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성주가 낳은 인물들…왕실도 찜한 吉地…퇴계와 남명 학문 아우른 '스타강사' 배출

류지미 2022. 8. 10. 13:41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성주가 낳은 인물들…왕실도 찜한 吉地…퇴계와 남명 학문 아우른 '스타강사' 배출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입력 2021-08-13 | 발행일 2021-08-13 제35면 | 수정 2021-09-03 08:38

  • 전국에 남아 있는 스무여 곳 태실 중 성주의 세종 왕자 태실이 가장 크고 빼어나다. 태실은 생명력을 부여한 태를 소중히 관리함으로써 무병장수와 복이 깃든다 하여 길지에 만들었고 삼국사기에 김유신 장군 태묘를 충북 진천에 만들고 태령산이라 명명했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부터 왕실과 귀족 집안에서 조성했다. 우리 고유문화로 태를 담은 분청사기가 국보로 지정되기도 했다.

성주는 성산가야 옛 땅으로 가야산 정기를 받아 옛날부터 큰 인물이 많이 나왔다. 벽진, 성산, 경산(京山) 등으로 부르기도 했고 조선시대에는 화원 설화부터 추풍령 어모까지 25개 역을 관장했다. 이름에 주(州)가 들어간 고을답게 산세 수려하고 큰 강이 고을을 적시는 명산대천의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퇴계와 남명의 수제자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 '양강'
낙동강 중류 학문 '낙중학' 정립
동강 7세손 훗날 독립운동 巨木
'예학 대가' 한강, 제자들 줄이어

양반가 기품 흐르는 한개마을
'따로 또 같이' 지혜 담긴 돌담
사도세자 호위무사의 忠心 북비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
한주학파 선구자 한주 이진상
아들·손자들은 독립운동 투신

노론·남인 거목의 '비밀 우정'
북비공 증손 응와 제주목사시절
유배중인 추사와 조심스레 만나
유가경전 16문장 '100분 토론'

퇴계와 남명의 수제자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는 조선중기 성주의 큰 인물로 '성주 양강'이라 불렸다. 특히 한강은 도학·경세·예학·의약·풍수 등 다방면에 통달한 영남사림의 종장으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한강 정구의 영정. 〈영남일보 DB〉

◆조선왕가 태실지

성주에는 세 곳의 조선왕가 태실지가 있다. 월항의 세종대왕 왕자 태실, 가천의 단종 태실, 용암 봉산의 태종 태실이다. 전국에 남아있는 스무여 곳 태실 중 성주의 세종 왕자 태실이 가장 크고 빼어나다. 태실은 생명력을 부여한 태를 소중히 관리함으로써 무병장수와 복이 깃든다고 하여 길지에 만들었고 삼국사기에 김유신 장군 태묘를 충북 진천에 만들고 태령산이라 명명했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부터 왕실과 귀족 집안에서 조성했다. 우리 고유문화로 태를 담은 분청사기가 국보로 지정되기도 했다.

조선왕가는 왜 성주 땅에 왕자 태실을 만들었을까? 나라를 세운 후 형제 간 싸움으로 함흥차사와 두 번의 왕자 난을 겪은 조선왕조는 무엇보다 왕실 안녕이 절실했다. 이때 풍수가는 가야산 만수봉 이백리에 삼한의 십승지지가 숨어있고 왜구 노략질마저 미치지 못하는 복된 땅 성주를 주목했다. 게다가 경상도 젖줄 낙동강이 고을을 적시고 여말부터 큰 인물이 많이 나온 인걸지령의 땅이기에 왕실의 수복강녕 태실지로 선택했다.

세종 왕자 태실은 1438년에 문종을 제외한 19기가 조성됐다. 단종 태실은 세자책봉 후 가천 가야산 자락으로 옮겼으며 세조 태실은 귀부가 있어 우람한 모습이고 선석사가 수호사찰이며 사적으로 지정됐다.

한강 정구는 대가천의 아름다운 경승지 아홉에 무흘구곡이라 이름짓고 수륜 갓말(지촌)에 세거했으며 회연서원은 그 본산이다.

◆고려말 권신 이인임

고려왕조는 몽골의 백년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개혁하려고 몸부림치다가 40여 년 만에 이성계에게 멸망하는데 그 혼돈의 시대에 30년간 권세를 누리다가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인물로 성주 출신 이인임이 있다. 다정가 '이화에 월백하고'를 지은 이조년의 손자이며 도은 이숭인의 당숙이고 고려·원나라 과거에 모두 급제한 신진사류 이인복의 동생이다.

신돈의 개혁 정치에 앞장섰고 공민왕 피살 후 우왕 옹립을 주도하여 실질적 섭정으로 군림했다.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을 귀양 보냈고 이성계도 세력을 넓히고자 그의 집안과 혼인을 맺었다. 조카는 이성계 사위가 되고 손녀는 이방원의 후궁이 됐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그해 최영·이성계 연합세력에 일격을 당해 성주이씨 백년 영화는 저물고 그는 향리 성주로 유배돼 생을 마감한다. 조선 건국세력은 그를 '권신'이라 하여 역사에서 지운다.

조선건국 후에도 이인임과의 악연은 계속된다. 이른바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으로 명나라 주원장 유훈록인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기재돼 있어 이를 바로 잡는데 이백년 세월이 걸렸다. 태조 때 이 사실을 발견하고 왕가혈통 문제로 역대 왕들이 바로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선조 때 비로소 고쳐졌다. 이때 안동의 충재 권벌이 1539년 주청사로 가서 바로 잡는 데 공을 세웠고 권벌은 영의정으로 추증된다.

심산 김창숙. 동강 김우옹의 7세손이며 독립운동의 거목으로 전국 유림대표를 지낸다. 안동 혁신 유림이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펼칠 때 심산은 국내와 상하이를 오가며 독립운동하다가 14년 옥고를 치렀고 광복 후 성균관대를 설립했다.

◆성주 양강과 낙중학

조선 중기 성주의 큰 인물로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가 있다. 아호를 따 '성주 양강'이라 부르는데 동시대에 태어나 친교가 매우 두터웠고 동강은 벼슬로 한강은 학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동강은 남명 조식의 외손서(외손녀의 남편)였고 한강은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이다. 두 사람 모두 대가면에서 태어나 큰 인물이 난 곳이라는 대가(大家)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됐다.

남명과 퇴계 문하에서 함께 글을 배워 동강은 27세에 대과 급제로 출사했고 한강은 훗날 '유일(遺逸·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추천하는 인재 등용책)'로 천거됐다. 이들 학문을 낙동강 상류의 퇴계학, 하류의 남명학과 더불어 낙동강 중류의 학문으로 낙중학(洛中學)이라 칭했고 둘 다 안동부사와 대사헌을 지냈다. 동강은 서애보다 일년 늦게 급제하여 승승장구하였으나 기축옥사에 연루돼 함경도 회령에서 3년 귀양살이해 정승이 되지 못했다.

동강은 훌륭한 후손으로 빛을 더했고 한강은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다. 동강의 7세손이 독립운동의 거목으로 전국 유림대표를 지낸 심산 김창숙이다. 안동 혁신 유림이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펼칠 때 심산은 국내와 상하이를 오가며 독립운동하다가 14년 옥고를 치렀고 광복 후 성균관대를 설립했다.

한강은 도학 경세 예학 의약 풍수 등 다방면에 통달한 영남사림의 종장이다. 특히 예학이 뛰어나 김장생과 더불어 예학의 대가로 꼽혔고 영남사현으로 문묘배향에 추진되기도 했다. 현풍 도동서원에서 강론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중 미수 허목·석담 이윤우·낙재 서사원이 돋보인다. 허목은 거창군수인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로 왔다가 한강의 제자가 됐고 기호남인의 영수가 되어 이익 안정복 이가환으로 학맥이 이어졌다. 이윤우는 그의 손자 이원정이 이조판서가 되어 숙종조 환국정치를 이끌었고 서사원은 공산 의병장으로 금호강 선비문화를 만들었다.

한강은 대가천의 아름다운 경승지 아홉에 무흘구곡이라 이름 짓고 수륜 갓말(지촌)에 세거했으며 회연서원이 본산이다. 동강을 배향하는 청천서원과 이현일이 쓴 신도비, 심산 생가는 대가에 있다. 훗날 제자들 사이 경쟁을 '청회시비'라 부르기도 했다.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다. 한개마을은 돌담길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돌담이 높고 많은 것은 성산이씨 일족이 모여 살지만 사생활 보호를 위해 독립 공간을 영위하려는 선비의 지혜다. 응와종택의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북쪽으로 난 사립문인 북비가 있다. 〈영남일보 DB〉

◆한개마을 인물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마을 전체가 문화재인 곳은 하회, 양동, 외암마을 등이다. 한개마을은 돌담길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돌담이 높고 많은 것은 성산 이씨 동성마을로 일족이 모여 살지만 사생활 보호를 위해 독립 공간을 영위하려는 선비의 지혜다. 영취산의 품 안에서 기와와 초가가 켜켜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 같은 깔끔한 전통마을로 응와종택 한주종택 교리댁 월곡댁 극와고택 등이 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응와종택에 들어서면 우측에 북비라는 작은 문이 있고 너머 북비고택이 있는데 사도세자와 관련 있다. 북비고택의 주인 돈재 이석문은 사도세자 호위무관이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굶겨 죽이는 임오화변 때 세손(훗날 정조)를 들쳐 업고 국문 현장인 창덕궁 휘녕전으로 내달린 인물이다.

삭탈관직 당하고 낙향하여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문을 북쪽으로 냈다고 '북비(北扉)'라고 일컫는다. 비(扉)는 문짝이다. 훗날 정조가 영남은 내가 믿는 곳이라 하며 수많은 영남인재를 발탁한 것은 열 살 세손시절 자기를 업고 내달렸던 돈재의 따뜻한 품 안에 대한 보은인지 모르겠다. 북비공은 병조참판으로 추증되고 곽종석이 쓴 신도비가 언덕길 아래 세워져 있다.

북비공 증손이 응와 이원조다. 18세에 대과 급제해 안동김씨 세도치하에서 경주부윤까지 올랐고 대원군의 사색인재 등용 시 한성판윤, 공조판서를 제수받았다. 숙종조 갈암 이현일 이후 여섯 임금의 치세를 거친 뒤 170년 만에 영남판서가 된 인물이다.

한주 이진상은 한개마을이 낳은 영남의 큰 인물로 고택이 마을 제일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성리학의 대학자로 퇴계학파를 계승하면서 시대 흐름에 맞는 새로운 학맥 한주학파를 탄생시켰다. 학문은 곽종석 장석영 등 주문팔현으로 이어지고 뜻은 아들 이승희 손자 이기원 이기인을 통해 독립운동의 길로 나아간다. 그가 머물며 강론을 펼쳤던 한주정사는 종택과 이웃하고 있으며 조선선비의 고졸한 기품이 느껴지는 곳이다.

한주 이진상은 한개마을이 낳은 영남의 큰 인물로 퇴계학파를 계승하면서 시대 흐름에 맞는 새로운 학맥 한주학파를 탄생시켰다. 그가 강론을 펼쳤던 한주정사는 조선선비의 고졸한 기품이 느껴지는 곳이다.

◆응와 이원조와 추사 김정희

응와 이원조는 제주목사 경주부윤 등 여러 곳의 지방관을 지냈는데 제주목사 시절의 치적이 돋보인다. 제주목사 2년8개월 동안 추사 김정희가 대정현에서 내내 귀양살이했고 이백여년 전 영창대군 사사를 반대하여 광해군에게 미움받아 10년 유배당한 동계 정온의 흔적이 대정에 남아 있었다.

응와는 제주오현으로 추앙받는 동계의 적거지에 '동계정온 적려유허비'를 세우고 비문을 썼다. 응와는 비문에 동계의 외손임을 밝혔다. 응와의 선대 할머니가 거창의 초계 정씨 동계집안에서 한개마을로 시집온 듯하다. 이듬해 송죽사라는 동계 사우(祠宇)를 세우는데 상량문은 응와가 짓고 현판은 추사가 썼다.

추사집안과 동계집안은 역사적으로 인연이 있다. 추사 부친 김노경이 경상감사 시절 동계 후손 정희량의 난으로 초계 정씨 위토가 적몰되어 실직 이조참판이고 증직 영의정인 동계 제향마저 올리지 못할 적에 영남유림의 집단 소청으로 김노경은 적몰된 위토를 문중으로 돌려주어 초계정씨가 동계 제향을 받들고 반가 위상을 되찾도록 해 주었다. 그 고마움을 응와는 알고 있었다.

나이는 추사가 6살 위였지만 과거는 응와가 10년 앞섰다. 추사는 경주 김씨 훈척가문으로 병조참판을 지냈고 금석문과 서예 대가였다. 응와는 퇴계학파 대산 이상정과 입재 정종로로 이어지는 퇴계 적통에서 수학했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영남의 큰 인물로 오십대 전성기였다. 노론과 남인의 두 거목의 만남은 역사 속의 조우였다. 세상이 알까봐 조심스러웠지만 둘은 유가경전 상서(尙書)의 16문장에 대해 논변을 펼쳤다고 전한다.

유허비는 잘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동계 사우 송죽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훼철되어 현판과 함께 사라졌다. 제주도는 이곳을 추사 유배지라 하여 제주 올레길 집념의 길로 명명하고 동계 추사 응와 세 역사적 인물의 자취를 기리고 있다.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