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v and Arts

영산지 못가, 물새가 부러웠던 소녀가~

류지미 2023. 5. 3. 09:17

얼마전(2022년 10월),
시인의  딸은 세상에 하나뿐인 보따리를 떠나 보냈다.

70여년 오랜 세월 외로이, 어렵게 지키고 간직해온 시인의 유품.
가족의 슬픔과 그리움이 묻어 있고  쌓인 보따리...
  
대구시 아카이브로 떠나보내는 칠순을 넘긴 시인의 딸은 부탁이 하나 있었다.
동요시인  아버지가  제대로 조명되고 기억되길 바란다는 것뿐~!

~
가슴 아픈 슬픈 민족의 근 현대사 격랑이 소용돌이치고간  파란만장한 역사의  뒤안길에,
..............
우두커니 서 있는 이 순간.


필명은 김수향(金水鄕) 혹은 김귀환(金貴環).
이원수(李元壽), 윤석중(尹石重)과 함께 일제시대를 대표하는 동요시인.
'기러기', '망향'의 시인..

일제강점기 작사가이자 아동문학가로 활동한 윤복진(尹福鎭,1907~1991)은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호세이 대학교를 나왔으며 일제강점기와 해방기를 통틀어 윤석중과 함께 최고의 아동문학가로 평가받는 인물.

그러나 6·25전쟁 와중에 월북, 해금된 1988년까지는 일부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모르고 잊혀진 이름, 비운의 문학가다.

윤복진(尹福鎭,1907~1991)의 1936년 당시 모습. /대구시

윤복진 작사, 박태준 작곡에 이인성이 표지를 그린 동요곡보집 '물새발자옥'.(1929)  /대구시



해저문 바닷가에 물새 발자욱
지나가던 실바람이 어루만져요
그 발자욱 예쁘다 어루만져요




물새 발자욱
윤복진 시, 박태준 곡 - 바리톤 황병덕
*
황병덕 : 일본 동경음대 졸, 연세대음대 교수 및 학장역임, 미국 미드웨스트대학교 박사.
https://www.youtube.com/watch?v=NwdQdXo395c 


1920년대 소년 문예운동을 함께한 윤복진과 윤석중, 신고송, 서덕출, 최순애와 이원수 등  조선의 소년문사들.

윤복진이 조선일보 필자로 활동하던 즈음 이육사 시인은 기자로 활동했다.

1930년대 이근무의 무영당백화점 악기부는 이근무와 박태준, 윤복진, 이인성, 김용조 등 대구의 문예인들이 모이는 아지트.

그들을 만나러 홍난파가  대구(무영당)를 찾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시인이  윤복진을 만나러  무영당 백화점을 드나들었다..

                                           작곡가 박태준과 윤복진이 함께 묶은 악보집 물새발자옥 내지(1929)


4대 독자였던 윤복진은 6·25 전쟁기 월북하면서 고향 대구에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세 명의 딸들을 남겼다.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웠을 리 없다. 고향에 남은 가족들은 일평생 거주지를 옮기지 않았고, 늘 대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굴곡진 대한민국 근·현대사 속에서 월북한 가족을 둔 사람들의 일상이 어땠을지는 짐작할 수조차 없다.

아들이 그립고 걱정될 때마다 아들의 책을 태우며 시간을 보냈다는 어머니의 마음, 모두를 두고 떠나버린 남편을 생각하는 아내, 어린 시절 헤어진 탓에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아버지의 유품을 바라보는 딸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딸은 자신이 일흔을 넘기고서야 아버지가 진심으로 그리워졌다고 했다.


월북 이후 동요 시인은
남한에서는 잊혀진 동요시인이 되었고,
북한에서는 '동요의 할아버지' 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현역작가로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벌였다.

1991년 7월 16일 평양에서  '망향'의  시인은  '고향하늘'로 날아갔다.

 

 

~'망향' 시인이 날아간 ~

고향하늘(故郷の空)

https://www.youtube.com/watch?v=nYijPsPJELI&t=11s 

1927年大邱で作られたこの童謡は、1930年には既に日本に住む人達の中で歌われてたと伝えられています。故郷を追われた幼き人達の情緒を真実に反映した歌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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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말합니다.

“평생 내겐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내 입학식에도, 졸업식에도, 결혼식에도,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아버진 없었습니다. 그렇게 지독히도 미워했고 원망했던 아버지, 하지만 난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했습니다. 아버지가 필요했고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딸은 말합니다.


“아버지가 어릴 적 놀았던 영산지 못가에서 물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 물새가 부러웠습니다.

날개가 있으니 어디든 오고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물새가 되어 오시기도 했으리라.

월북작가 윤 복진이 아닌 순수 동시작가 윤 복진으로. 아버지 윤 복진으로….”

 

1920년대 영선못과 주변마을

1933년 영선 못

 

대구 남구 대명동 영선시장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영선못

 

조선시대 말엽에 이 지방에 살던 한 고관이 있었는데 한 도사가 이 땅에 큰 못을 만든다면 나라에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하여 이 곳에 못을 만들어 그 물로 대명동 일대의 수십만평의 논ㆍ밭에 수원지 역할과 장마철에는 홍수 조절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이 못은 매립되어 영선시장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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