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미국의 '이승만 제거 작전'

류지미 2023. 3. 16. 08:43

남기고]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5) 미국의 '이승만 제거 작전'

유광종입력 2011. 1. 5. 01:27수정 2011. 1. 5. 01:33
 

[중앙일보 유광종]

한국전쟁 휴전 무렵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석방된 북한군 반공 포로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은 공산진영뿐 아니라 서방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휴전협상 과정에서 극도로 민감했던 것이 반공(反共) 성향의 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였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 포로에 기울이는 관심은 아주 대단했다. 그는 한국에 남거나 제3국으로 가려는 반공 포로들을 석방해 자유를 찾도록 하는 일에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꺼내든 것은 그 문제였다. 공산 측은 당시 중립국이지만 공산주의에 다소 기울었던 인도 등을 포로 송환(送還) 위원국으로 결정하자고 제안했고, 미국과 유엔은 이를 수용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은 이런 사정을 설명하다가 급기야 이 대통령의 폭탄선언을 한 차례 더 들어야 했다.

 이 대통령은 매우 직설적인 화법을 썼다고 했다. 대통령은 "그렇게 한다면 포로들을 석방할 의사도 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던졌던 것이다. 클라크 장군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 다음에 닥쳐올 사태에 대한 최초의 폭풍 경고가 아니었던가"였다. 그는 또 "(이 대통령의 발언이 우리를) '꽝' 하고 때렸다"고 당시의 소감을 적었다.

 

 1953년 7월 27일 이뤄지는 휴전협정 조인식을 얼마 앞두고서 세계, 특히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 지도자들은 매우 쇼킹한 뉴스를 접한다. 3년 동안의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오랜 협상을 거쳐 겨우 도달한 휴전협정 조인을 앞두고 한국에 있던 반공 포로들을 전격 석방하는 사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시작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휴전을 급히 서두른다는 인상을 줬던 미국, 그리고 포로 송환 문제에 대해서도 공산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던 미군과 유엔의 태도 등을 지켜보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 제동을 걸기 위해 극단적인 '반공 포로 석방'의 카드를 처음 꺼내 들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장식한 두 인물, 이승만(왼쪽·1950년 10월 16일자)과 마크 클라크(52년 7월 7일자).

 

 미국은 그런 이 대통령의 의중에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포로들을 송환하지 않고 그대로 석방한다면 휴전회담 자체를 원점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양측에 붙잡힌 포로를 교환하는 것은 휴전회담의 가장 큰 토대였다. 공산 측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먼저 반공 성향의 포로들을 석방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은 회담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승만 대통령. 김일성 군대에 이어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화(戰禍)에 허덕이며 백척간두(百尺竿頭), 누란지위(累卵之危)의 위험한 상황에 놓였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분투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존망(存亡)과 사활(死活)이 걸린 가장 첨예한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거대한 미국과의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용기와 지혜를 보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워싱턴의 입장에서는 아주 달랐다. 엄청난 전비(戰費),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젊은 군인들의 희생이 불가피한 한국 전선을 빨리 휴전으로 마감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 그랬다. 이 대통령은 그런 워싱턴의 입장에서는 분명 '눈엣가시'였을 게 틀림없었을 것이다. 서울과 워싱턴 사이의 이견을 조율하고 수습했던 마크 클라크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을 '위대한 아시아사의 지도자'로 봤지만, 정전(停戰)이라는 국민적 여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시각에서 이 대통령은 분명히 골칫덩어리였다.

 

 마크 클라크 장군의 회고나 다른 여러 문서 등에서 나타나지만, 미국은 그런 이승만 대통령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한국 전선에서의 모든 문제를 총괄하는 마크 클라크 장군이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자세히 밝히기를 꺼리는 대목이 하나 있다.

그는 그냥 '본국의 합동참모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불의(不意)의 중대 조치를 취한다면 현지 사령관으로서 우리 군대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일체의 권한을 나에게 부여했다'고 적고 있다.

 

 이 말이 단순한 군사 분야에서의 안전만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범주를 훨씬 넓혀 미국의 국가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극단적인 상황이 나타났을 때 모든 조치를 취해도 좋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클라크 장군은 그에 관한 상술(詳述)을 회피하고 있다.

 

 이와 관련이 있는 대목이다. 서울의 경무대와 워싱턴의 백악관이 휴전 막바지 협상을 앞에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던 무렵에 들려오던 풍문(風聞)이 있었다. 나는 정치적인 현안에는 비교적 둔감한 편이다. 따라서 바람결에 실려 내 귀에 들어오던 그런 풍문을 두고 나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알아본 일은 없었다.

 

 그러나 전선을 지휘하는 육군참모총장의 입장에 있던 나로서는 자연히 그런 소식에 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미국이 휴전회담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며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가 처음 들려왔던 때는 1952년이었다.

 

 이 대통령은 그해 7월 부산의 임시 수도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내각책임제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발췌 개헌안'을 강제 동원 형식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었다. 미국은 그때 처음 이 대통령 제거를 위한 '에버레디 오퍼레이션(Ever ready operation)'을 구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말로 풀면 '상비(常備) 작전'이다.

 

 미국이 그 계획을 더욱 치밀하게 검토했다고 알려진 것은 경무대와 백악관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던 53년 4~5월께였다. 이제까지 서술한 대로 이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그 당시 휴전 회담 막바지 조인을 앞두고 펼쳐진 여러 가지 조건을 두고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은 극비(極秘)에 속하는 사안이었다. 알려고 해봐야 제대로 알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서울을 오고 가는 바람 속에 그런 이야기가 조금씩 내 귀에도 전해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만큼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은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는 분위기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 kjyoo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