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반세기 만의 무죄판결, 조봉암 죽음의 진실

류지미 2023. 1. 27. 04:46

KBS 역사스페셜 – 반세기 만의 무죄판결, 조봉암 죽음의 진실 / KBS 20110421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ReM3yp8fiWg 

 

2021. 7. 30.

 

1959년 7월31일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이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사형됐다.

그로부터 52년 후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반세기 만에 뒤집힌 판결이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거쳐 두 번의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었던 죽산 조봉암. 해방 이후 가장 주목받는 정치인이었던 그는 왜 간첩의 누명을 쓴 채 사형당한 것일까?

 

사후 52년, 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쳐 본다.

 

- 조봉암의 죽음을 둘러싼 사법살인의 의혹 1958년 1월 제2야당의 당수와 간부 전원이 체포된 희대의 정치적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진보당 사건’. 조봉암이 이중간첩과 접촉하여 북한의 자금과 지령을 받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죄목이었다. 검찰은 간첩죄를 적용해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검찰의 증거는 불충분했고 이에 1심 재판부는 조봉암에게 징역 5년형을 선고한다. 이어지는 2심과 최종심, 재판부는 뚜렷한 보강 증거도 없이 원심의 결정을 뒤엎고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징역 5년형은 어떻게 사형으로 바뀐 것인가?

 

1심에서 최종심까지 이르는 재판과정에서 남겨진 의혹들을 재판의 현장에서 밝혀본다.

 

- 죽산 조봉암, 한국 진보정치의 서막을 열다 1957년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한다. 독점적인 자본주의의 착취양식도 반인간적인 공산주의의 독재정치도 반대했던 그는 제3의 길인 진보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가 이끌었던 진보당은 1980년대 이후 등장한 한국 진보정치와 정당의 뿌리였던 셈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조봉암의 과거 전력과 진보당이 표방한 ‘평화통일론’은 그의 정치생명을 위협하게 된다.

 

- 조봉암은 왜 죽어야 했나?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무소속으로 출마, 이승만에 이어 득표 2위를 기록하며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이어지는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다시 만난 현직 대통령 이승만과 야당 후보 조봉암. 이승만정부의 선거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평화통일론’과 ‘노동자의 단결권 보장’,‘국민의료제도의 확립’ 등 당시로선 획기적인 공약으로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부정개표 논란 속에 조봉암은 2위로 낙선했지만 이전 선거보다 3배 많은 득표를 기록했다. 그의 부상은 1960년 대선을 앞두고 4선을 노리는 이승만에게 큰 위협이었다.

 

- 헌정사상 초유의 사법살인은 어떻게 진행됐나? 제3대 대통령 선거 이후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위협은 더욱 심화됐다. 결당대회를 통해 정식 출범을 선언한 진보당은 갖가지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벌어진 일련의 간첩사건. 검찰은 조봉암의 연루 의혹을 제기한다. 1959년 6월 미국은 다울링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조봉암의 사형을 막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조봉암을 끝내 처형했다.

 

이승만과 조봉암의 죽음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진보당 사건의 공판기록과 국무회의록, 주한미대사관의 비밀기록 등을 통해 조봉암이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신역사스페셜 64회– 반세기 만의 무죄판결, 조봉암 죽음의 진실 (2011.4.21.방송) http://history.kbs.co.kr/

 

 

***

조봉암씨의 목소리는 산천초목이 다울었고 신익희 씨의목소리는 세상이 잠들었다.

비명에 가신두분의 그림자는 지금도  이슬을 맺히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