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성주 역사 지리

류지미 2022. 8. 10. 14:32

 

 

嶺南의 石火星, 星州 伽倻山

영남의 석화성, 성주 가야산

 

가야산의 동쪽(성주 수륜)에서 본 가야산 정상...

칠불봉(七佛峰 우측 1433m, 경북 성주군 가천면)

상왕봉(象王峯1430m, 경남 합천군 가야면)의 불꽃 형상

 

선석산 태봉바위에서 조망한 성주분지.

비닐 하우스로 뒤덮인 '성주 참외' 농업단지와 좌측으로 멀리 가야산...

 

소년이 태어나 뛰어 놀던 동네는 선석산(禪石山)~ 가야산(伽倻山) 중간에 위치한다.

 

 

그리운 고향마을 와룡(臥龍) 뒷동산에 오르면

남동으로 성주의 안산(案山)인 별뫼-성산(星山383.4m), 남서로 가야산(伽倻山 1433m)이

북으로 백마산(白馬山, 716.2m), 금오산( 金烏山 ,977m),

북동으로 영암산(鈴岩山 784m), 선석산 (禪石山742m)맥이 흐른다.

 

 

 

 

성주읍기(邑基)의 진산(鎭山)은 성주 북쪽 9리에 있는 인현산(印懸山 185m)이고

안산(案山)은 성주 동쪽 8리에 있는 성산(星山 398m)으로 그 정상에는 봉수대를 설치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성주 봉수조, 「여지도서」성주 산천조).

 

성산(星山)은 별뫼로 별을 관찰하는 산이다.

 

 

* 아래 [개요.역사]는  나무 위키에서 전재함 

개요

경상북도 남서부에 있는 군. 인구는 2022년 8월 기준으로 약 4만 3천명.

동쪽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서쪽은 김천시[5]경상남도 거창군[6], 남쪽은 고령군경상남도 합천군, 북쪽은 김천시[7] 일부와 칠곡군과 맞닿아 있다.

성주 이씨성산 이씨[8], 성주 배씨성주 도씨는 이 지역을 본관으로 하며, 집성촌도 있다. 정도전에 나오는 이인임이 바로 성주 이씨. 실제로 이 지역 출신이기도 하다. 또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이씨가 있는데, 벽진면을 본관으로 하는 벽진 이씨가 있다. 그 외에 조선 개국 공신 배극렴도 성주 배씨이며, 역시 성주군 출신이다. 근소한 차이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김씨보다 이씨가 더 많은 동네이다.

2016년, 주한미군의 미사일방공시스템인 THAAD가 성주읍에 위치한 성산포대에 배치된다고 발표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초전면 소성리 롯데 스카이힐 C.C 골프장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 롯데 스카이힐 C.C 골프장 및 진입로는 사드운송차량이나 군인 등을 제외하고는 전면 출입이 금지되었다.

 역사

고대 가야 연맹 중 하나이자 성산가야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벽진국이 있었다. 여기서 '벽진(碧珍)'이란 단어는 고대 가야어 '볏(별)돌'을 음차한 단어다. 그래서 그런지 성주에는 별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성주읍과 용암면 사이에 위치한 고개를 '별티(星峴)'라고 부르며, 마을 사람들의 도덕심이 좋다는 데에서 유래한 '덕성동(德星洞)', 별을 보고 점을 쳤다는 데에서 유래한 '복성동(福星洞)' 등과 같은 자연부락 지명이 대표적이다.

성산가야가 신라에 정복된 이후에는 본피현(本彼縣), 적산현(狄山縣)이 설치되었고, 경덕왕 때 각각 신안현(新安縣), 도산현(都山縣)으로 고쳐졌다. 통일신라 때에는 9주 5소경강주에 속했는데, 경북 다른 지역이 대부분 상주, 양주 관할인 것과 달리 지금의 경상남도 쪽 행정구역에 붙인 것이다. 강주 지역이 대부분 옛 가야 소국들이 있었던 땅이기에 그 쪽에 연관시켜 편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가 있던 옆동네 고령 역시 강주에 같이 들어갔고, 낙동강 건너 편 대구부터는 당시 양주였다.

후삼국시대에는 여러 호족들이 할거했는데, 이 중 벽진의 호족인 이총언이능일이 두각을 나타내어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특히 이능일은 조물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지금의 성주군이 되는 지역을 경산부로 합쳐 승격할 단초를 마련했고, 이총언은 성주 지방에서 도처 도적들의 노략질을 막는 등 치안에도 힘써 KBS 사극 태조 왕건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이능일의 성산 이씨와 이총언의 벽진 이씨가 과거 남매 간에 갈라진 집안이라 들었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유추해 보면, 성주에 본관을 둔 이 두 가문은 성주육이씨 중에서도 가까운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성주에는 두 이씨가 있는데 하나는 벽진장군 이총언(李悤言)의 후예며, 다른 하나는 사공 이능일(李能一)의 후예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까지도 성산이씨와 벽진이씨는 성주 지방을 양분했던 유력 가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조 왕건에서 이총언은 백제의 침략을 막아내는 역할로 나오는데, 견훤의 아들 신검이 이총언의 벽진을 공격하는 본 에피소드에서 공교롭게도 신검 역의 이광기 씨가 하필이면 벽진 이씨의 시조 이총언의 후손이어서 이 장면이 방영된 후 문중 어른들에게 "어찌 새파란 후손이 시조어른을 공격하느냐!"며 꾸지람을 받았던 해프닝이 있었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이총언이 노략질을 막아내었다는 기록에서 창작된 일화로, 신검의 속물성을 나타내어 견훤이 후계 구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데 쓰인 가상의 역사다. 이총언이 기지를 발휘해 불리한 전투를 승리하고, 적이였지만 전사한 백제군 병사들의 시신을 묻어주고 승려까지 불러 명복을 빌어주는 등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전체적으로 벽진 이씨의 시조 이총언을 띄워주어 감사를 받고 있다.

이러한 본피현 등 5개 현이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한 것은 940년(태조 23년) 경이다. 1308년(충렬왕 34년) 성주라는 지명을 처음 사용하여 성주목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1310년(충선왕 2년) 다시 경산부로 환원하였다. 김종직조의제문에 나오는 그 경산부는 경산시(慶山市)가 아니라 성주가 맞다.

조선 태종 때 성주목(牧)으로 승격되면서 가리현 · 팔거현 · 화원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때 성주는 경상도에서 개간된 농토가 가장 넓었고, 제방이 많아 물이 풍부해 생산량이 많은 풍요로운 곳이었고, 대구에서 조령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왕의 태실이 3곳이나[12] 위치한 명당으로 평가 받은데다가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까지 건립되었다. 이 때문에 성주는 16세기 조선에서 경상도의 주요 군현 중에서 1위인 상주에 이어 2위까지 성장해서 경상도 5대 도시(경주, 상주, 진주, 안동, 성주) 중 하나가 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남인북인(동인)의 대학자로 이황, 조식에게서 모두 수제자로 수학한 정구(鄭逑)와 김우옹과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었고, 1558년(명종 13) 천곡서원(川谷書院)이 세워지는 등 영남학파의 한 중요한 근거지 구실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이 성주성을 점령하자, 성주 목사였던 제말과 임진왜란 3대 의병장 중 하나인 김면, 역시 유명한 의병장인 정인홍 등이 성주성 전투에서 세 차례의 격전 끝에 '성주성을 탈환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특히 난중에는 일시 경상도 감영이 성주목 팔거(현재 칠곡)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부터는 여러 역모로 오르내리는 걸 반복했다. 광해군 7년(1614) 8월에는 주민 이창록(李昌祿)이 왕의 비행과 조정을 비방한 사건으로 경상감사의 장계에 따라 목에서 강등되어 고령현에 합쳐졌고, 주민이 모두 금고형(禁錮刑)에 처해졌다가 2년 뒤인 광해군 9년 1월에 다시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되어 고령현에서 분리되었다.

인조반정 후에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으나, 인조 9년 2월에 일어난 권대진(權大進)의 모역사건에 성주인 박소(朴訴)가 연루되어 다시 성주현으로 강등되었다. 10년 후인 인조 18년에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으나, 5년 후인 인조 22년에 다시 이권의 모역사건이 일어나 성주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년 후인 효종 4년에 다시 복구 되었다.

그 후 영조 12년에 관아 소속의 관노(官奴)·관비(官婢)·읍교(邑校)가 목사 이성제를 독살한 사건이 일어나 동 10월에 다시 성주현으로 강등되었고, 10년 후인 영조 21년(1745)에 목으로 환원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동안 속현이었던 팔거현은 칠곡도호부에, 화원현은 대구부(大丘府)에 각각 이속됨으로써 가리현만 거느리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도 성주에서는 많은 서원이 설립되고 영남학파를 계승한 성리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는데, 이진상(李震相)은 그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조선 후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성주를 "산천이 밝고 수려해 일찍이 문명이 뛰어난 사람들과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논은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서 씨를 조금만 뿌려도 수확이 많다.”고 평가했다.

1906년 군 일부가 고령군에 흡수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선비가 많았던 지역답게 심산 김창숙 등을 필두로 많은 독립운동이 이루어졌으며 1919년 4월 2일에 성주 시장에서 만세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성주군은 경상북도에서는 남부에 속했지만, 경북 남부에서는 경부선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지역들이 발달되었기 때문에, 이 두 개가 지나지 않아서 주변의 김천시 - 구미시 - 칠곡군에 비하면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1979년 5월 1일 성주면이 성주읍으로 승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