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노래로 새 나라를 세운 동요 작곡가 권길상(權吉相) 선생
Spring (봄)
https://www.youtube.com/watch?v=VtDqtU1FCbA
Spring (봄) · Kim Jiyoon
Composition Album of Celebration for Half Decade of Children's Songs By Kwon Gilsang
Released on: 1995-03-08
‘스승의 은혜’ ‘꽃밭에서’ 동요 작곡가 權吉相(音波) 선생
2015-03-16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로 시작하는 ‘꽃밭에서’를 비롯해 ‘스승의 은혜’, ‘과꽃’, ‘바다’ 등을 만든 동요 작곡가 권길상씨가 2013년 3월 13일 (현지시간) 88세를 일기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동요 '꽃밭에서', '스승의 은혜' 등을 작곡하신 권길상 선생님
권길상(權吉相, 1927년 8월 4일~2015년 3월 13일)은 대한민국의 아동음악가다.
1927년 서울에서 태어난 권씨는 서울대 예술대학 음악부 1회 졸업생으로 해방 후 최초의 어린이 합창단 ‘봉선화동요회’를 만들어 동요 작곡과 노래를 지도하기도 했다. 《스승의 은혜》, 《과꽃》, 《어린이 왈츠》, 《모래성》, 《푸르다》, 《꽃밭에서》, 《둥근달》 , '달', '시냇물', '어린이 행진곡', '바다','대한의 아들 딸' 등 약 200여곡의 동요와 100여곡의 성가와 가곡을 작곡하였다
1948년 서울 무학여중·고를 시작으로 이화여자중·고, 서울예고 등에서 10년 넘게 교편을 잡았다.
35세 때인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글을 가르치는 한국학교를 처음으로 시작하는 등 동요 작곡 및 보급에 나섰고 남가주한인음악가협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아동음악상, 31회 소파상, KBS동요대상, 대한민국동요대상을 수상했다.
희망을 노래한 동요들
겨우내 황량했던 바깥 풍경은, 아직 바람이 차고 메마른 땅에서나마 소리 없이 움터 오르는 고운 꽃송이들을 따라서, 따뜻한 봄의 얼굴로 바뀌어 가게 됩니다. 이제 음력 절기로는 한식과 청명이 들어 있는 이른 봄, 4월이 됐습니다. 길가에도 집안의 작은 뜰 안에도 봄의 온기가 피어오르는 시기인데요. 이 무렵부터 초여름이 될 때까지 남한에서 어린이들이 봄철 내내 즐겨 부르는 동요가 있습니다.
'꽃밭에서'라는 제목으로,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로 시작하는 정겨운 노래인데요. 이 곡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1950년대 초 남한측의 9-28 서울수복이 이뤄진 직후, 동요 작곡가인 권길상씨가 전쟁으로 상처 입은 동심에 희망을 안겨주는 노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지은 노래입니다.
같은 시기에 권길상 선생은, 남한 언론인 문명호씨가 당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나이로 지은 동시 '바다'에 곡을 붙인 동요도 발표했었는데요. 아침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바다의 희망적인 인상을 노래한 이 동요는 권길상씨가 자신이 만든 곡 중 가장 아끼는 곡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희망찬 가사를 담은 동요 '꽃밭에서'와 '바다'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작곡가 권길상 선생은 지난 1927년 서울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교회생활을 통해 음악과 함께 성장한 그는, 자신의 어릴적 친구로 후에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대표적 노래가 된 '우리의 소원'을 작곡한 안병원 선생과 더불어, 그의 나이 18살 때 '봉선화 동요회' 라는 노래모임을 만들고, 나라 잃은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쳤습니다.
이어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대 음대를 졸업한 그는, 한국전이 끝난 뒤, 전쟁의 참화로 그늘진 어린이들의 마음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본격적인 동요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그의 대표작 중에는 평화로운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과꽃과 둥근 달이 있고, 또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푸르다와 산토끼야,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춤곡인 어린이 왈츠도 있습니다.
권길상 선생은 또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제자들의 예절바른 정을 담은 노래로, 해마다 스승의 날이 돌아오는 5월 중순이면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는 노래, '스승의 은혜'도 만들었습니다. 올해(2004)로 74살이 된 권길상 선생은 노래를 좋아하고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생을 어린이를 위한 노래를 만들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살아온 것에 감사한다면서, 어린이들의 깨끗한 마음을 보고 배우며, 맑게 살 수 있었던 것을 은혜로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한편, 남한 정부는 아름다운 음률과 밝은 가사의 동요를 보급해 한국전쟁으로 얼룩진 어린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그의 업적을 기려, 지난 91년 3월 '꽃밭에서'의 악보와 그림을 넣은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해방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민족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준 동요를 짓고 보급해온 작곡가, 권길상 선생의 작품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진행에 자유아시아방송, 최윤정입니다.
“동요사랑 60년,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
- CBS 배한성의 아주특별한 인터뷰
- 2007-09-26 23:23
동요 ‘꽃밭에서’ ‘과꽃’의 작곡가 권길상 선생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어렸을 때 불렀던 이 동요들을 작곡한원로 작곡가 권길상 선생.
해방 후 최초의 어린이 합창단 “봉선화 동요회”를 조직했고,1964년 미국으로 이민 가서 ‘한국학교’를 처음 설립했습니다.남모를 격정과 좌절 속에서도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어서 어린이들을 모아 동요를 가르치고 한글을 가르치며 우리의 얼을 심어주었습니다.
‘한 평생을 어린이들과 함께 지내온 것이 큰 축복이라’고 말하는 원로 작곡가 권길상 선생의 60년 동요 인생을 9월 25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새 동요집 ‘꽃마음 꽃향기’로 고국 찾은 동요작곡의 대부
▶ 한국에 오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일주일쯤 된 것 같은데 추석도 있고 동요집도 하나 새로 나오고 해서 겸사겸사 왔습니다.
이제 80고개를 넘었는데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나이에 대한 생각 없이 젊게 살려고 합니다.
▶ 지금까지 지으신 동요가 200여 편이세요?
더 많이는 못 하고 200편정도 했어요.
▶ 올해 <권길상 새="" 동요곡집=""> ‘꽃마음 꽃향기’가 새로 나왔는데요.
2000년 이후에 최근까지 새로 지은 곡들이 주류인데 그것만 해서는 분량이 적어서 과거에 지은 곡 중에서 계속 불려지고 있는 노래들을 합해서 만들었어요.
◇ 작사가 몰라도 가사 좋아 곡 붙였던 ‘꽃밭에서’
▶ 귀에 익은 친근한 동요들이 많아요. <꽃밭에서> <과꽃> <둥근달> <스승의 은혜=""> <푸르다> <바다> 등등...<꽃밭에서>는 어떻게 만들게 되신 거예요?
<꽃밭에서>는 53년도 초창기 동요에요. 6.25 때문에 51년도에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우리 식구들은 대구로 내려가고 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 내가 잠깐 대구에 볼일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가서 뭘 봤는가 하면 소년잡지를 보게 됐어요. 그 잡지 안에 꽃밭에서 노랫말이 실려 있는데 그걸 읽어보니까 느낌이 와 닿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곡을 붙이면 좋은 노래가 되겠다는 생각에 작곡을 해서 그때는 누가 지었는지 관심도 없었어요. 어효선 작사로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어요. 누가 지었든지 가사가 좋으니까 곡을 붙이겠다 해서 만들었는데 수복을 53년도에 했을 거예요. 53년에 서울이 수복되었는데 YMCA 옛날 건물은 다 부서지고 천막교실을 지어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노래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때 이 노래를 가르쳤어요. 방송은 일본 사람들이 하던 것을 한국 사람들 손으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라서 지금처럼 TV가 있었겠어요, 컴퓨터가 있었겠어요? 아이들이 그저 라디오에 귀 기울이는 일밖에는 없었어요. 매일 저녁 5시인가, 5시 반인가, 어린이시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노래가 방송을 타기 시작했어요. 그게 퍼지니까 대구에서 어효선 선생이 들은 거예요. 당시에 YMCA에 있던 어떤 분이 중재를 해서 둘이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처음 어효선 선생을 만나보게 된 거예요. 53년인가 54년도의 일이에요.
▶ 어효선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셨나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동시도 짓고 동화도 지었어요.
▶ 동요를 접하게 된 계기가 있으실 텐데, 아버님이 개척교회 목사님을 하신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요.
명륜동 2가 111번지가 지금은 명륜중앙교회인데 당시에는 동네이름이 바뀌어서 동서문교회라고도 하고 숭의동교회라고도 했어요.아무튼 예배당에 속해 있는 목사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예배당에서 울려나오는 찬송가 소리가 마음에 녹음이 잘 돼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 심취하고 음악이 좋아지더라고요. 우리 교회는 조그만 교회니까 피아노도 없었고 발로 바람을 넣어서 연주하는 풍금이 하나 있었는데 당시에 누가 찬양대 지휘를 했는가 하면 김생여 선생님이 하셨어요. 그분 부인이 풍금 반주를 하고 후에는 오재경 선생의 부인이었던 신재덕 선생이 반주를 맡았어요. 어깨너머로 그분들 하는 걸 보고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혼자 공부를 한 거예요. 어린 시절이지만 찬송가를 거의 마스터했어요. 혜화초등학교 음악선생님으로 윤형모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분이 내 풍금 치는 소문을 들으시고 자신이 반반마다 돌면서 음악 지도를 할 때 날 데리고 다니셨어요. 풍금을 이동하면서 반주를 시키셨어요. 내 공부는 집어치우고 선생님 따라서 반주만 한 거예요.(웃음) 그러다 보니까 음악생활을 하게 된 거죠.밤이 되면 교인들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전기를 켜면 어른들이 꾸중하시거든요. 불을 안 켜고 깜깜한 곳에서 연습을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생각해도 극성스럽게 한 것 같아요.
◇ 최초로 결성한 어린이 합창단 ‘봉선화 동요회’
▶ 해방 후에 최초로 ‘봉선화 동요회’를 만드셨다면서요?
지금 말하자면 어린이 합창단인데 당시에는 그런 게 없었기 때문에 그냥 동요 좋아하는 어린이들을 모아서 동요회라고 만든 거예요.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가 하면 우리는 명륜동 2가고 바로 명륜동 3가에 안병원 선생이 살았어요. 나보다 한 살 위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로 아주 유명한 분이죠. 이 사람과 소년시절을 같이 살았으니까 잘 알죠. 함께 예배당에 아이들을 모아서 시작했는데 내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을 한 것 같아요. 혜화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주로 모였는데 당시의 어린이들은 지금 생각해 보면 사회의 훌륭한 재목으로 된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 했던 일이 자랑스러워요.
▶ 일제시대 때는 동요가 민족애를 고취하는 방편으로 사랑받기도 했어요.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나 반달의 윤극영 선생님은 앞 세대이신가요?
그분들이 우리 선배님들이시죠.
▶ 서울대학교 음대 1회 졸업생이시기도 해요.
1945년 해방 직전에 현제명 박사가 경성음악학교라는 걸 세웠어요. 그러니까 한참 어려울 때, 일제의 탄압이 가장 고조에 달했을 때 음악학교를 만들었는데 저는 졸졸 따라다녔어요.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배울 거 배우고 심부름할 거 심부름하고 있다가 해방이 되니까 이분이 경성음악학교를 서울대 예술대학 음악부로 편입을 시켜버렸어요.그러는 바람에 제가 서울대학 출신이 돼서 48년에 전문부 졸업을 하게 됐어요.가곡 명태를 부른 오현명 선생도 동기동창이에요. 우리 동기가 이성재, 지휘하던 김만복, 악보 출판하던 이성만이 있어요.그리고 메트로 사중창단 멤버로는 테너 홍진표, 국회의원도 지냈던 조상현, 정익하가 있죠. 바로 6.25가 터진 일요일이었는데 낮밤 공연이 명동 시공간에서 있었어요. 우리 사중창단이 가서 연주를 하고 있는데 낮 공연 때 헌병들이 갑자기 오더니 이거 중지하라고, 6.25사변이 났다고 모두 해산하라고 하더라고요.그래서 그때 헤어졌는데 헤어지고 나서는 한동안 못 봤죠.
◇ 좋아서 한 음악, 어린이 합창단으로 청와대 방문까지
▶ 그때의 상황이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울 때인데 왜 음악을 하셨어요?
음악이 좋으니까요. 생활걱정이니 이런 복잡한 생각 없이 그저 음악이 좋아서 한 거예요.(웃음)
▶ 그러고 나서 중,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을 하셨어요.
졸업하고 나니까 음악선생님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무학여자 중, 고등학교 차사백 교장선생님이 계실 때인데 공립학교인데 소개를 받아서 갔어요. 사실은 총각 선생님이 갈 수 없어요. 공무원이라 일종의 규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도 취직이 됐어요. 그러니까 교장 선생님이 결혼을 서둘렀다고요. 이 사람을 빨리 장가를 보내야 내가 무사하겠다 해서 중신을 서서 집사람을 만나게 되었죠.
▶ 중,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으로 계시면서 사모님도 만나서 결혼하시고, 그런 과정에서 <과꽃>을 지으신 건가요?
그 무렵일 거예요. 역시 같은 어선생의 작사에요. 전 작곡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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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있던데, 그분이 동요를 좋아하셨나 봐요.
부산 피난 중에 한 일이 뭔가 하면 국군과 유엔군을 위문하는 일을 주로 했어요. 처음에는 육군에 소속이 됐다가 부산으로 가서는 해군에 소속이 됐는데 정달빈 목사님이 단장으로 있고 해군정원음악대라는 게 생겼어요. 그 밑에 해군정원어린이음악대라고 해서 안병원 씨가 단장이고 저하고 몇 사람이 지도위원으로 있었어요. 그래서 방을 하나 얻어서 합숙을 시켜서 어린이 합창을 했는데 당시에 어린이가 누가 있었는가 하면 피아니스트 한동일, 바이올린하는 이희춘도 있었고 소프라노 이규도, 안병원 씨의 누이동생 희복이가 있었고 이 사람은 테너 박인수씨와 결혼했어요.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이 사회적으로 활동을 하고 이제는 은퇴를 다 했죠.그런 일을 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청와대 방문이 잦았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할아버지니까 아이들 노래하는 걸 좋아하셨고 프란체스카 영부인도 아이들을 귀여워하셨죠.
◇ 생계를 위한 피아노 레슨, 그래도 음악의 끈은 놓지 않아
▶ 1964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어요. 당시에는 이민을 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텐데 어떤 이유로 가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시무를 하고 계셨어요. 64년이 되기 전에 내가 미국에 한 번 시찰하고 싶다고 해서 다녀왔어요. 다녀와 보니까 형님 곁에서 살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면 이민 수속을 밟아서 식구들 데리고 와라, 그러셔서 64년에 내가 먼저 가고 집사람과 아이들은 65년도에 다 왔어요.
▶ 가서 고생하시지는 않으셨어요?
집사람이 고생했죠. 가서 할 게 없으니까 여자들은 바느질을 해야 해요. 재봉은 집에서도 했었는데 그거 가지고는 어려우니까 재봉 가르쳐주는 곳이 있어서 배워가지고 재봉하는 일을 한동안 했었어요. 나는 나대로 개인지도밖에 할 게 없으니까 피아노 개인 지도를 아이들 집으로 방문해서 하는데 그때는 한국 아이들이 많이 없었어요. 백인, 흑인, 멕시칸 등 다인종의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연결이 되는대로 지도했어요. 우선 그렇게라도 벌어서 생계를 이어갔어요.또 한 번은 백화점 청소를 한다고 했는데 그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하루만 딱 했어요.(웃음)
▶ 64년부터 66년까지 남가주 한인음악가 협회 초대회장을 하셨는데 음악의 끈은 놓지 않으셨어요.
가서 보니까 LA에 한인이 3천 명밖에 없다고 그랬어요. 지금은 서울시 나성구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한국의 일부에요.(웃음)그리고 65년부터 75년까지 나성어린이 합창단을 창단했는데 한인들이 조금씩 늘어나니까 어린이 합창단도 제대로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거예요. 한인들 중에서 음악인들을 모아보니까 전공하는 사람이 10여 명밖에 없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모아서 음악가협회를 만들고 그것도 내가 회장하겠다고 한 게 아니고 서로들 미뤄서 맡아서 하게 된 겁니다. 지금은 돌아가면서 젊은이들이 잘들 하고 있어요.
◇ 노래와 함께 한글도 가르쳐...결실 맺은 ‘남가주 한국학교’
▶ 무궁화 학원도 내셨는데 당시에 학생들이 있었나요?
어린이 합창단을 하다 보니까 어린이 합창단의 학부형들이 노래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줘야겠다는 요청에서 시작됐어요. 그래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한 게 무궁화 학원인데 동지회관이라고 있었어요. 이승만 박사를 도와주던 그룹이 있었는데 그게 동지회에요. 그 동지회관의 책임자로 계시던 서홍철 선생을 이사장으로 모시고 그 건물을 쓰겠다고 하고 거기서 시작을 했어요. 처음 시작이야 미미했죠. 내가 한글 교육을 전문적으로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아이들이 좋아서 가르치자는 단순한 생각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시작은 했는데 그 후에 열기와 관심이 높아지니까 더 잘 가르쳐야 되겠다 생각했는데 뜻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왔어요. 이사회도 조직하고 멤버들도 많아지니까 나는 얼른 후퇴하고 젊고 유능한 사람들 보고 하라고 내놨더니 은퇴 이후에 발전이 되었는데 남가주 한국학원이라는 이름으로 규모도 커지고 각 지역마다 주말학교가 생기고 그것도 부족해서 정규학교도 만들었어요. 사립학교로서 지금은 한인이 경영하는 미국학교로 자리를 잡아서 잘 운영하고 있어요.
▶ 70년대 재미동포들의 경제사정은 다 어려웠잖아요. 생계 때문에 바빠서 자제분들 교육에 관심을 쏟지 못하셨을 것 같아요. 우리 집은 다행히도 아이들이 4남매인데 자기들 맡은 공부는 알아서 잘 해 줬어요. 특별히 여기 식으로 과외 공부도 안 시키고 그냥 학교에서 배운 걸로 제 갈 길로 잘 갔어요. 부모로서 해 준 게 하나도 없지만 제 구실은 잘 하고 있죠.
▶ 지금도 미주동요 사랑회를 맡고 계신가요?
아니에요. 만들기만 하고 그것도 젊은이들에게 다 맡기고 뒤에서 지켜봐주고 후원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상임이사로 초대이사장은 지냈지만 자리만 지키는 거죠.
▶ 당시의 아이들의 심성에 꼭 필요한 게 우리의 동요가 아니었을까요?
학부형들이 호응을 해 줘서 할 수 있었어요. 학부형들이 무관심한 자녀들에게는 응할 수 없었지만 부모님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커지기도 한 겁니다.지금도 후회스럽지 않아요. 평생을 일관되게 딴 길로 안 가고 오늘까지 온 것에 감사할 뿐이죠.
▶ 선생님 동요 <꽃밭에서>가 우표로 나오기도 했어요.
91년에 고국방문을 해 보니까 바로 내가 도착하던 날 우표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미리 안 것도 아니고 나온 당일에 안 거예요. 우체국에 가니까 많이 없어지고 나도 몇 장 못가지고 갔어요.
▶ ‘바다’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던데요, 작곡한지 40년이 지나서 문명호 씨를 만나셨다고요?
문명호가 누군지도 몰랐어요. 어른인지 아이인지 모르고 글 내용만 보고서 곡을 붙였어요. 음악평론가인 이상만씨라고 있는데 하루는 바다를 작사한 문명호 씨를 만날 마음이 있느냐고 그래요. 그럼 우리 만나보자고 해서 만났는데 워싱턴 특파원으로도 가 있었고 신문사 논설위원도 지냈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어효선 선생 때와 똑같아요. 누구 작품인지 모르고 만나서 이야기를 한 거죠. 자기도 곡이 있다는 걸 몰랐는데 자기 친구가 노랫말에 곡이 붙어서 아이들이 부르고 있더라고 알려주더래요. 그 얘기를 듣고서 처음 알았노라고. 서로 바쁘니까 자주 연락을 못했어요.문명호 씨가 5학년 때 집 2층에서 인천 앞바다를 내다보면서 살았대요. 그래서 5학년 어린이의 작품이라는 걸 아니까 더 친밀감이 느껴지더라고요.
▶ 어효선 선생님이 3년 전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때 심정은 어떠셨어요?
섭섭한 마음이야 다 마찬가지인데 떠나기 얼마 전에 어선생과 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게 자꾸 생각이 나요. 식사할 때 하던 말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 추어탕 살 거야.” 그 말을 하면서 이계석 선생이랑 우리 몇 사람과 함께 연지동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 머물 때인데 거기 골목을 내려오면 추어탕 집이 있어요. 추어탕을 사 주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전에도 같이 회식은 했지만 그룹으로 모여서 식사를 했지 자기가 나를 사 준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내가 사 준 일도 없고. 그래서 그 말이 늘 맴돌아요.
▶ 동요 제목을 보니까 꽃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꽃을 좋아하시나 봐요.
꽃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래서 이번 책 이름도 ‘꽃마음 꽃향기’에요. 결국 꽃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 결혼 60주년을 앞두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내년이면 60년을 같이 산 게 됩니다.
◇ 동요사랑 60년,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
▶ 60년이 넘게 동요 인생을 살아오셨는데 선생님의 동요 철학을 듣고 싶습니다.
어른들의 사회를 보면 복잡한 일이 너무 많아요. 동요를 가정에서 애창을 하게 되면 어른들이 정서적인 안정을 갖게 되는데 어른들이 안정을 가져야 어린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유행가를 따라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그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가정에서 어른들이 그러니까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동요를 잊지 말고 사랑하자고, 얼마 전에 뉴욕에 가서도 이렇게 말을 했더니 그곳에 아직 동요사랑회가 없는데 이제 조직해보겠다고 하더라고요.
▶ 마지막으로 권길상 선생님의 새 동요곡집 ‘꽃마음 꽃향기’ 들으면서 인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빨간 꽃은 빨간 마음노란 꽃은 노란 마음알록달록 예쁜 꽃마음 예쁜 꽃마음
빨간 꽃엔 빨간 향기노란 꽃엔 노란 향기새록 상큼 예쁜 꽃향기 예쁜 꽃향기
범나비 훨훨 알록달록 꽃마음온 세상에 실어날라요.
범나비 훨훨 새록상큼 꽃향기온 세상에 실어날라요.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권길상 작곡 우리 동요 24곡 모음
https://www.youtube.com/watch?v=vPvXACwrL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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