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놀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에서
반공포로 수용소 시찰
1953년 6월 6일 오후, 이승만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을 경무대로 불러들였다.
바로 1년 전 부산 정치파동 때 부산·경남 계엄사령관으로 직선제 개헌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원용덕은 그 후 이승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부산과 서울의 경무대 출입이 잦아져 있었다.
이날도 포로 송환 타결로 긴장된 판이라 틀림없이 무슨 중요한 지시를 받을 것 같은 예감으로 달려간 원 사령관이 대통령 앞이 앉았다.
“원 장군, 미국 사람들이 또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우리 애국 청년들을 죽음의 땅으로 보낸다니 큰일이야,
나로서는 단 한 명도 북한으로 보낼 수는 없어,
원 장군, 저 북한에 안 가겠다는 우리 동포 청년들을 석방했으면 하는데 무슨 수가 없겠나?
오늘 밤이라도 좋으니 방안을 만들어 와서 알려주게나”
원용덕은 무릎을 쳤다.
그전에도 “반공포로는 석방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을 몇 번 들은 바 있던 그는 이미 반쯤 구상이 끝나 있었다.
제네바 협정의 포로 관계 조항 중 ‘인도주의’, ‘교환은 의무적’이란 것과, 전쟁 포로 처리 문제는 그들을 관리하는 국가의 주권에 속한다는 대목을 원용덕은 잘 알고 있었다.
현재 거제도 등 수용소 포로들은 유엔군, 즉 미군이 관리하고 있지만, 현장 경비는 상당수 국군이 맡고 있으므로
우리 군이 경비를 풀어 버리면 모두 빠져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원 사령관은 석방 시 협조가 필요한 내무장관 진헌식을 찾아가 경찰 동원과 의복, 식사, 포로 보호 문제 등을 협의한 뒤
경무대로 달려갔다. 반기는 이승만에게 비밀작전 계획서를 보고하고 또 다른 문건을 들이밀었다.
“각하, 부산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국군 지휘권이 유엔군 사령관한테 있으므로 이걸 만들어 왔습니다.”
문건은 “오늘부터 육 해 공군의 헌병은 원용덕 중장의 지휘 하에 들어감을 명령함”이란 요지였다.
얼굴이 환해진 이승만은 즉각 ‘晩’이라고 자필 서명을 해 주었다.
이어 대통령은 “나의 명령이니 반공 한인 애국 청년들을 석방하라. 可, 晩”이라고 친필 사인한 석방 명령서를 별도로 써주고 원용덕의 두 손을 굳게 잡았다.
다음날 진헌식 내무장관은 경무과장 최치환, 총무과장 신두영을 불러 극비리에 포로 석방 지원 대책을 마련한다.
사흘 후 경무대 구내에 임시로 마련된 원용덕 사령관 비밀 집무실에서는 비밀 작전회의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회의에 참석한 자는 단 한 마디라도 누설해선 안 되며 국가 1급 비밀을 엄수하라.
국방장관과 참모총장들에게도 입을 다물라”
국군의 지휘 계통을 뛰어넘는 국가 최고 극비 군사작전, 통수권자 이승만 특유의 혁명적 도전이 부산 정치파동에 이어 또 벼락처럼 터트릴 폭약을 채우는 작업이다. 원용덕이 내보이는 대통령의 친필 서명 문서 2개를 보면서도 중간간부들은 반신반의하며 고슴도치처럼 극비 업무를 서둘렀다.
절묘한 타이밍
반공 포로 석방은 당초 1953년 6월 11일 결행하려다가. 전략상 18일 새벽으로 미루게 되었다.
D데이, 6월 18일 02시,
신호를 기다리는 전국 20여 개 포로수용소는 태풍 전야의 고요에 빠져 있었다.
초저녁 어둠부터 숨어든 검은 그림자들이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막사들을 오가며 반공포로 대표들에게 무언가 속삭이고 있었다.
“우리가 고대하던 자유의 날이 드디어 왔다.
이승만 대통령께서 석방 명령을 내렸소.
새벽 2시가 되면 여러분은 우리가 끊어 놓은
이 철조망으로 뛰시오.
탈출 후엔 최대한 멀리, 적어도 30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그다음엔 경찰이 보호해 줄 것이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석방 소식에 포로들은 옷과 신발끈을 졸라매고 잠자는 체 누워서 기다렸다.
마침내 2시, 수용소 뒷산에서 진지 등불 신호가 세 번 반짝, 반짝, 반짝….
안내 헌병과 기다리던 포로들은 일제히 끊어진 2중 철조망으로 물밀 듯이 쏟아져 나가 달린다.
자유를 찾아 대탈주!
포로들이 70%쯤 탈추했을 때 요란한 총성이 콩 볶듯 울렸다.
그제야 알아차린 미군들이 혼비백산해, 미리 단전시켜 칠흑 같은 수용소에서 허둥지둥 뒤늦게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어둠 속으로 총격을 가했지만 이미 상황 끝, 막사들은 텅텅 비었다. 석방 작전은 대부분 성공적이었으나 몇 군데 실패도 있었다.
영천포로수용소에서는 한국 경비대장 김모 소령이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미군 수용소장을 믿고 거사 계획을 털어놓으며
‘인도적인 부탁’을 하였다. 미군 소장은 이를 거부하며 즉각 비상령을 내리고 포로 간부들을 영창에 감금해 버렸다.
이래서 18일 새벽 탈출은 실패.
날이 밝은 후, 대구 육군 헌병사령부 김병삼 중령 앞에 서울총사령부의 김문호 소령이 나타났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까만 보자기를 풀더니 큰 장도칼을 꺼내 놓았다.
“이것은 대통령의 선물이오. 영천 포로들을 석방 못 하면 우리 이 칼로 자결합시다.”
김문호 소령이 돌아간 뒤 김병삼 중령은 영천수용소의 김모 소령을 불렀다. 죄 지은 김모 소령이 헐레벌꺽 달려와 책상 위에 놓인 자도칼을보고 찔끔 놀란다. 이제 죽었구나!
“이 칼은 대통령 각하께서 보내신 것이오.
만약 오늘 밤 안으로 탈출작전을 성공시키지
못할 때는 나와 김 소령은 자결해야 돼. 알았소?”
질겁한 김모 소령은 영천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발설로 수용소엔 미군 장갑차 30대가 출동하여 포위 상태, 미군을 믿은 내가 바보…. 김 소령은 조용집 소령과 특공작전을 짰다. 영천 시내 전기회사에 밤9시 단전을 요청하고 절단기 10개와 고춧가루 한 말을 사 왔다.
”끊으라“
명령에 수용소는 어둠에 잠겼다.
특공대원 30명은 번개처럼 작전을 개시해 미군 경비 헌병들을 3 대 1로 급습해 수갑 채우고 철조망을 절단했다.
포로 복장으로 막사에 잠입해 있던 특공대원들이 포로들을 일시에 탈출구로 인도했다.
장갑차 공격조는 일제사격을 가해 라이트를 깨트리며 장갑차에 뛰어올라 고춧가루를 듬뿍 쏟았다.
꼼짝없이 당한 미둔들이 쩔쩔 눈물을 쏟으며 기어 나왔으나 속수무책이다.
금호강 쪽으로 무작정 뛴 포로 1천여 명은 사복 경찰과 청년들의 안내로 마을에 분산되었다.
첫날 거사를 막았던 미군 수용소장은 그때 ”방해 말라. 한국군과 싸우지 말라. 이것은 정치 문제“라며 미군을 말렸다고
김 소령은 전한다.
거제도와 영천을 제외하고 나머지 소용소들의 탈출작정은 비교적 순조로웠으나 총격전이 벌어진 곳에서는
미군과 포로들 희생자가 몇 명씩 생기는 불상사도 피하기 어려웠다. 석방된 포로들을 미군으로부터 보호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부평초등학교 교정에서는 때맞춰 휴전반대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통일 없는 휴전 결사반대” 결의문을 채택하고 시가행진에 들어간 시민들은 국도를 따라 인천 시내까지 행진을 머추지 않았다.
수용소를 탈출하여 이동하던 반공포로들은 검문하는 미군을 피해 이 행진 대열에 속속 숨어들었다.
휴전 반대도 하고 북한 반공포로들도 보호하는 2중 작전을 펼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조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전국에서 이틀 동안 탈출한 포로들은 대강 2만 7천여 명.
내무부는 적극 보호 지원에 나서고, 국민들의 지원 활동도 휴전 반대 분위기에 힘입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원영덕 사령관은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성명서를 방송했다.
그동안 미국 언론들이 단독 북진을 열창하는 이승만을 ‘자살 폭탄을 안고 적진에 투신하는’ 만화로 그리기 시작한 지 한 달, 그 만화를 이렇게 국제적인 드라마로 만들어 낸 이승만이었다.
클라크에게 ”자살 전쟁은 내가 지휘한다“고 고함친지 열흘 만에 유엔군에 예고도 상의도 없이
국군통수권을 휘둘러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자살훈련’을 단독 감행한 결과는 약소국 지도자의 전무후무한 국제 외교 전쟁의 대승리였다.
더구나 타이밍 선택이 전략적으로 절묘했다.
6월 18일은 판문점에서 포로 송환 합의서에 양측이 서명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게다가 바로 전날 17일 이승만을 달래려는 아이젠하워가 특사를 보내겠다고 하여 이승만이 수락하고는 그날 밤에 석방을 단행, 판문점회담을 한 방에 깨면서 백악관 심장을 강타하는 일석이조의 핵폭탄을 날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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