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 중국 또 하나의 보물

류지미 2022. 8. 10. 14:59

중국·북한 2개국 군가 작곡 독보적

하성봉·언론인 입력 2012.01.13 08:55

 

 

하얼빈(哈爾賓)에서는 안중근(安重根) 의사 기념관 이외에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있다.

 

그곳은 ‘정율성 기념관’(鄭律成記念館)이다. 정식 명칭은 ‘인민음악가 정율성 생애사적 전시관’이다. 이름 그대로 이 곳은 정율성 음악가(1914~1976)가 살아 있을 때의 행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안중근 의사가 총으로 직접 적을 쓰러뜨렸다면 정율성 음악가는 노래의 선율로 인민해방군의 심장을 격동시켜 일본을 물리친 혁명가이다.

 

정율성 음악가와 하얼빈과의 인연은 깊다. 해방후 정율성과 중국인 부인인 딩쉐쑹(丁雪松)은 하얼빈에서 농공업생산 현장에서 일하면서 ‘흥안령위에 눈꽃 날리네’(興安嶺上雪花飄,) ‘행복한 농장’ ‘소흥안령’ 등 향토적이고 노동을 찬양하는 작품들을 남겨 흑룡강 주민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눈꽃이 날리네, 눈꽃이 날리네, 흥안령위에 눈꽃이 날리네. 눈꽃이 가져온 건설의 노래소리, 노래소리가 넓디넓은 삼림에 울려퍼지네.

눈꽃이 날리네, 눈꽃이 날리네, 흥안령위에 눈꽃이 날리네. 눈꽃에 뒤덮힌 기복이룬 삼림, 삼림은 은색의 해양을 방불케 하네.

적설에 깔린 삼림에서 솟아오르는 태양, 삼림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가. 채벌노동자들은 산위에서 영차영차 일하기에 바쁘다네.

눈치우는 차는 산마루에서 분주히 돌아다니고 트랙터와 기차도 쉼없이 달리네, 건설의 열정은 하늘을 찌르고 노동의 노래소리 멀리멀리 우렁차네.

강인한 사람들은 찬바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찬바람은 우리들의 노동의 열정을 날려보내지 못한다네. 강인한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추운 겨울은 우리들의 애국의 뜨거운 피를 식히지 못한다네.
눈꽃이 날리네, 눈꽃이 날리네, 흥안령위에 눈꽃이 날리네. 눈꽃이 가져온 건설의 노래소리, 노래소리가 끝없이 넓은 삼림에 울려퍼지네.

<‘흥안령위에 눈꽃 날리네’ (興安嶺上雪花飄,) 가사 중에서>

 

하얼빈에 정율성 기념관이 있게 된 것은 서학동(徐學東) 하얼빈 시정부 문화부 부국장과 강월화(康月華)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 관장의 공이 컸다. 서 부국장은 베이징에 거주하는 정율성 가족들과 협의해 2009년 5월 문을 연 기념관에 정 음악가의 유품들을 모두 모셔왔다.

 

쑹화장 강변에 ‘정율성 기념관’ 위치…강물의 흐름과 함께 흐르는 선율

 

정율성 기념관은 쑹화장(松花江) 강변과 가깝다. 짙은 청색 기와를 얹은 지상 2층, 건축면적 1350㎡의 규모로 하얼빈시 군사령부 바로 옆에 있다. 이곳에는 정율성 음악가의 사진과 친필 악보, 피아노, 그물과 낚시도구, 옷, 책 등 220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1933년 5월 중국으로 건너갈 당시 가져간 세계명곡전집과 레코드판이 그대로 전시돼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정 음악가의 낭만적이면서도 치열했던 일생과 그와 함께한 격동의 현대사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기념관 2층에서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정 음악가가 생전에 고향을 그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즐겨 불렀던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로 시작되는 ‘메기의 추억’이 흘러 나온다. 1933년 19살의 정율성이 중국에 와서 1976년 숨질 때까지 타향에서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 곡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게 된다.

 

중국에서 더 인정받는 조선인 음악가…‘신중국창건 100명 영웅’에 뽑혀

중국 사람에게 정율성 음악가를 물어 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실제 13억의 중국 인구중 80%이상인 10억의 인구는 정율성이 작곡한 노래를 최소 1곡 이상은 알고 있다. 정율성은 중국 국가(國歌)를 작곡한 네얼(聶耳,1912~1935)과 황하대합창을 창작한 셴싱하이(先星海,1905~1945)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음악가로 불린다. 정율성은 2009년 건국 60주년때 ‘신중국창건 100명 영웅’에 뽑혔다.

 

정율성은 일생동안 서정가곡을 포함해 군가, 합창, 동요, 영화음악 및 오페라음악을 포함한 360여 곡을 남겼다. 그중 중국이 인정하는 정율성의 최대 공로는 ‘연안송’(延安頌)과 ‘중국인민해방군군가’(中國人民解放軍軍歌) 두 곡이다. 이 두곡은 중국 현대음악사에서 큰 줄기를 형성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외에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我們多麽幸福)는 아직까지도 초등학교에서 불리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인민해방군군가’는 중국 국가(國歌) 다음의 위상을 갖고 있다. 정율성 기념관에 들어서면 대형 텔레비전 모니터에 육해공 인민해방군인들이 행진하는 영상과 함께 장중하면서도 힘찬 ‘인민해방군군가’가 흘러나온다.

 

전진,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조국의 토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짋어지고 있는, 우리는 하나의 무적의 역량. 우리는 농민과 노동자의 자제, 우리는 인민의 무장, 두려움없이, 굴복은 없다. 영특하고 용맹하게 전투해서 반동파를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마오쩌둥의 기치는 높이높이 휘날린다.

들어라! 바람이 외치고 신호나팔 소리가 울려온다. 들어라! 혁명의 노래소리 얼마나 우렁찬가! 동지들 발맞춰 해방의 전쟁터로 달려가자, 동지들 발맞춰 조국의 변강으로 달려가자,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마지막 승리를 향하고, 전국의 해방을 향한다!

(출처: ‘중국인민해방군군가’)

 

중국 정부의 정율성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다. 중국포털 사이트 바이두(百度)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정율성은 중국의 걸출한 작곡가이다. 또한 유명한 국제주의 전사이다. 그중에 인민해방군군가는 순박간결한 언어와 울림이 있으면서도 힘있고 장엄하고 호방한 곡조를 담고있다. 인민군인의 이미지를 강하게 새겼다. 인민군대의 무한한 전투품격과 산이 첩첩이 줄을 서고 바다를 뒤집는 기세를 보여준다. 진군의 나팔소리와 같이 인민군대 성장의 장대함과 인민전쟁승리의 역정에 따라서 중국인민해방군전투역량과 정치적업무의 한 구성부분이 되었다.”

 

정율성 기념관을 방문한 중국인들중 팔로군 출신의 옛 병사들은 이 영상을 보면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기념관 입구에서 “샹첸!(向前) 샹첸!(向前) 샹첸!(向前)~” 이란 곡조를 듣다보면 항일 당시의 치열성과 긴장감이 온몸에 전해온다. 중국 대륙을 삼키려는 일본에 대항해 죽음을 각오한 인민해방군들에게 이 노래는 심장의 피를 끓게 하고 곧바로 전쟁터로 달려가도록 만드는 진군의 나팔소리였다.

 

이 곡은 중국 역사의 큰 줄기와 함께 했다. 이 노래는 홍군이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베이징에 입성해 1949년 10월 1일 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할 때 불렸다.

 

정율성 음악가는 1937년 10월에 연안에 가게 된다. 이름도 본명 정부은(鄭富恩)에서 “아름다운 ’선율’(律)로 인민의 목소리를 완성(成)하겠다”란 의미에서 정율성(鄭律成)으로 고쳤다.

 

그가 ‘인민해방군군가’를 작곡한 것은 1939년 가을로 25살 때였다. 정율성은 공목(公木)과 연안에서 총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대합창>을 창작하였고 <팔로군행진곡>은 그중의 대표곡이다. 이 <팔로군 행진곡>은 1951년 2월 1일 <인민해방군군가>로 이름을 바꾸면서 가사에 약간의 변경이 있었다.

 

그 뒤 1953년 5월 1일 <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고쳤다가 1965년에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7월 25일 덩샤오핑(鄧小平)이 서명한 명령에 의해 정식으로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반포되었고 그뒤 군대의 모든 행사, 각종 집체의식 및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널리 유행중이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때도 울렸고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식때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도 울려퍼졌다. 또 매년 건국기념일 열병식 때마다 톈안먼 광장에서 들을 수 있다.

 

이와함께 중국 공산당의 혁명기지였던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 도착뒤 1년이 안된 1938년 4월 작곡한 ‘연안송’(延安頌)은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느낌으로 당시 중국 전역에서 애창됐다.

 

석양의 빛은 산봉우리 탑을 비추고, 달빛은 강가의 반딧불을 비춰주네, 봄바람은 평탄한 벌판에 불어가고, 많은 산들은 견고한 장벽을 이루었네.

아, 연안! 너 이 장엄하고 웅위한 고성(古城), 여기저기에 항전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지네. 아, 연안! 너 이 장엄하고 웅위한 고성, 뜨거운 피가 너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네.

천만 청년의 마음, 적들에 대한 원한을 품었네, 산야와 논밭의 길고긴 행렬에서 견고한 전선을 이루었네. 봐라! 군중들은 이제 머리를 들었노라, 봐라! 군중들은 이제 손을 들어올리노라. 무수한 사람과 무수한 마음, 적들에 대해 분노의 포효를 하고 있네. 사병들은 총구를 겨냥하고, 적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네.

아, 연안! 너 이 장엄하고 웅위한 성벽, 견고한 항일의 전선을 구축하였고 너의 이름을 만고에 남길 것이며,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리!

<‘연안송’(延安頌)에서)

=>연안송 듣기 http://www.gzhsjyw.com/ewebeditor/uploadfile/music/yas.mp3

 

‘연안송’은 발표뒤 옌안(延安) 뿐만 아니라 항일 기지는 물론이고 전국으로 퍼지면서 피끓는 젊은 청년들을 연안으로 끌어들이는 촉발제가 됐다. 연안송은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고 있다. 이 작품에는 서양의 서정성과 한민족의 음악 특징이 유기적으로 조화되어 중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실제 연안송은 요즘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K팝’과 같은 인기를 당시 중국대륙에서 누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연안은 혁명의 근거지였고 연안송은 혁명의 의지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또한 연안에서 전국 각지로 번지면서 젊은 청년들이 연안으로 모여드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불렀던 것이 연안송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율성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정율성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은 ‘만약 군중들의 노랫소리가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면 정율성은 바로 한 점의 불씨였다. 그가 가는 곳은 바로 불같이 일어나는 노랫소리에 불을 당기는 지점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중국포털 바이두에서>

 

하얼빈 ‘정율성 기념관’에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실내 계단에 이르면 ‘연안송’이 흘러나온다. 계단 옆의 벽에는 당시 토굴속에서 어렵게 생활했던 옌안의 풍경이 재현돼 있다.

 

혁명중 부인과 애뜻한 ‘러브 스토리’…바이올린 팔아 살린 딸 이름도 ‘샤오티’

 

정율성 음악가는 1938년 옌안(延安) 루쉰(魯迅)예술학교 음악학부에 입학하면서 딩쉐쑹(丁雪松)과 인연을 맺게 된다. 딩쉐쑹은 1938년 옌안 여자대학에 입학하였고 학교구락부 주임을 맡고 있었다. 정율성은 당시 팔로군 여전사였던 딩쉐쑹의 책상에 들꽃을 꽂아놓고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 책과 ‘작은 여전사에게-정율성’이라 적은 쪽지를 놓아두는 방식으로 연심(戀心)을 표시한다. 책을 받은뒤 딩쉐쑹의 마음이 흔들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얼빈의 정율성 기념관에는 당시 딩쉐쑹이 사용한 책상위에 당시의 책, 들꽃이 놓여져 있다.

 

“연주를 할 때 그의 프로그램은 아주 특별했다. 철사로 입앞에 하모니카를 고정시켜서 불고 만돌린을 안고 켜면서 발 아래는 타악기(북)를 치면서 한 개의 몸이 세가지 악기를 다루고 있었다. 어떤 때는 고음의 노래를 크게 불렀다. 서정적인 낭랑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회의가 열리기 전에 무대에 올라가 수백명 혹은 수천명의 대합창을 지휘했다. 어떤 때는 석양이 지는 속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긴 모습은 그의 얼굴 윤곽을 더욱 분명하게 했다.”

 

딩쉐쑹 여사의 연안시절 정율성 음악가에 대한 첫 인상이다. 이러한 호감으로 정율성 음악가와 딩쉐쑹 여사는 1941년 결혼하게 된다.

 

당시 정율성은 <연안송> 등을 작곡했음에도 조선인으로 사상적인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장정(長征)에 참가한 팔로군포단 단장 무정(武亭) 장군이 옌안에 회의참석차 왔다가 신원보장을 하고 둘을 연결시켜서 이들의 결혼이 성사되게 됐다. 정율성은 당시 사냥을 좋아했는데 결혼하기 전 주덕(朱德)장군이 준 장총으로 두 마리 산양을 잡아서 한 마리는 팔아 떡을 사고 한 마리는 구워서 손님들을 초청해서 먹었다.

 

2001년 가을 베이징에서는 둘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영화 ‘태양을 향하여’(走向太陽)가 개봉됐다. 이 영화는 2010년 9월 베이징에서 또다시 재상영돼 30만명이 관람한 것으로 전해졌다. 딩쉐쑹 여사는 1979년 중국의 첫 여성대사로 네덜란드에 부임했으며 1982년 덴마크 대사를 지냈다. 딩쉐쑹 여사는 2011년 5월 93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정율성 음악가와 딩쉐쑹 여사와의 사이에는 외동딸 딩샤오티(丁小提,69살)가 있는데 이름에 사연이 있다. 옌안에서 딩쉐쑹 여사가 젖이 잘 나오지 않자 정율성은 자신이 보물같이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아 분유를 산다. 그래서 딸의 이름을 ‘바이올린’(violin), 중국말로 ‘샤오티’(小提)라고 짖게 된다. 정샤오티는 현재 베이징 바로크 실내합창단 단장을 맡고 있다.

 

정율성 음악가는 1957년부터 1961년 사이에 중국 남쪽의 소수민족이 많은 윈난(雲南)을 네차례나 방문해 사학가이자 민간문학가인 쉬자루이(徐嘉瑞,1895~1977) 선생과 손잡고 나무꾼과 공주사이의 슬픈 사랑을 그린 백족 설화를 다룬 망부운(望夫雲)이라는 5막8장의 대형민족가극을 만들어 냈다. 이 극은 1962년 중앙가극무극원이 베이징에서 첫 공연을 선보였다. 특히 삶의 현장속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았던 정율성은 조선족은 물론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쓰촨(四川), 네이멍구(內蒙古) 등지의 소수민족 지역을 직접 방문해 그들의 생활을 반영한 풍부하고 이채로운 작품들을 많이 창작했다.

 

정율성은 1959년 중국반우파정치운동 기간 반당분자라는 누명을 썼으며 1966년 문화대혁명 초기 특무(스파이)라는 죄명으로 감금돼 음악활동 자격이 박탈되기도 했다. 1976년 문화화대혁명이 끝난 뒤 창작활동을 재개하였으나 베이징 근교의 운하에서 취미인 그물고기잡이를 하다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율성 사후 1년째인 1977년 베이징에서 ‘정율성선생 추모1주년 기념작품음악회’가 열렸으며 당시 유명 작곡가 리환즈(李換之)가 지휘를 맡았다.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 혁명열사들이 묻히는 스징산루(石景山路) 바바오산혁명공묘(八寶山革命公墓)에 묻혀 있으며 비문에 그의 공적이 적혀 있다.

 

중·북 2개국 군가 독보적…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때 ‘조선인민군행진곡’ 울려

중국 음악계는 정율성 음악가가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평가한다. 정율성은 해방뒤 팔로군총부 6호의 명령에 따라 무정 사령관 통솔하의 조선의용대에 소속돼 가족이 1945년 조선으로 가게 된다.

 

북한에서 정율성은 조선국가보안대(조선인민군 전신) 구락부(군 문화부 부장에 해당), 조선노동당 황해도선전부 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부 부장 등을 역임했다.

 

이 기간중에 조선인민의 투쟁과 중조우의를 담은 <조선인민군행진곡> <중조우의>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을 작곡하게 된다. 특히 북한은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때 평양 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을 맞을 때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연주했다. 북한은 1992년 대형예술영화 <음악가 정률성>을 출품하는 등 정율성에 대해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1950년 9월 부인 딩쉐쑹이 북한에서 귀국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북한내 연안파의 숙청을 우려해 친필로 김일성 주석에게 정율성을 중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요청했으며 김 주석의 동의하에 정율성은 중국으로 돌아가 음악 창작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KBS 다큐 ‘정율성 편’ 거듭 방송불방…한국은 ‘이념’ 때문에 제 대접 못받아

 

한국은 1996년 10월 서초동 국립국악원 소극장에서 ‘정율성 작품 발표회’가 국내 처음으로 열렸다. 당시 부인 딩쉐쑹 여사가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그뒤 2005년 정율성의 고향인 전남 광주에서 ‘정율성국제음악회’가 처음으로 열린뒤 2011년 10월 7회째를 기록했다. 그간 광주에서는 정율성 기념사업회 현판식과 사진 전시회, 흉상 제막식, 정율성로(路) 개통과 생가터 표지판 건립 등 다채로운 기념사업과 각종 논문발표 등 학술적인 연구까지 진행되고 있다. 광주문화재단에서 2011년 8월에는 하얼빈, 베이징 등 정율성 관련 유적지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광주쪽의 이러한 노력에 따라 2007년 9월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80주년을 맞아 베이징 음악청(北京音樂廳)에서 중국 문화부 주관과 광주시 협력으로 ‘우호평화행진곡 정율성 작품음악회’가 열린 적이 있다. 또 2011년 8월에는 하얼빈에서 ‘정율성음악제와 광주의 밤’이 열렸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의 정율성에 대한 높은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국내에서는 정율성 음악가의 북한에서의 활동을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가 내려지지 않고 있다. KBS는 정율성 음악가의 북한행적을 문제삼아 2011년 8월 광복절 특집으로 방영키로 한 정율성 편을 11월로 연기한뒤 또다시 2012년 1월로 방영을 미룬 바 있다.

 

사실 정율성과 관련해서는 2002년과 2004년에 걸쳐 4차례나 국내 방송에서 다뤄졌음에도 KBS는 정율성 음악가가 북한의 군가를 작곡했고 한국전쟁때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한 사실을 들어 방송을 못하게 한 것이다.

 

정율성은 조선인으로 생의 대부분을 항일독립을 위해 중국에서 음악을 무기로 활동한 예술가이다. 올해는 한중수교 20주년이 되는 해다. 많은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정율성을 기념하는 행사를 확대하는 것은 양국간 관계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계속>

 

[中华人民共和国成立70周年] 阅兵分列式 | 新闻来了 News 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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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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