李承慶)은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공적을 세워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으므로 농서 이씨 (隴西李氏)라고도 하였다. 명나라의 장수로 임진왜란조선에 들어온 이여송(李如松)이 그의 후손이다.

 

이여송(李如松, 1549년 ~ 1598년)은 명나라 말기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파견된 명나라 장군의 한사람으로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출생이다. 조선계이며 본관성주 이씨이다. 후일에 농서(陇西)의 시조가 되었다..

 

명나라로 귀화한 조선인 출신의 명나라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성량(李成樑)의 아들로서 이영(李英)의 5대손이다. 이영은 이천년(이조년의 친형)의 아들 이승경이 원나라에서 벼슬한 까닭으로 이영이 원나라에 정착해 명이 세워진 후에도 대대로 살게 되었다. 이여송의 계보는 이장경-이천년-이승경-이영-이문빈-이춘미-이경-이성량-이여송

 

안산영당(安山 影堂) 농서군공(隴西郡公) 신도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41

 

 

문열공 이조년 [文烈公 李兆年 1269 ~ 1343]

 

본관 성주(). 자 원로(). 호 매운당() ·백화헌(). 시호 문열().

 

1294년(충렬왕20) 안남서기(安)와 예빈내급사()를 거쳐 지합주사() ·비서랑()을 역임하였다. 1306년 (충렬왕32) 비서승() 재임 중, 1306년 왕유소()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 왕전()을 충렬왕 후계로 삼으려 하자, 최진(崔)과 충렬왕을 보필했다. 충숙왕의 사촌형인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가 왕위 찬탈을 도모하자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서 중서성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1330년 충숙왕 귀국 후 감찰장령()이 되고 전리총랑()을 거쳐 군부판서(簿)에 승진, 수차례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에 오르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왕의 음탕함을 간하는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사직했다. 후에 성근익찬경절공신()이 되었다. 공민왕 때 성산후()에 추증,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이화에 월백하고

봄밤의 서정을 노래한 이조년의 시조. 다정가(多情歌)라고도 한다. 고시조집 《해동가요(海東歌謠)》와 《청구영언(靑丘永言)》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에 실려 전한다. 고려말의 문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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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년(李兆年)의 다정가(多情歌)


이화()에 월백() 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의 묘는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 산 60에 위치한다.

 

 

이조년 [1269(원종 10)∼1343(충혜왕 복위 4)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시호 문열(文烈)

증조는 이효참(李孝參) ,조부는 이득희(李得禧), 아버지는 성주이씨 중시조인 성산부원군 이장경.

 

이조년(李兆年)은 성주이씨(星州李氏)

11代孫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의 다섯째 아드님이다.

백년(百年 밀직공파) 천년(千年 참지공파) 만년(萬年 시중공파) 억년(億年 유수공파) 조년(兆年 문열공파) 5형제는 성주이씨 파조들이다.

12세손 : 조년(兆年); 예문관대제학() 성산군, 문열공

13세손 : 포(褒) ; 검교시중, 성산군, 경원공

14세손 : 인복(仁復)ㆍ인임(仁任)ㆍ인미(仁美)ㆍ인립(仁立)ㆍ인달(仁達)ㆍ인민(仁敏)

 

고려말에 이름을 떨쳤던 인복(仁復)ㆍ인임(仁任)ㆍ인민(仁敏)은 이조년의 손자요, 조선개국공신에 영의정을 지낸

15세손 이직(李稷)인민(仁敏)의 아들이다

 

부인은 초계 정씨(草溪 鄭氏)로 감찰대부(監察大夫) 윤의(允宜)의 딸이다. 아들은 하나인데, 이름은 포(褒)로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 上護軍)이다. 손자는 7명인데, 큰 손자가 바로 인복(仁復)으로 우부대언 좌간의대부(右副代言 左諫議大夫)다. 일찍이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후세에 배출된 대표적인 영남학파 퇴계 이황, 남명 조식선생등이 이조년의 후학들이다.

그는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시조 "다정가" "백화헌"등이 ,<해동가요> <청구영언><병와가곡집>에 실려 전하고 있다.

 

이조년(1269∼1343)

1294년 진사로 급제하여 안남서기, 예빈내급사, 지합주사, 비서랑을 지냈으며 1306년 비서승으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로 갔다가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음.

그 후 풀려 나와 고향에 은거하다 다시 벼슬길에 올라 원 명나라를 내왕하며 국가에 큰 공을 세웠고,

감찰장령, 전리총랑, 판전교시사, 군부판서,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성근익찬경절공신등의 벼슬을 지냈다.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성산군(星山君)의 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충언을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사직하고 고향 경산부(지금의 성주)로 내려와 서원을 개원 후학을 기르는데 여생을 바쳤다.

 

 

(이조년의 묘와 서원 :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 흑수 소재 매운당 그리고 대평사, 서당).

 

이직(李稷, 1362-1431) 오로시(烏鷺詩)

이조년(李兆年)의 증손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우정(虞庭), 호는 형재(亨齋). 시호: 문경(文景).

증조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이고,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李褒)이며, 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이인민(李仁敏)이다. 고려말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조카이다.

 

1377년(우왕 3) 16세로 문과에 급제, 경순부주부(慶順府注簿)에 보직되고 1386년 밀직사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을 거쳐 공양왕 때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지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에 참여한 공로로 개국공신 3등으로 성산부원군이 되었고, 1393년(태조 2) 도승지 ·중추원학사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5년 황희(黃喜)와 충녕대군(忠寧大君: 世宗)의 세자책봉을 반대하여 성주에 안치되고,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1424년 영의정, 1426년 좌의정에 전직, 이듬해 사직하였다.

 

 

이직(李稷, 1362-1431)의 오로시(烏鷺詩)

 

가마귀 검다 하고 백로(白鷺)야 웃지 마라.
것치 검은들 속조차 거믈소냐.
아마도 것 희고 속 검을손 너뿐인가 하노라

 

 

고려 유신으로서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된 이직이 자신의 처세를 변호한 노래이다.

이 시에서는 구차하게 연명하면서 남을 비방하는 무리를 비유적으로 힐책하고 있으며, 작자 자신의 결백을 변호하고 있는 노래이다.

 

시비공원에는

문열공 이조년 [文烈公 李兆年],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 도은 이숭인 등

17인의 시비가 있다.

 

봉산재(鳳山齋)와 성주 이씨 시비공원(星州李氏 詩碑公園).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성주역사 테마공원 내에는

성주읍성(星州邑城), 성주사고(星州史庫), 성주이씨 시비공원(星州李氏 詩碑公園). 봉산재(鳳山齋) 등이...

 

봉산재(鳳山齋)는

성주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이

백년,천년, 만년,억년, 조년 등 다섯 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가문을 번창하여 후손들이 그 유업을 기리기 위해 중건했다.

 

 

梨花月白三更天 (이화월백삼경천)

啼血聲聲怨杜鵑 (제혈성성원두견)

陳覺多情原是病 (진각다정원시병)

不關人事不成眠 (불관인사불성면)

 

 

다정가(多情歌)

 

하얀 배꽃 밝은 달빛,

은하수는 한밤인데 아직 남은 푸른 내 맘,

소쩍새가 어찌 알까 정 많음이 병이라서,

잠 못 들고 뒤척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