彌榮(いやさか)
*いやさか : 야사카 (彌榮)
[彌榮]<미영> 더욱더욱 번영함. 축복(祝福)하는 뜻으로 부르짖는 말.
-皇室の彌榮を賀し奉り倂せて皇軍將士に感謝を捧ぐ
삼가 황실의 미영(彌榮)을 봉축하고 출정장병의 무운장구를 기념(祈念)하여 호국의 영령과 함께 성전 목적의 관철에 매진할 견인불발의 의기를 다시 한 번 선양하는 바이다.
강제폐간 직전까지 동아일보의 ‘진충보국’동아일보 대해부 1권 - 20장
관리자 승인 2021.06.09 10:00
1939년 9월 2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인류의 앞날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올 세계 제2차 대전의 서막이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독파(獨波) 양군 수(遂) 개전(開戰) / 히 총통 실력 행사 발령 / 전 독일 국방군에 대하여
[베를린 1일 발 동맹 지급전] 히틀러 총통은 1일 조효(早曉) 독일 국방군에 대하여 실력 행사를 발령하였다.
히틀러 총통은 1일 조조 독일 국방군에 대하여 지령을 발하고 “무력에 대해서는 무력으로써 대항하라”고 명령하였다.
일본을 패망으로 몰아넣은 제2차 대전 터지다
위의 기사 바로 왼쪽에는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 관한 내용이 자리잡고 있다.
상부(上部) 실 지방에서 격전 / 파군(波軍), 독일방송국 점거
[베를린 31일 발 동맹 지급전보] 독, 파란(波蘭)은 드디어 폭발하였다. 작 31일 오후 8시(일본시간 1일 오전 4시) 정규군의 지원을 얻은 파란 측 편의대(便衣隊)는 상부 실레지아의 그라비츠에 침입하여 동지(同地) 방송국을 점거하고 기타 2개소에서 월경하여 목하 독, 파 양군은 국경에서 격전 중이다.
DNB통신은 그라비츠 충돌사건에 관하여 31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분명히 파란 정규군의 엄호 하에 있다고 보이는 파란 무장 비정규부대는 돌연 독일령 상부 실레지아의 그라비츠에 침입하여 동지에 있는 독일 방송국을 공격하고 점거하였다. 이에 독일 보안대는 곧 이에 대하여 포화를 상교(相)交), 목하 격전 중이다. 그리고 목하 판명된 독일 측의 사자(死者)는 7명이다.
동아일보가 받아 쓴 일본 도메이통신의 기사는 독일의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나중에 역사학자들과 군사전문가들이 국제적 협력을 통해 밝혀냈듯이, 히틀러의 독일군은 폴란드 군복을 입고 국경의 독일 방송국을 공격했다. 그것을 빌미로 독일군은 막강한 병력과 무기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폴란드를 침공해 들어갔던 것이다.
일본은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음으로써 이른바 ‘추축국(樞軸國)’의 일원이 되었다. 중국대륙과 동남아시아에서 침략전쟁에 주력하던 일본은 1941년 12월 7일(아시아 시간 12월 8일) 미국령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제2차 대전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게 된다. 그것은 일제가 그렇게도 원하던 ‘대동아공영권’과 ‘동아 신질서’의 건설로 이어지지 않고 1948년 8월 15일 연합군에 대한 무조건 항복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빚어냈을 뿐이다.
그런데 ‘대일본제국 황군’이 중국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것을 보고 일제가 동남아시아를 영원히 지배할 것이라고 믿었음이 분명한 동아일보 사주와 언론인들은 ‘대본영’의 보도자료를 앵무새처럼 되뇌다가 끝내는 강제폐간을 당하고 만다.
동아일보가 그려낸 ‘최신 세계대지도’
1939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희한한 ‘사고(社告)’가 나타났다. 제목은 「새해의 선물 / 최신 세계대지도 / 신춘 원단 신년호 부록 / 월정(月定) 독자에게 무료 배부」이다.
바야흐로 세계는 동으로 서로 새로운 시대를 산출하기 위하여 거대한 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구주(歐洲) 천지를 일별(一瞥)하라. 군사행동을 개시한지 불과 2 순(旬)에 독일의 대파(對波) 목적은 수행되었건만 전국(戰局)은 이로써 종식되지 않고 영불독 각축의 방면으로 각일각 확대되어 해상봉쇄전은 치열하며 마지노 지그프리트 선(線)의 대치는 폭풍우 전야의 음울한 침묵을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타방으로 무혈 획득의 수법으로 남정북벌(南征北伐)에 그 묘미를 발휘하고 있는 소련, 독소(獨蘇)와 쟁선(爭先)하여 발칸 진출공작에 활발의 도를 가하고 있는 이태리, 중립법 수정에 성공한 루즈벨트 정부의 일거수일투족도 세계의 주목을 끌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극동 방면에 있어서는 일지사변의 제4단계에 들어 성전 3년의 토대 위에 신정권 수립을 중심으로 한 건설사업은 기다(幾多)의 난관을 예상하면서도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본사는 명춘 신단(新旦)의 부록으로 본사 편(編) 최신 세계대지도를 월정 독자 제위에게 드리고자 하오니 이 얼마나 적절한 선물일까요? 이 지도는 신문 4면 대모조지 실입(實入)의 0근(斤), 인쇄=고급 옵세트 7도 쇄(刷)로서 미려선명의 극을 자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특수한 고안을 흡입한 전세계지도 외에 구주, 지나의 명세도와 열국의 인적 물적 자원, 군비 상황 도시(圖示)를 편입하여 역사적 시기의 성격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적절한 지도를 받게 됨은 본보 독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긍지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명춘 원단에는 월정 독자 여러분의 손에 무료로 배부될 것이니 여러분이여 기다리시라.
월정 독자에게 무루(無漏) 배부
동아일보사
신문사가 새해를 맞아 다달이 구독료를 내는 독자들에게 달력을 선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동아일보사의 ‘최신 세계대지도’는 그 제작 의도가 음험하기 짝이 없다. 유럽에서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국가들이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나라들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여서 ‘확보’한 영역을 지도에 그려 넣는 것을 시작으로 일제가 중국대륙에서 점령한 지역을 명확히 그 지도에 표시하겠다는 뜻이다. 조선의 어린이들이나 지각없는 어른들이 그 ‘최신 세계대지도’를 보면 유럽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압도적 세력 아래 들어가고 중국의 요충지들은 대부분이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믿게 될 것이다. 일본의 ‘천황’이나 군국주의자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리들이 그런 지도를 보면 동아일보의 ‘뛰어난 기획력’과 ‘대일본제국의 위세’를 홍보하는 열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황공무지’가 더욱 요란한 새해 ‘용비어천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가 목숨을 부지하는 마지막 해인 1940년이 되었다. 동아일보 1면 머리는 지난해보다 훨씬 더 ‘화려한’ ‘천황의 새해 동정’으로 장식되었다.
대원수 폐하 어일상 / 어정무 어군무에 어정려
건국의 항전(恒典)이 더욱 빛나게 유구(悠久)의 보조(寶祚)는 번영에 번영, 황공하옵시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광휘 있는 기원 2600년, 원유(遠猷) 흠앙성대(欽仰聖代)를 봉수(奉壽)하는 조국(肇國)의 식년(式年), 소화 제15춘을 맞이하옵시사 흥아 성전의 대본영에 성수 어사십을 산하옵신다. 황후 폐하께옵서는 어년 어삼십팔세를 산하옵신다. (···) 황공하옵시게도 항상 제사를 중히 하옵시는 천황 폐하께옵서는 이 의의 깊은 식년에 더욱 대어심을 다하옵시사 유신(惟神)의 대의건국의 굉모(宏謨)를 받으옵시는 사념으로 기원절제는 특히 중하게 어친제, (···) 매조(每朝) 신궁을 어요배, 현소(賢所)에는 시종을 어대배(御代拜)시키옵셨다. 어친제에 제(際)해서는 전일부터 엄숙히 어결재(御潔齋), 어심신 함께 엄숙하옵시게 현소에 출어하옵시는데 신황(神皇) 어일심의 깊으신 대어심을 봉배함은 참으로 황공 무비이다.
이 글 옆에는 본문 활자보다 큰 글씨로 「근(謹) 봉하 신춘」이라는 신년사가 나와 있다.
성전 분투 3개 성상, 상승 황군의 위용은 이제 중외(中外)에 떨치고 광고공전(曠古空前)의 전과를 수득(收得)하여 바야흐로 성전의 목적을 완수하려 하는 이때 특히 광휘 있는 황기(皇紀) 2600년을 맞이하와 1억 민초는 다시금 국위의 신장과 출정장병의 무운장구를 기원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천황 폐하께옵서는 지나사변이 발발 이래 어정무, 어군무에 어정려하옵시고 어다망하옵신 어일상으로 계신 것을 배문하옵고 우리 국민은 오직 홍대(鴻大)한 성은에 감격할 뿐이다.
이에 소화 성대 15춘을 맞이하옵셔서 천황 폐하, 황후 폐하의 성수무강하옵시고 황태자 전하, 의궁 전하, 조궁, 효궁, 순궁, 청궁 각 내친왕 전하의 어강령을 삼가 빌어 마지않는다.
이 신년사는 ‘천황 폐하’ 일가에 바치는 가장 극진한 새해 문안이자 세배였다.
‘기원절’에 대한 동아일보의 마지막 헌사
1940년 2월 11, 12일자 동아일보 1~2면은 일본의 건국기념일인 기원절에 대한 기사와 사설로 도배되었다. 먼저 11일자 기사를 보기로 하자.
황기 266년의 건국제 / 총독이 폐백공진사(幣帛供進使)로 / 엄숙한 기원절 제의(祭儀) / 관민 대표 2천여 명이 식에 참렬 / 명일 오전 10시 조선신궁에서
조국(肇國)의 무궁과 국운의 융창을 비는 기원절제는 마침내 내일에 맞이하게 되었다.
이 2600년의 유구한 역사 위에 이제 바야흐로 동아에는 새로운 광명이 서리고 건국의 정신은 오늘에 더욱 빛나 전 세계를 덮으려는 이때 전 국민은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엄숙 성대한 황기 2600년의 제의를 거행하려 한다.
이날 밤이 새고 먼동이 트는 내일 아침은 오르는 햇발과 함께 황기 봉축을 하지 아니치 못할 아침이다. 이 거룩한 날을 봉축하기 위하여 전 조선 각 대표가 조선신궁에 참집하여 엄숙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기원절제를 올린다.
기원절 당일인 2월 12일자 동아일보 사설(「봉축 2600년 기원절」)은 제 나라의 건국기념일인 개천절을 까맣게 잊은 채 침략자의 ‘명절’에 최대의 헌사를 올리고 있다.
금일은 신무 천황이 어즉위하신지 실로 2600년의 빛나는 기원가절이다. 역사가 있은 이래 세계에 국(國)을 이룬 자 무릇 불소(不少)하나 혹은 일찍이 멸망하고 혹은 역성혁명의 변을 거쳐 금일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직 아(我) 대일본제국은 건국 이래 2600년 다시 천조(天祖) 천조대신이 군웅을 데리시고 농경잠직을 권장하신 태고로부터 하면 실로 유유원원(悠悠遠遠)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제국은 신대(神代)로부터 세계의 중방(衆邦)에 탁절(卓絶)하여 유출유대(愈出愈大), 유진유왕(愈進愈往), 보조(寶祚)의 영(榮)은 천양(天壤)과 같이 무궁하고 국위의 성(盛)은 일월과 더불어 쟁선(爭先)함은 오직 국체의 수절(秀絶)에 원유(原由)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에 고기(古記)를 근안(謹按)컨대 천손(天孫)의 강림에 제(際)하사 천조대신을 풍위원의 1500 추(秋), 서수(瑞穗)의 국(國)은 황손이 이를 통치할 것이며 보조는 무궁히 융창하리라 선(宣)하시었으니 신무 천황은 이 신칙(神勅)에 솔유(率由)하사 강원궁에 즉위의 대전(大典)을 거행하신 다음 육합을 겸하여 개도(開都)하시고 팔굉일우의 대이상을 술(述)하신 것이다. 아 만세일계의 국체와 세계의 평화와 진운(進運)에 공헌하는 국시는 실로 이때에 이미 확립된 것이다. 명치 성제(聖帝) 교육칙어에 황조황종국(皇祚皇宗國)을 조(肇)함에 굉원(宏遠), 덕을 수(樹)함에 심후(深厚)라고 하심은 이 조종(祖宗)의 위업을 추모하신 황공하온 대어심으로 만대 불역(不易)의 성업을 전하신 소이로 배찰되는 것이다.
황기 2600년, 기원가절에 제하여 엎드려 이를 생각할 때, 다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이 그 서(緖)에 취(就)하려는 소화 성대에 생을 향(享)하였음을 생각할 때 이 광고(曠古)의 성운(盛運)에 제회(際會)하여 멀리 천조의 원유(遠猷)를 봉앙하고 신무건국의 황운을 존숭하는 동시에 특히 대헌(大憲)을 흠정(欽定)하사 천업회홍(天業恢弘)의 비적(丕績)을 거(擧)하신 명치대제의 성덕을 담앙(膽仰)하며 다시 윤문윤무(允文允武)하옵신 금상 폐하의 어능위에 오직 공구감격할 뿐이다. 원래 금차 사변은 부질없이 화평을 깨뜨리고 공존공영을 불긍(不肯)하는 도(徒)를 소탕하고 팔굉일우의 대정신 하에 대아시아의 창영(昌榮) 행복을 현현하려는 것이니 4백여 주를 황성 하에 진감(震撼)시킨 기원 2600년 금일의 역사적 축절은 실로 아 국민의 각오를 더욱 새롭게 하여 천양(天壤) 무궁의 황도에 부익(扶翼)할 결의를 굳게 할 때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시아를 제(制)하는 자는 곧 세계를 제한다고 함은 구주인의 망념이다. 그들은 이 망념 하에 아시아 침략의 촉수를 뻗어 금일과 같은 동아의 일대 불행을 유발한 것이니 황국일본은 실로 이 탈취된 아시아의 천지를 그들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하여 전 아시아를 문화의 성지가 되게 하고자 성전 4년의 노력을 하여 이에 기념할 기원가절을 맞이한 것이다. 마침 신질서 건설의 방책은 이제 그 구체적 실현을 급히 하여 견실하고 강대한 중앙신정권의 성립이 목첩 간의 사실로 박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곧 금차 성전의 종국이라고 봄은 극히 단견 조계(早計)일 것이다. 금후 더욱 다난할 사태에 직면할 부동의 각오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삼가 황실의 미영(彌榮)을 봉축하고 출정장병의 무운장구를 기념(祈念)하여 호국의 영령과 함께 성전 목적의 관철에 매진할 견인불발의 의기를 다시 한 번 선양하는 바이다.
이 사설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에 나온 사설들 가운데 일본의 역사를 가장 신화적으로 미화하고 찬양한 대표적 보기이다. 일본은 2600년 동안 ‘만세일계’의 같은 혈통으로 ‘천황’이 대를 이어 왔기 때문에 세계 유일의 ‘순혈(純血)’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어용학자들이 전설을 바탕으로 날조한 역사를 절대적 진실로 믿고 쓴 글이다. 아니 굳게 믿는 시늉을 한 셈이다. 그런 ‘황국사관’으로 보면 한민족의 역사는 ‘역성(易姓)혁명’으로 얼룩진 불순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언론인이라 하더라도, 일본의 언론인보다 더 충성스렵게 ‘황국신민’ 노릇을 한 이 사설의 집필자기 누구인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무적 육군의 무위(武威)’
1940년 3월 10일은 일본의 제35회 ‘육군기념일’이었다. 동아일보는 지난해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그날을 기념하는 지면을 꾸렸다. 3월 11일자 2면은 큼지막한 기념식 행사 사진들과 함께 요란한 내용의 기사들로 가득 찼다. 머리기사는 아래와 같다.
광휘 있는 육군기념일 / 무적 육군의 무위로 / 전 시가 군국 일색 / 위업 계승의 결의 공고 / 동서 양군의 공방전
흥아 매진의 봄 3월 10일, 제35회 육군기념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로(日露) 전역(戰役)에서 선인의 위업을 회고하고 현하 동아 신질서 건설의 대업을 달성하려고 1억 국민의 비상한 결의와 총력을 발양하고 있는 이때 뜻있는 육군기념일을 맞이하여 무적 육군의 무위를 눈앞에 보게 되었다.
이날 군에서는 제병(諸兵) 연합연습을 용산연병장에서 거행하고 시가전을 요처마다 연출하여 전시를 추상케 하였고 또 공병대의 폭파연습이 한강에서 굉장하였다. 그리고 학생대의 분열행진, 여생도의 시가행진 등이 장관을 이루어 전시(全市)가 아니 전 조선이 군국 일색으로 창일하였다.
전시 하 세 번째 맞이하는 금 10일의 제35회 육군기념일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즉 명치 38년 이날 일로전쟁 때 봉천 대회전에서 대승리를 얻어 결정적인 승인(勝因)을 지은 기념일이므로 전 조선적으로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행하였는데 그중에도 제일 인기를 끌고 장렬한 것은 용산연병장에서 열린 제병 연합연습으로 전투연습은 오전 9시부터 전개되었다.
이 기사 옆과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배열되어 있다.
· 「전 부민은 묵도 / 오후 7시부터는 유가족의 밤」
· 「나팔 소리에 보무당당 / 장관의 학생 분열식」
· 「일치, 국민의 기념일 / 성대히 종료한 것을 충심 감사 / 가등(加藤) 조선군 참모장 담」
· 「8천의 여학생 부대 / 신궁에 참집, 시내 행진」
이날의 사설(「육군기념일」)은 동아일보가 지난해 같은 날짜에 내보낸 사설보다 ‘진충보국’의 논조가 더욱 강하다.
금일은 황기 2600년, 그리고 사변 하 제3차의 빛나는 제35회의 육군기념일이다. 소화 12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을 발단으로 한 금차 사변에서 정예 무비의 아 육군은 해군과의 긴밀한 공동작전 하에 왕성한 사기로써 여하한 곤란도 극복하고 헌신적으로 분투하여 필승의 신념으로 대적을 궤멸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이제 왕조명 씨 중심의 신 중앙정권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은 그 서(緖)에 취(就)하게 되었다. 이 원래 어능위의 사연(使然)이심이나 또 출동장병의 진충보국의 대정신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할 때 아등 국민은 일층 군에 대한 감사의 염을 깊이 하는 동시에 총후의 각오를 굳게 하는 바이다.
‘왕정위 괴뢰정권’을 극찬
1940년 3월 14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일제가 장개석 정부 대신 중국에 세우려고 하는 왕정위 중심의 지나 신중앙정부를 최대한 높이 평가하는 ‘제국정부 수상 담화’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유물적화(唯物赤化)의 침습(侵襲) 방지코 / 동아 영원의 평화 확립 / 신정권에 대한 정부의 중대 성명
[동경 전화 동맹] 근근(近近) 탄생될 왕정위 씨 중심의 지나 신중앙정부에 대한 제국정부의 중대 성명은 13일 오전 미내(米內) 수상 담(談) 형식으로 아래와 같이 발표되었다.
“대립 항쟁을 교정하고 인애(仁愛) 광피(光被)의 평화를 확립함은 이 아조국(我肇國)의 정신을 현현하는 소이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이념도 또 이에 연원한다. 모름지기 각 국가가 각기 안주할 데를 얻고 근린 상휴(相携)하여 각각 그 본연의 특질을 존중하며 함께 흥륭 발전, 각자의 도(途)에 취(就)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동아 제휴의 성업을 행함에 당하여 먼저 할 것은 일만지(日滿支) 3국간의 신관계를 창조 확립하는 것인데 물론 이신관계는 꼭 여상(如上)의 정신에 기(基)하여 동아 신질서 건설의 이념에 즉(卽)할 것이며 전자(前者) 근위 내각총리대신 성명으로 선린우호, 협동 방공(防共), 경제 제휴의 3원칙을 제창한 소이이다. 향(嚮)할 바는 이미 병호(炳乎)하게 명료하다. 제국이 신지나중앙정부와 함께 건설하려는 신질서의 구체방책도 또 위 성명에 칙(則)한 것으로 상호 국가민족의 본연을 존중하고 서로 제휴하여 상조돈목(相助敦睦)의 교의(交誼)를 후(厚)하고 상계(相戒)하여 유물적화의 침습을 방지하여 동아 평화를 확립하고 호혜경제를 건설하여 장단상보(長短相補)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실을 거(擧)하렴에 불외(不外)한 것이다. 원래 제국이 지나의 독립과 자유를 존중함은 누차의 성명에서 이미 명백하다. (···) 이제 제국 조야의 결의는 더욱 견고하고 그 국력은 사변 이래 계획적 약진을 하여 용공항일정권의 미몽이 깨지 않는 한 여하한 장기의 전쟁도 사양치 않는 것이다. 지나 4억 실로 다수 중에 구안(具眼)의 사(士)도 없지 않아 선각의 사는 이미 오랫동안 구국(救國)을 선창하고 전 민중을 그 궁핍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의(義)를 보고 진(進)하여 정신(挺身)함으로써 인(仁)을 행하고 있다. (···) 그중에도 왕정위 씨는 일찍이 생각하는 바 있어 중경 정권의 항전건국이 공연히 인민을 도탄의 고난 속에 빠지게 하고 구극(究極)하는 바 지나 적화의 도(道)를 급하고 있는 실정을 묵시할 수 없어 반공평화에 의한 구국을 창도(唱導)하고 중경 측의 모든 압박과 싸우며 감연 그 믿는 바에 따라 궐기하고 거취에 헤매는 민중에 대하여 광명의 거화(炬火)를 들고 흡연(翕然) 천하의 신(信)을 모은 것이다. 동씨의 화평구국운동과 신중앙정부 수립 공작이 객년 8월 말 상해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자대회 이후 급속히 진전되어 드디어 중앙정치회의를 개최하고 각 기성정권, 각 당파 및 사회에 성망 있는 인사로부터 일치의 지지 협력 하에 근근(近近) 중앙정부의 수립을 보게 된 것은 동아 화평 재건을 위하여 제국으로서 실로 흔쾌 불감하는 바로 만폭(滿幅)의 지원을 불석(不惜)함은 물론 그 수립에 반(伴)하여 속히 이를 승인할 용의를 가진 것이다.
왕정위의 본명은 왕조명이고 정위는 자(字)였는데, 전자가 더 많이 쓰였다. 1883년 5월 광동에서 태어난 왕정위는 청년 시절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그는 1910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아버지인 순친왕을 암살하려다 폭탄이 터지지 않아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그는 1911년 무장 봉기를 틈타 풀려나서 중국 민중의 영웅이 되었으나 1925년 손문이 사망한 뒤 장개석의 세력에 밀렸다. 왕정위는 1927년 장개석 정권에 맞서 무한에 국민당 정권을 세웠는데, 군벌에 쫓기다가 결국 장개석의 남경정부에 합류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장개석이 항일전에 주력한 데 반해 왕정위는 극우파를 조직해서 유럽의 파시스트 세력과 연합을 꾀했다. 왕정위는 히틀러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항복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정위는 1938년 중경을 탈출해서 운남성 곤명을 거쳐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지나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상해로 갔다. 그는 1940년 3월 30일 상해에서 ‘국민당 정권’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괴뢰정권을 세웠다.
동아일보가 보도한 일본 수상의 성명에 나오는 ‘신지나중앙정부’는 바로 ‘국민당 정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중국침략전쟁을 일으킨 이래 일제는 모택동의 공산당과 합작을 하면서까지 항일투쟁을 필사적으로 전개하는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멸망시키는 것이 최대 목표였다. 일제는 중국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왕정위를 ‘신지나중앙정부’의 수반으로 내세우면서 국민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함으로써 중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이런 역사적 배경과 일제의 불순한 의도는 외면한 채 ‘대일본제국’의 충성스런 나팔수 노릇을 되풀이한 것이었다.
‘천황 폐하’께 바친 마지막 ‘어탄신 봉축’
1940년 4월 29일은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이었다. 동아일보는 그 어느 해보다 성심(誠心)이 어린 필치로 ‘어탄신’을 ‘봉축’하는 사설(「봉축 천장절」)을 올렸다.
신록이 양광(陽光)에 빛나는 때를 당하여 천장가절을 봉영할 적마다 1억 민초는 항상 황은의 광대심후함에 감격을 새롭게 함으로써 봉은경앙(奉恩景仰)의 염을 굳게 하거니와 특히 금년은 황국 웅비를 기하는 기원 2600년이요 사(邪)를 파(破)하고 정(正)을 현(顯)하는 성전을 일으킨 지 제4년, 오늘 폐하께옵서는 제39회의 어탄신을 맞이하옵시와 천기(天璣) 더욱 어가려(御佳麗)하옵시다 하오니 국민은 오직 공구 감격함을 마지않는 바이다. 배승하건대 지나사변의 과정에 있어서 궁중에서는 어하연을 어중지하옵시고 오로지 시국 해결에만 어진념하옵신다 하오니 실로 공구할 뿐이다.
때는 지나사변이 발발한 지 어언 4개년, 성전을 대능위 하에 전선 장병의 충용과 총후국민의 적성(赤誠)으로써 위대한 실효를 발휘하였으며 지나에서는 신중앙정부가 성립되어 맹교(盟交)의 의(誼)를 두텁게 하고 있다. 이리하여 동아 신질서 건설은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였으나 원래의 성전대업의 완성은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라 아직도 전도에는 기다의 난관이 상상되는 바이니 금일의 가신(佳辰)을 당하여 국민은 성업 달성에 경일층의 결심과 각오를 새롭게 하는 기회를 삼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광고(曠古)의 성업을 완성시켜 예려(叡慮)를 봉안하고 성지(聖旨)에 봉부(奉副)하는 것이 사변 중 제3차의 가신을 봉영하는 1억 국민의 충정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삼가 성수(聖壽)의 만세를 봉창하고 죽원(竹園)의 번영을 봉기(奉祈)하며 오늘의 가신을 봉축하는 바이다.
‘언론보국’도 속절없이 폐간당한 동아일보
1940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폐간’을 알리는 ‘사고’가 나왔다.
본보는 총독부 당국의 신문지 통제방침에 순응하여 본호(本號)로써 최종호를 삼고 폐간하게 되었으며 주식회사 동아일보는 금일 본사 회의실에서 개최된 임시주주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20년 동안에 본보와 본사를 위하여 한결같이 편달애호해주신 만천하 독자 제위께 끝없는 감사의 뜻을 표하오며 여러분의 끝끝내 융성하신 행복과 건상을 빌어 마지 아니 합니다.
8월 10일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사 지분국 일동
이 ‘사고’에 나타난 폐간 이유는 딱 한 가지, 곧 “총독부 당국의 신문지 통제방침에 순응”한다는 것뿐이다.
같은 날짜 신문 1면 머리에 실린 「폐간사」는 아래와 같다.
본보는 자못 돌연한 것 같으나 금 8월 10일로써 소여(所與)의 보도 사명에 바쳐오던 그 생애를 마치게 되었으니 오늘의 본지 제6819호는 만천하 독자 제위에게 보내는 마지막 지면이다.
회고하면 제1차 제등(齊藤) 총독 시대의 문화정치의 일단(一端)으로 반도 민중에게 허여(許與)된 언론기관의 하나로서 대정 9년 4월 1일 본보가 화동 일우(一隅)의 추루(楸陋)한 사옥에서 고고(呱呱)의 성을 발한 이래 실로 춘풍추우 20년, 저간(這間)에 사회 각반(各般)의 진운(進運)과 함께 미력하나마 본보가 신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여 조선 문화운동의 일익적(一翼的) 임무를 다하여 왔음은 적이 독자 제위의 뇌리에도 새로울 줄 믿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 당국의 언론통제에 대한 대방침에 순응함에 본보는 뒤를 보아 한 됨이 없고 또 앞을 보아 미련 됨이 없는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제위도 이 점에는 깊이 서량(恕諒)하는 바 있을 줄 믿는다.
무릇 언론기관으로서의 본보의 사명이 결코 새로운 뉴스의 제공에만 그치지 않고 일보 나아가서 변전하는 시류에 처하여 능히 엄연한 비판적 태도와 부동의 지도적 입장을 견지함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이 같은 의의는 특히 과거 조선에 있어서 더욱 광범하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극도로 뒤진 이 땅의 문화적 수준에서 귀결되는 필연적 사실이었다. 이에 오인은 다시금 본사 주최 및 후원의 방계적(傍系的) 제반 사업과 행사에까지 상도(想到)치 않을 수 없으니 그 중에는 적으나마 결실된 것도 있고 또 아직 개화 육성 중의 것도 있다. 그러나 한 번 뿌려진 씨인지라 오늘 이후에는 싹 밑엔 또 새싹이 트고 꽃 위엔 또 새 꽃이 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속담에 일러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거니 20년의 세월은 과연 기다(幾多)의 괄목할 변천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제2차 구주대전의 발발로 말미암아 국제정세의 명일은 거연(遽然) 역도(逆睹)키 어려운 바 있으니 이때 지난날을 반성하면 오인은 온갖 성의와 노력의 미급(未及)에 오직 자괴(自愧)하여 마지않을 뿐이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이때껏 한결같이 연면(連綿)된 독자 제위의 심절(深切)한 편달과 애호에 대해서는 충심의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20년 간 본보를 위하여 유형무형의 온갖 지도 원조를 불석(不惜)하신 사회 각반 여러분의 건강을 심축(心祝)하며 간단한 폐간의 사(辭)를 마치려 한다.
이 「‘폐간사」는 “본보가 신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여 조선 문화운동의 일익적 임무를 다하여 왔”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창간 이래 20년 동안, 특히 1930년대에 일본의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을 옹호하거나 미화한 사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반성도 없다. 그렇게 ‘언론보국’에 열과 성을 바친 동아일보가 왜 “당국의 언론통제의 대방침에 순응”해야 하는 지에 대한 설명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찍이 동아일보가 사가(社歌)를 통해 조석으로 다짐한 대로,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서 의에 싸워 꺾일지언정 휘기를 거절하였던들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친일매국적 지면 제작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아, 조선의 경영주들은 신문을 살려내기 위해 친일적 논설은 불가피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치적 생명이 없는 신문이란 애초에 백해무익으로서 결코 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었다. 거기다 신문이라는 공기가 우리민족 일부의 손으로 제작되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일제에 철저히 장악된 결과 우리민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짓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이 언론매체를 통해 소위 민족지도자들이 토해내는 매국매족적 언설, 행동은 민족의 독립 해방에 어떤 역기능을 했던 것인가는 상상해 보기 어렵지 않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318쪽).
살아남기 위한 동아일보의 몸부림
동아일보사 사주 김성수를 비롯한 경영진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어신문들을 폐간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듣고 백방으로 ‘구구도생(區區圖生)’의 방도를 찾아 나섰다. <동아일보사사 권 1>의 기록을 통해 그 실상을 살펴보겠다.
1939년 9월에 구라파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무렵, 일제는 한인의 ‘황민화’를 내걸고 민족말살정책에 광분, 황민화에 장애가 되는 개인을 제거, 다시 그런 색채가 짙은 단체를 정리할 방침을 굳히어 그 첫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 본보 동아일보였다.
1939년 11월 하순부터 총독부에서는 은근히 자진폐간을 종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듬해 정초에 본보 백관수 사장과 고재욱 편집국장이 연례(年例)에 따라 삼교효삼랑(三橋孝三郞) 경무국장을 방문하였을 때, 그 자리에 동석했던 삼(森) 경무국 간부가 느닷없이 “금년에는 백 사장 얼굴이 더욱 희게 보이는군요” 하면서 연방 싱글거리어, 두 사람은 돌아오면서 불쾌함과 아울러 불길한 암시 같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
이런 일이 있은 지 10여일 후인 1940년 1월 15일 총독부 경무국장 삼교 효차랑이 동아일보 백관수 사장, 송진우 고문, 그리고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을 불러 “(···) 정세가 언론통제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용지 사정도 어려워지고, 후방의 전시보국 체제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어 ‘언론보국’의 기관을 하나로 묶을 방침을 세웠다”고 단정하면서, 두 신문은 시국에 발맞추는 뜻에서 2월 11일 기원절을 기해 폐간, 매일신보와 통합하라고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즉석에서 이를 거부하고, 양사가 결속하여 반대투쟁할 것을 다짐한 후, 계속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으나, 총독부의 방침은 이미 두 신문의 폐간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되어 있었다. 다만 민심의 동요 없이 조용히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자진폐간을 종용할 뿐, 그것은 이미 기한부 강제폐간의 통고나 다름없는 것이었다(382~383쪽).
총독부의 치안총책임자이자 언론 검열과 통제를 지휘하는 경무국장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사장에게 “언론보국의 기관을 하나로 통합할 방침을 세웠다”면서 매일신보와 통합하라고 종용했는데 두 사장이 즉석에서 거부한 뒤 공동으로 반대투쟁을 하기로 했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박약하다. ‘천황 폐하’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진충보국’을 외치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경영자가 어떻게 ‘천황’의 신하인 경무국장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당시 유학 중이던 김상만(김성수의 장남-인용자)이 동기방학으로 귀성 중에 있었으므로 이를 통하여 1월 16일 중도사(中島司, 조선중앙협회 상무)에게 송진우의 친서를 휴대 전달케 하는 한편 송진우 고문 자신이 1월 하순, 총독부의 부당한 처사에 반항하는 최후 수단으로 극비리에 동경으로 가게 되었다. 동경에 도착한 송진우는 당시 귀족원 의원인 우좌미승부(宇佐美勝夫, 총독부 초대 내무국장), 환산학길(丸山鶴吉, 총독부 전 경무국장), 관옥정삼랑(關屋貞三郞, 총독부 전 학무국장), 성영광랑(星永光郞, 전통 사장) 등 국회의원을 비롯, 일본 우익의 거두였던 두산만(頭山滿) 등 정계인사, 당시 탁무대신 소기국소(小磯國昭, 후에 조선총독), 탁무성의 전중무웅(田中武雄, 후에 총독부 정무총감) 등 관료, 전 총독부 고급관료들의 친목단체인 ‘조선중앙협회’ 상무 중도사 등을, 그리고 잡지 <내관(來觀)>을 주재하던 모원화산(茅原華山) 등을 만나 동아일보의 강제폐간을 획책하는 총독부 정책의 부당성과 그 진상을 호소하여 일본 정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키기에 성공하였다. 특히 환산학길, 성영광랑 등은 귀족원에서 정식 발언을 하게 되어 일본의회에까지 문제가 비화하였던 것이다.
(···) 어쨌든 당시의 일본 정계가 떠들썩하게 되자 총독부 당국도 잠시 주춤하게 되어 2월 11일 기원절 기한부 폐간은 우선 넘기게 되었다(383~384쪽).
이 기록을 보면 동경에 간 송진우가 친분이 있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동아일보 폐간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로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야 어떻든 간에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이 본국 정부와 상의도 없이 동아와 조선을 강제폐간하려고 했다고 믿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동아일보사사 권 1>은 총독부가 동아일보를 자진폐간시키는 데 실패하자 ‘경리부정 사건’을 조작해서 간부사원들을 구속하는가 하면 7월 중순에는 사장 백관수까지 구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종로경찰서 사찰과장실에서 이른바 ‘중역회의’가 열리게 되었는데, 백관수 사장은 사원들과의 약속대로 그의 손으로 폐간계에 서명 날인할 것을 거부하나 경찰당국은 발행인 겸 편집인의 명의를 중병 중인 임정엽으로 변경토록 강요, 임정엽 명의로 폐간계를 내게 되었고, 본사에서는 7월 26일 중역회의를 열어 이를 추인함으로써 폐간이 확정되었다(388쪽).
총독부는 ‘언론보국’ 외길을 걸어온 동아일보를 강제로 폐간하려 들고, 동아일보는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 그 길을 계속 달려가려고 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끝에 동아일보는 친일과 매국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한 일제강점기 20년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참고로 여기서 밝혀둘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동아일보가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1936년 8월 29일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다가 1937년 6월 2일 무기정간에서 풀려난 날부터 1940년 8월 10일 폐간을 당하기까지 어떤 지면을 만들었는지에 관한 기록이 <동아일보사사 권 1>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회사의 공식 역사책에 담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일까? 그래서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공백이 되어 있는 그 3년 2개월의 동아일보 지면에 관한 분석과 해석을 다른 데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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