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만든 조선인 천재 음악가 정율성

류지미 2022. 8. 9.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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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2.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만든 조선인 천재 음악가 정율성

입력 2011. 11. 21. 10:11 수정 2011. 11. 21. 10:11

 

[하나의 불씨, 중국을 태우다/ 중 공산당 90주년, 마오를 다시 말한다]

[미디어오늘 현이섭·언론인]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굽이굽이마다 큰 격랑의 물결이 출렁일 때 어김없이 나타나는 게 간당(奸黨)의 출현이다. 이들은 음습한 권력에 기생한다. 역설적으로 권력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이들은 권력의 주구로 온갖 간악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인면수심의 저승사자들이다. 정풍운동에도 그러한 간당이 출현했다. 중국공산당에서 최대의 간신이자 대 음모가로 비난받고 있는 캉성(康生 강생)의 등장이다. 정풍운동을 전후로 정보업무를 관할하는 사회부장을 맡고 있던 캉성의 손끝에서 수없이 많은 고귀한 인명이 사라졌다. 중국 공산혁명을 통한 조국의 독립투쟁을 벌였던 조선인 김산(본명 장지락)도 자신의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캉성의 독수(毒手)에 걸려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역에서 스러졌다. 정풍운동에서 온갖 패악을 일삼은 캉성의 악독한 술수는 20여 년 후 벌어지는 중국 현대사의 대재앙이자 최대의 비극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 때 만행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캉성은 1903년 산둥성(山東省 산동성)의 지역유지 집안에서 태어났다. 상하이 대학을 졸업한 캉성은 저우언라이가 지휘한 1926년의 상하이 폭동에 참여했다가 192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대혁명 실패 후 장쑤성(江蘇省 강소성)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1년 1월 샹중파(尙忠發 상충발)가 총서기가 되었으나 노동자 출신으로 지적수준과 조직능력이 떨어져 중공중앙 비서장 겸 선전부장인 리리산(李立山 이립산)이 실권을 장악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가라는 외피를 걸친 캉성은 리리산을 적극 추종해 비서장 직을 꿰찼다.

 

이 자리는 당내의 권력관계를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어 캉성은 비서장 직을 누구와 손잡는 것이 유리한지 등을 저울질하는 지렛대로 삼았다. 캉성은 1933년 7월에서 1937년 11월까지 4년여 동안 모스크바에서 왕밍의 조수로 있으면서 왕밍노선의 최선봉에 섰다. 1937년 겨울에 왕밍과 함께 옌안으로 귀국한 캉성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180도 바꿨다. 하루아침에 표변한 캉성은 되레 왕밍노선을 공격하는 선봉장 구실을 해 마오의 신임을 얻어 사회부장을 맡아 정풍운동의 실무를 총괄 지휘하는 업무를 하게 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 사상 최대의 간신으로 평가받는 캉성.

 

정풍운동 기간 동안 캉성은 1920연대 상하이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 강청)의 추문과 사상적 문제 등의 정보를 차단하고, 조직과 당을 속인 채 고의로 은폐해 암암리에 장칭을 비호했다.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을 하던 류샤오(劉曉 류효)와 왕스잉(王世英 왕세영)이 장칭에 관한 의심스럽고 좋지 않은 정보자료를 캉성에게 보낸바 있었다. 그 전에 마오가 장칭과 결혼할 때도 캉성은 샹잉이 보낸 장칭과의 '결혼불가'에 관한 불리한 자료를 숨겼었다. 캉성의 이런 셈법은 미래권력에 대한 확실한 도장 찍기의 심모원계 한 권모(權謀)였다. 정풍운동에서 왕밍노선으로 의심받고 있던 '28인의 볼셰비키'를 비롯한 왕밍파 척결과 저우언라이를 물고 늘어지는 집요하고 비열한 공격과는 천양지차였다.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사람이며 전 국가주석을 지낸 양상퀀은 정풍운동 때의 캉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주석 214)

 

"캉성은 군사위원회와 군중단체를 포함한 군정당민의 정풍학습에 모두 관여했다. 대단히 열심이었고 부지런했다. 각 기관의 정황을 취합할 때 직접 기록했다. 당시는 복사기가 없었을 때였다. 그는 일일이 수첩에다 옮겨 쓴 뒤 마오 주석에 보냈다. 캉성은 중앙 직속계통에 대한 종합보고 때 덩파(鄧發 등발)과 나를 이끌고 가 함께 들었다. 캉성은 토론을 하면서 성인군자인양 행세했다. 캉성은 왕밍이 쓴 '중앙은 더욱 볼셰비키화와 투쟁을 강화하자'는 소책자를 들어 보이며 문득 깨달은 듯 이 책을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이게 완전 사기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때 마오 주석은 그를 대단히 칭찬했다. 모두들 그가 잘했다고 생각했다. 모두 그를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여겼다. 캉성은 또 교조종파주의 조직명단을 작성한다고 설쳐댔다.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명단은 누구도 내 놓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45명, 어떤 사람은 심지어 100여 명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후 이 사건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캉성은 옌안의 공산당 간부들 중에 수백 명은 국민당이 공산당에 침투시킨 특수 요원이라며 숙청의 범위를 확대하려고 광분했다. 저우언라이가 관장했던 창장국 소속 지하당은 이들이 지배하는 '홍기당(紅旗黨)'이라며 중상모략을 했다. 캉성은 이들을 '반도', '스파이', '내부첩자' 등으로 매도했다.

 

정풍운동 전후 시기의 옌안은 캉성이 무고한 조선인 청년 김산을 '일본 첩자'로 몰아 죽이고 당성(黨性))을 심사한다는 등의 빌미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옌안은 매우 어수선했다. 1937년 10월에 옌안에 온 조선인 청년 정율성(鄭律成)도 주위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이 당시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청년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와 김구 주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重慶 중경)으로 가거나 조선독립동맹을 이끌고 있는 김두봉(金枓鳳)과 무정(武亭)이 있는 옌안으로 찾아갔다.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출신의 장준하(張俊河), 김준엽(金俊燁) 등은 충칭으로 갔고, 정율성 등은 옌안으로 왔다.

 

그런가하면 박정희(朴正熙)처럼 일본이 신경(新京; 지금의 창춘)에 세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일본을 위해 복무한 사람들도 있었다. 20여 년 뒤 5.16쿠데타 때 이들이 한 몫을 했다. 옌안에 온 정율성은 루쉰(魯迅) 예술학교 음악학과를 다니다 중국인 처녀 딩쉐송(丁雪松)을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신중국 건국 후 첫 여성 대사를 지낸 딩쉐송은 1938년 봄에 정율성을 만나 한 눈에 반해 열애를 했다. 청혼은 정율성이 했다. 헌데 딩쉐송 주변의 선배와 당 간부들이 결혼을 말렸다. 조선인들이 사상적으로 복잡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율성은 옌안에 와 1939년 1월 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을 지도할 무렵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딩쉐송이 다니던 중국여자대학 부교장 커칭스(柯慶施)도 정율성과의 결혼에 부정적이었다. (주석 215)

 

"듣건대 네가 정율성과 비교적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다. 너 잘 생각해야 한다. 너는 우수한 젊은 여성이다. 앞날의 전도가 밝다. 당이 너를 키워줬다. 너는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조선 사람의 상황이 상당히 복잡하다. 너와 정율성의 관계가 대단히 안타깝다."

 

정율성은 이때 이미 천재적인 음악성을 발휘해 '옌안송(延安頌 연안송)', '8로군대합창(八路軍大合唱)' 등을 작곡해 옌안 고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딩쉐송은 번민의 나날을 보내다 8로군 포병단 단장 무정이 전방에서 옌안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딩쉐송은 일찍이 여자대학 부교장 커칭스가 "무정은 2만5천리 장정에 참가해 생존한 조선(朝鮮)동지다. 당이 그를 대단히 신임한다"는 말을 들은바 있었다. 무정은 정율성을 무척 좋아했다. 막내 동생으로 여겼다. 무정은 두 사람의 순탄치 않은 연예관계를 듣고 딩쉐송을 찿아 왔다. 무정은 딩쉐송에게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며 이렇게 자문했다.

 

"율성을 잘 안다. 뿐만 아니라 율성의 큰형과 둘째 형을 알고 있다. 정율성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의 집안은 혁명가의 가정이다. 나와 율성의 둘째 형은 한 지부에서 조직생활을 한일도 있다."

 

딩쉐송은 용기를 얻어 당 중앙 조직부에 찾아가 정율성과의 결혼 가능성 여부를 물어보기로 했다. 때마침 조직부장 천윈(陳雲)이 있었다. 딩쉐송은 천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조직의 의견을 구하고자 합니다. 정율성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습니까?"

"지금까지 어떤 자료에도 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없다. 그러나 역시 어떤 자료에도 그가 문제가 없다고 증명할만한 자료도 없다."

"변계지구 회의에 참석하는 자리에서 우연히 무정 동지를 만났습니다. 그가 정율성의 집안을 잘 알고, 정율성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 그래?"

"저와 정율성이 교제한지 벌써 3년이 됐습니다. 서로 좋아합니다. 그와 결혼해도 괜찮은지 조직의 지시를 바랍니다."

 

신중국 건국 후 첫 여성 대사를 지낸 딩쉐송과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 부부.

 

천윈은 딩쉐송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너희들이 이미 결정했는데 조직에서 간섭할 수 없다”고 했다. 정율성과 딩쉐송은 마침내 1941년 12월에 팔로군이 주둔하던 동굴에서 결혼.백년가약을 맺었다. 정설송은 항일운동가로 국무원 외사판공실 비서장, 대외우호협회 부회장을 거쳐 중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네덜란드와 덴마크 주재 대사를 지냈으며 초대 총리인 저우언라이의 양녀이기도 하다.

 

정율성은 1914년 전라남도 광주 양림정(楊林町)의 선비 집안에서 5남5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들 형제자매 중 5명이 요절해 4남1녀가 됐다. 아버지 정해업(鄭海業)은 일본이 한일병탄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와 은거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정해업은 자식들에게 일본의 노예교육을 받지 않도록 하기위해 집안살림살이를 절약하면서 모두 사립학교에 보냈다. 정율성의 첫째, 둘째 형인 정효룡(鄭孝龍))과 정인제(鄭仁濟)는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의 체포령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이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큰 형 정효령은 국내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1934년 감옥에서 병사했다. 둘째 형 정인제는 윈난 강무학당을 졸업한 뒤 국민혁명군 24군(川軍 천군) 중교(中校) 참모로 근무하다 뇌막염으로 세상을 떴다.


부형(父兄)의 영향을 받아 침략자 일본을 증오한 정율성은 어린 나이인 15살 때 전주 사립 신흥중학교를 다니다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정율성의 매형 박건웅(朴健雄)은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북벌전쟁에 참여한 바 있다. 그는 1932년 장제스의 지원으로 난징(南京 남경) 교외에 세운 조선 독립투쟁 단체인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교장으로 있는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의 교육 주임으로 있었다. 정율성은 의열단원인 셋째 형 정의은(鄭義恩)을 따라 1933년 5월 8일 고향산천을 떠나 난징의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들어갔다. 동기생 55명과 함께 군사, 정치 등 방면의 교육을 받았다. 나이 어린 이들은 여가시간엔 비장하고 강개한 ‘소년선봉대’, ‘최후의 결전’, ‘적기가’, ‘코민테른가’ 등의 노래를 불렀다. 정율성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침식을 잊고 세계명곡의 음반을 들었다. 마음을 격앙시키는 혁명가곡을 즐겨 부르며 가슴 가득한 열정을 발산했다. 1934년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졸업한 동기생 대다수는 만주벌판으로 독립투쟁을 하러 달려갔다.


정율성은 난징군사학교에 들어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지시로 난징과 상하이간의 일본인 전화를 도청하는 비밀공작을 했다. 김원봉은 정율성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주말에 상하이에 가서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신분을 은폐하는 수단으로도 작용했다. 매주 난징에서 상하이로 가 외국 교수인 커리눠와(克利諾娃)에게 성악을 배웠다. 교수는 정율성이 천부적 음악성을 갖고 있다면서 이탈리아에 가 공부하면 ‘동방의 카르소(이탈리아의 유명한 성악가)’가 될 수 있다고 칭찬했다. 그는 정율성에게 학비를 받지 않는 대신 한 다발의 꽃이면 족하다고 했다. 이탈리아로 가 음악공부를 하면 대성할 것이라고 권유하며 현지의 친지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음악에 빠진 정율성이 난징의 진보청년들이 만든 ’5월문예사‘ 에 참여해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려 지내자 김원봉은 지원을 끊었다. (주석 216)


루거우차오(盧溝橋 노구교) 사건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이 전면 확대되자 정율성은 옌안으로 가기로 했다. 그는 상하이 8로군 판사처에서 판한녠(潘漢年 반한년)이 써준 소개장을 갖고 등에 바이올린과 만다린을 걸머메고 상하이를 떠나 1937년 10월에 옌안에 도착했다. 정율성은 싼베이(陝北 섬북)공학에 들어가 졸업한 뒤 루쉰예술학원 음악과에 들어가 공부했다. 이때 딩쉐송을 만난 것이다. 1938년 봄에 작곡한 ‘옌안송’은 조선인 청년 정율성을 일약 유명 음악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정율성은 1939년 7월 공무(公木 공목)와 ‘8로군 대합창’을 만들었다. 그 중 그가 작곡한 ‘8로군 행진곡(八路軍進行曲)’이 유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 노래는 내전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곡명을 바꾸었다가 1988년 7월 25일, 당 중앙이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로 개명해 지금까지 널리 불리고 있다.

 

조선인으로 중국과 북한에서 군가를 지어 널리 보급한 음악가 정율성.

정율성은 1946~1949년 북한에서 북한 공식 군가인 ‘조선인민군 행진곡’, ‘동해어부’ 등의 노래를 작곡했다. 그는 중국과 북한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해 세계에서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한국전쟁 당시 저우언라이의 요구로 김일성은 정율성을 중국으로 파견했고 중국으로 귀화한 정율성은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노동민요와 소수민족의 노래 등을 채록하면서 수없이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수년 동안 창작 권리를 박탈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76년 12월 7일 베이찡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숨져 바바오산 혁명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국가주석을 지낸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은 정율성의 추도식에 참석해 그의 생전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정율성은 훌륭한 동지다. 그는 린뱌오(林彪 임표)와 ‘4인방’을 원수같이 대해 애증을 분명히 했다. 옌안시기에 그의 노래는 최고였다. 그는 중국인민의 해방사업과 혁명투쟁에 아주 큰 공헌을 했다.”


작곡가 정율성은 신중국 건국의 100대 영웅으로 뽑혀 지금도 중국인민의 숭앙을 받고 있다.

 

214) 延安整風 ; 康生讓衆人寫名單追究敎條宗派幕後組織 楊尙昆 人民網 文思頻道

215) 作曲家 鄭律成 丁雪松 等著 遼寧人民出版社

216) 作曲家 鄭律成 丁雪松 等著 遼寧人民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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