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반세기 만의 무죄판결, 조봉암 죽음의 진실

류지미 2023. 1. 5. 22:28

KBS 역사스페셜 – 반세기 만의 무죄판결, 조봉암 죽음의 진실 / KBS 20110421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ReM3yp8fiWg 

 

2021. 7. 30.

1959년 7월31일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이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사형됐다.

그로부터 52년 후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반세기 만에 뒤집힌 판결이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거쳐 두 번의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었던 죽산 조봉암. 해방 이후 가장 주목받는 정치인이었던 그는 왜 간첩의 누명을 쓴 채 사형당한 것일까? 사후 52년, 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쳐 본다.

 

- 조봉암의 죽음을 둘러싼 사법살인의 의혹

1958년 1월 제2야당의 당수와 간부 전원이 체포된 희대의 정치적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진보당 사건’. 조봉암이 이중간첩과 접촉하여 북한의 자금과 지령을 받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죄목이었다. 검찰은 간첩죄를 적용해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검찰의 증거는 불충분했고 이에 1심 재판부는 조봉암에게 징역 5년형을 선고한다. 이어지는 2심과 최종심, 재판부는 뚜렷한 보강 증거도 없이 원심의 결정을 뒤엎고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징역 5년형은 어떻게 사형으로 바뀐 것인가? 1심에서 최종심까지 이르는 재판과정에서 남겨진 의혹들을 재판의 현장에서 밝혀본다.

 

- 죽산 조봉암, 한국 진보정치의 서막을 열다

1957년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한다. 독점적인 자본주의의 착취양식도 반인간적인 공산주의의 독재정치도 반대했던 그는 제3의 길인 진보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가 이끌었던 진보당은 1980년대 이후 등장한 한국 진보정치와 정당의 뿌리였던 셈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조봉암의 과거 전력과 진보당이 표방한 ‘평화통일론’은 그의 정치생명을 위협하게 된다.

 

- 조봉암은 왜 죽어야 했나?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무소속으로 출마, 이승만에 이어 득표 2위를 기록하며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이어지는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다시 만난 현직 대통령 이승만과 야당 후보 조봉암. 이승만정부의 선거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평화통일론’과 ‘노동자의 단결권 보장’,‘국민의료제도의 확립’ 등 당시로선 획기적인 공약으로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부정개표 논란 속에 조봉암은 2위로 낙선했지만 이전 선거보다 3배 많은 득표를 기록했다. 그의 부상은 1960년 대선을 앞두고 4선을 노리는 이승만에게 큰 위협이었다.

 

- 헌정사상 초유의 사법살인은 어떻게 진행됐나?

제3대 대통령 선거 이후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위협은 더욱 심화됐다. 결당대회를 통해 정식 출범을 선언한 진보당은 갖가지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벌어진 일련의 간첩사건. 검찰은 조봉암의 연루 의혹을 제기한다.

 

1959년 6월 미국은 다울링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조봉암의 사형을 막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조봉암을 끝내 처형했다.

 

이승만과 조봉암의 죽음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진보당 사건의 공판기록과 국무회의록, 주한미대사관의 비밀기록 등을 통해 조봉암이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신역사스페셜 64회– 반세기 만의 무죄판결, 조봉암 죽음의 진실 (2011.4.21.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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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만의 무죄’ 조봉암 재조명 활발

입력 : 2011.01.31 22:26박준철 기자

‘죽산을 돌아본다.’

‘사법 살인’으로 52년 만에 간첩죄의 누명을 벗고 무죄 판결을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재조명 사업이 활발하다. 인천 강화 생가터 발굴과 독립유공자 포상 재추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된 유해를 현충원으로 이장하는 방안 등이 추진되고 있다.

 

31일 인천시에 따르면 죽산 선생이 지난 20일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음에 따라 시와 민간단체는 다양한 추모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시는 그동안 죽산명예회복 운동을 펼쳐왔던 강화의 (사)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와 서울죽산기념사업회, 새얼문화재단, 죽산 선생 유족, 지역 원로 등이 참여하는 간담회를 2월 안에 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죽산 선생의 뿌리찾기에 나선 곳은 (사)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이다. 1999년 설립된 사업회는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로 알려진 죽산의 생가터를 조만간 발굴할 예정이다. 시는 생가터를 역사 유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현재 이곳엔 창고가 지어져 있다.

 

기념사업회는 또 2001년 추모비를 설치한 강화읍 갑곶리 진해공원에 동상을 건립하는 등 공원을 조성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이젠 떳떳하게 죽산 선생에 대한 본격적인 뿌리찾기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새얼문화재단도 새얼아침대화 300회를 맞아 오는 3월9일 오전 7시 인천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죽산 선생을 연구해온 연세대 대학원 박명림 교수를 초청, 죽산을 재조명한다.

 

독립유공자 포상도 재추진된다. 2004년 죽산의 맏딸인 조호정 여사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다가 보류된 바 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이번 무죄 판결로 보훈심사위원회를 다시 열어 서훈을 결정한다.

 
 

인천보훈청 관계자는 “3·1절 포상은 이미 결정돼 어렵고, 8·15 광복절 때 훈격이 결정될 것”이라며 “죽산 선생이 훈격을 받고 유족이 이장을 신청하면 망우리에 있는 유해를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