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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of Bhutan

류지미 2023. 6. 22. 10:11

 

 

 

Buddhist stupas in Paro, Bhutan, where the Trans Bhutan Trail begins. 

 

부탄 Bhutan

부탄 왕국, Kingdom of Bhutan

 인구: 793,302명 (2023년 추계), 면적 : 38,394.0㎢ , 수도 : 팀부,  정부/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 양원제

민족 구성 :  보태족(50%), 네팔인(35%), 토착부족

언어 :  영어,종카어

종교 : 티베트 불교(75%), 힌두교(25%)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 수도는 팀부이다. 북쪽과 서쪽으로는 티베트 고원, 남쪽과 동쪽으로는 인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국민은 보태족, 네팔인, 토착부족과 기타 이민족 등으로 구성된다. 종교는 불교이나  문화는 인도 북부와 미얀마에 사는 티베트 미얀마족과 더 가깝다. 농업 국가이며 인도로부터의 경제의존도가 매우 높다. 본래 왕정 국가였으나 2008년 위로부터의 민주화 정책이 실시되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했다.

 

부탄(Bhutan)의 국기

히말라야 산맥 티베트 고원 최남단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 북쪽과 서쪽으로는 중국의 티베트 고원, 남쪽과 동쪽으로는 인도와 경계를 이룬다. 1865∼1949년 대외적인 업무에 영국 정부의 '권고'를 따르는 한편 영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위치에 있었고, 1949년 인도와 협약을 맺은 후에는 인도가 영국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대영제국).

 

 
 
 
 

자연환경

부탄은 자연적으로 뚜렷한 3개의 지역, 즉 대(大)히말라야 산맥, 소(小)히말라야 산맥, 두아르스 평원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부탄 북부지역은 대히말라야 산맥에 자리잡고 있다. 7,300m 이상의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있으며 3,700∼5,500m에 이르는 높은 계곡들이 북부의 거대한 빙하지역에서 아래로 뻗어 있다.

기후는 건조하며 고산지의 목초지에서는 여름 동안 야크를 방목한다. 대히말라야 산맥 북쪽에는 티베트 고원의 끝자락을 이루는 몇몇 산들이 있어 남쪽과 북쪽으로 흐르는 강들 사이의 주요분수령을 이룬다.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어온 주민들의 생활방식이 1960년경까지 이어졌으며, 부탄의 상인들은 티베트로 통하는 고개들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옷감·곡물들을 가져가서 소금·양모·야크떼들과 바꾸어오는 등 전통적 방법으로 교역을 했다. 그러나 1950년대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되면서 중국 통치하의 티베트에서 온 많은 피난민들이 대히말라야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따라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평화로운 고립은 깨어지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들도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히말라야 산맥 줄기는 남쪽으로 방사상으로 뻗어 소히말라야(또는 내히말라야) 산맥을 형성한다. 소히말라야의 남북방향으로 뻗은 산맥들은 부탄의 주요강들 사이의 분수령을 이룬다. 산코시·마나스 강들은 블랙마운틴 산맥을 경계로 갈라져 흐른다.

 

습기 많은 남서계절풍에 영향을 받는 정도와 고도에 따라, 비와 바람이 많은 경사면의 빽빽한 삼림에서 높은 고도의 고산식물지대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식물군이 활발히 성장하고 있다. 부탄 중부의 몇몇 비옥한 계곡들이 소히말라야 산맥의 1,500∼2,700m에 이르는 고도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계곡들은 비교적 넓고 평평하며 강우량이 적당해(연강우량 1,016∼1,270㎜ 또는 그 이하) 인구밀도가 높고 농업이 이루어진다. 산악지역에는 17세기에 처음 세워지기 시작해 행정본부 등으로 쓰였던 요새사원(dzong)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내히말라야 남쪽지역과 그 산기슭에는 두아르스 평원이 부탄 남부국경을 따라 13∼16km 너비로 길고 가느다랗게 펼쳐져 있다. 이 평원을 통해서만이 주요강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나 있는 중요 교통로들을 거쳐 내히말라야의 비옥한 계곡지대로 들어갈 수 있다. 연간강우량 5,080∼7,620㎜의 다우지인 두아르스 평원 전지역은 고온다습하며, 빽빽한 아열대 삼림과 덤불로 뒤덮여 있어 거주지로는 적당하지 않다.

 

평원 북부는 울퉁불퉁한 지형의 거친 산지와 바로 접하고 있으며,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자리잡은 산기슭의 작은 마을들 외에는 대부분 산지지역이 빽빽한 초목으로 덮여 있어 코끼리·사슴·호랑이를 비롯한 다른 야생 동물들이 많이 서식한다. 인도와 국경을 이루는 남부지역 대부분이 빽빽한 대나무숲과 대초원지대이며, 초원지대의 상당 부분은 벼를 경작하기 위한 경지로 개간되고 있다.

 

포브지카(Phobjikha)산

 

 

국민

주로 부티아(보테), 아삼인, 구룽족을 포함한 네팔인 등의 세 민족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로 정착한 민족일 것으로 여겨지는 아삼인은 근처 인도지역에서 온 인도몽골족으로, 부탄 동부에 정착하고 있으며 현재 부탄 인구의 1/8 이상을 차지한다.

불교를 믿지만 문화는 오히려 인도 북부와 미얀마에 사는 티베트미얀마족과 더 가깝다. 인구의 3/5 이상을 차지하는 부티아인들은 티베트에서 남하한 민족으로 현재 부탄의 정치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부탄 북부·중부·서부에 거주하며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다양한 티베트 방언을 쓰는데, 부탄의 공용어인 송카어가 그중 가장 널리 통용된다.

 

가장 최근에 정착한 네팔인은 인구의 약 1/3을 차지하며 부탄 남서부에 살고 있다. 네팔어를 쓰고 힌두교를 믿는다. 네팔인 인구가 늘어나자 부탄인들은 1959년 네팔인의 이주를 금지했으며, 부탄에서 그들의 이동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남부 국경지대에는 인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부탄의 연간 인구증가율은 1993년 -1.6%로 최하치를 기록한 뒤, 점차 회복되었고 1999년 2.8%까지 회복한 뒤 다시 감소추세로 이어지고 있다. 2020년 기준 연간 인구증가율은 1.12%이다. 2023년 추계인구는 79만 3,302명이며, 전체 인구의 27%가 15세 이하의 유소년층이다.

팀푸 체추(Tsechu) 축제에서 전통 춤을 추는 모습

 

정치·사회·경제

부탄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2008년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정책이 실시되어, 상·하원이 설립되었고, 입법부·사법부 등의 기관이 세워졌다. 이때 제정된 신헌법에는 왕축 왕조에 대한 법률도있는데, 이 법률에는 왕의 혈통은 보장되나 왕의 장기 집권을 막기 위해 65세가 되면 은퇴해야 한다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제도적으로는 군소 정당의 난립을 방지하고 정국 안정을 위해 양당제를 도입했다. 1차 투표를 통해 1당과 2당을 정하고, 2차 투표를 통해 의석 배분을 결정한다. 상원의원은 25명으로 임기는 4년이며, 하원의원은 47명으로 임기는 5년이다.

부탄의 경제는 주로 농업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민 대부분이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는데, 과일, 채소 및 쌀·콩·옥수수·감자·보리·밀·메밀 등을 비롯한 곡물류를 재배하며, 소·돼지·양·염소·야크·조랑말을 기른다. 목공예·금속공예·직물제품을 생산한다. 시멘트 등의 상품과 식품 대부분이 인도로 수출된다. 인도로부터의 경제의존도가 매우 높다. 수출의 약 90%, 수입의 약 70%를 인도에 의존하고 있다.

                                                    부탄의 수도 팀부(Thimphu), Aerial view of Thimphu

 고대~근대사

지진과 화재로 인해 역사적인 사료가 될 문서들이나 역사서들이 대거 소실당해, 19세기 이전의 역사는 개괄적인 파악이 가능한 선에 머무른다. 부탄 현지에선 부탄에 처음 정착한 민족을 샤르초프인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인구조사를 할 때는 같은 한장어족이고 불교가 대다수라는 이유로 보티야인과 샤르초프인을 그냥 같이 묶고 네팔계만 따로 분류할 때도 있다.
 
그러나 보티야인들과 같은 티베트 계열이 중국어파와 분리된 것은 이미 선사시대에 있었던 일인 반면 샤르초프인들은 기원전 2세기에야 분리되었기 때문에  그 사이 많은 차이가 생긴 데다가, 인도의 영향으로 아삼어를 모국어로 쓰는 샤르초프인들도 있기 때문에 보통은 샤르초프인도 따로 집계하는 일이 더 많다.
 
그런데 티베트 쪽의 역사 기록을 보면 고대로부터 부탄 땅을 로몬(Lhomon, 남쪽의 어두움)이나 몬율(Monyul, 어둠의 땅)이라 부른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샤르초프인들이 정착하기 전 이미 벵골인들이 선주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방향으로 딱히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7세기에 티베트를 통일한 송첸감포가 부탄에 2개의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9세기 경 인도의 승려 파드마삼바바가 부탄에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이러한 티베트인들의 남하는 꾸준히 이어졌다. 이외에도 구전되어 오는 전설이나 야사들에 따르면, 몽골에서 온 군인들이 부탄을 침략하면서 당시 부탄을 아끼던 공주가 항복을 거부하다 죽으면서 늪지 거머리가 되어 세계최강의 몽골군의 침략을 막아주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전설의 진실여부를 떠나 외부 세계 최강대국 침략자들도 이 산악지대를 공격해도 이로부터 별달리 얻을 이득이 없었기에 부탄의 땅은 늘 평화를 유지했다고 한다. 때문에 옛날 몽골 제국이 침략전쟁을 벌일 때와 청나라 만주족이 티베트를 침공하였을 때 다른 유목민족들이 티베트를 정복하자 일부 티베트인들이 부탄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인도나 중국의 기록들에는 15~16세기에는 왕과 승왕(僧王)이 따로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력을 누렸으며, 지방 영주들이 자치적으로 산악령에서 권력을 가지는 봉건제와 같은 정치적 구조를 가졌다고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1627년에 포르투갈인 예수회 선교사 이스테방 카셀라(Estêvão Cacella)와 주앙 카브랄(João Cabral)이 부탄을 지배하던 까규빠의 승려이자 영주인 응아왕 남걀(Ngawang Namgyal)을 알현하고  망원경을 바쳤으며, 티베트의 침공에 대비하는 차원의 군사적 지원을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응와왕 남걀은 이를 거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저 지원해주는 게 아니라, 가톨릭 개종 및 가톨릭 선교 자유화와 같은 종교적인 조건을 내세웠으니 거절했던 것. 그리고 남걀은 이런 지원 없이도 티베트 침공을 막아냈다.

17세기 경, 티베트의 5대 달라이 라마 아왕롭상갸초는 전 티베트영역과 그 영향력하에 있는 작은 왕국들을 통합하려는 목적으로 1629년, 1631년, 1639년, 1647년에 걸쳐 무려 4차례나 부탄을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악이 받친 티베트는 몽골의 지원을 받아 1714년에 또다시 부탄을 공격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지금도 부탄에는 티베트와 싸우던 요새 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로써 결과적으로 동족인 티베트와 부탄은 완전히 갈라지고 말았다. 물론 부탄 또한 같은 티베트계 국가인 옆동네 시킴을 몇 차례 침공한 전력이 있으니 완전한 피해자는 아닌 셈이다. 게다가 외세인 영국군과 함께 동족인 티베트로 쳐들어간 적까지 있다. 사실 다른 티베트계 왕국인 무스탕 왕국 역시 네팔의 편에서 티베트와 싸우다가 네팔로 편입되기도 하는 등의 일도 있었다.

1864년 부터 일어난 앵글로 부탄 전쟁에서 패배하고 영국에 일부 영토를 할양한다.

1903년 티베트에 같이 침입한다.

1907년에 동부지방 영주이던 우겐 왕축 절대군주제를 선언하며 왕축 왕조가 세워졌다. 이후 친영정책을 펴며 영국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지방영주세력이 차지하던 영토를 통합해나가며 현재의 부탄 영역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영국이 부탄의 수장격이었던 우겐 왕축을 국왕으로 정식공포하면서 비로소 세계사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대신 1910년 외교권을 영국에 양도하며 보호령이 된다.

현대사

1949년 8월 8일에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지만, 사실 부탄의 영토 안에는 별다른 자원이 없기 때문에 인도가 겪은 것과는 달리 영국의 착취가 없었고, 따라서 반영 감정은 그리 없었다고 한다. 기껏해야 일부 영국인들이 각박한 사회가 싫어서 조용하게 살고자 찾아오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국이 부탄을 식민지화한 것은 1800년대 말에 서방의 나라들이 아시아의 시장을 놓고 경쟁하던 때, 부탄의 지형적인 요건이 영국 육군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곳의 험준한 산악 지형은 공격하기는 어렵지만 지키기는 쉽다.

종교적으로도 같고, 민족도 티베트계들이 대다수인 부탄이었기에 이웃 티베트를 큰형님 나라로 우대하였으나, 중국군이 티베트를 침공하고 중국에게 정복당하면서 시킴이나  같은 라다크 지방과 남티베트 일대의 다른 티베트계 작은 왕국들이 혼란에 빠진 끝에 친인도측에서 집권하였다가 인도를 불러들여 인도에게 합병된 것과 달리, 부탄은 독립국을 유지하였다. 더하여 이전 영국의 속국 시절 때부터 인도에게 외교권을 넘겨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지만, 부탄은 청나라의 식민지였다가 이제는 중국의 침공으로부터 살아남고자 더더욱 친인도 성향이 되었다.

물론 부탄이 인도를 완전히 맹목적으로 믿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도 방면 역시 최소한의 경계는 하고 있다. # 다만 중국의 위협이 대체로 인도의 경제적 종속보다 훨씬 위험하므로 대체로는 친인도 성향을 따르는 것이다.

민주화

부탄은 예로부터 절대왕권을 추구해 왔지만 왕축 왕조에 대한 여론은 매우 긍정적일 뿐 아니라, 교육수준이 높다고 보기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식인 계급에 속하는 국민이 매우 많다. 지식인조차 대부분은 민주주의를 도입하자는 의견을 개진하지 않을 정도이니 의회는 물론이고 국민조차 절대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바꾸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는 지그메 싱계 왕축 국왕 자신부터 경제보다는 행복지수에 중점을 두고 이른바 행복 정책을 펼쳤기 때문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왕정에 별 불만이 없었고 의회 역시 민주주의로의 파격적인 변화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2002년 부탄의 언론 자유 지수가 170위권에서 발전함에 따라 국왕이 몸소 적극적으로 나서서 민주주의를 주창하였고, 결국 국민들은 마지못해 국왕을 좇아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위로부터의 민주화을 이행했다.

2008년 3월 24일 총선을 실시해 하원을 구성함으로써 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화하였지만,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충성스럽기 때문에 왕의 삼촌이 이끄는 평화번영당이 엄청난 압승을 거두었다. 이는 5년 뒤(2013년 7월 13일 선거) 야당이었던 인민민주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정권 교체를 이루어 끝났다.

물론 부탄에도 1990년 민주화 시위가 발생한 적은 있었다. 이는 네팔계(系) 탄압과 민주주의를 원하던 젊은 층의 욕구와 관련이 있으며, 당시 인도로 망명한 민주화 인사도 있었다. 또한 당시 네팔의 마오주의 반군(현 여당)의 영향으로 부탄에서도 민주화와 왕정 철폐를 요구하는 인민전쟁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여기에는 다소 복잡한 뒷이야기가 있다. 노동력으로서 유입된 네팔계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버린 시킴 왕국이 1975년 인도에 합병되었고, 1990년 네팔의 왕권이 약화되고 선거제가 도입되었을 당시 네팔계 부탄인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다방면으로 더욱 넓히기 위하여 부탄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이에 앞수레가 전복되면 뒷수레가 경계한다고 제2의 시킴이 될 것을 우려한 부탄 정부가 네팔계 사람들이 부탄에서 강제로 축출하였고, 거기에 불만을 품은 네팔계 사람들은 인도의 무력을 빌려 부탄에서 네팔계와 힌두교의 입지를 넓히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인도로서는 여러 면에서 친(親)인도파인 부탄을 뒤엎을 생각은 전혀 없었으므로, 오히려 부탄에게 네팔계 사람들의 행보를 일러 주고 좋을 대로 처리하라며 좌시하였다. 결국 네팔계 사람들을 더욱 많이 축출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러한 흐름의 여파로 민주화를 주장하던 다른 부탄인들까지도 네팔계로 몰리는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행복론으로 행복정책을 펼쳐서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준 뒤에 민주주의를 이룬 부탄 국왕의 전통은 그의 아들인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말 그대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중이다.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국왕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이고 부탄 입헌군주제의 첫 번째 왕이며, 또한 전 세계 독신 지도자 중 가장 매력적인 배우자 감 5명 중 한 명으로 뽑힐 정도로 미남이다. 심지어 그는 오지에 사는 국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고자 직접 배낭을 멘 채 걸어서 찾아가기도 한다.
 
2011년 5월 20일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국왕은 10살 연하의 일반인인 제선 페마와 결혼할 것을 발표하였다. 제선 페마 또한 영국 리젠트 대학에 재학한 유학파로, 결혼식은 2011년 10월 13일 검소하게 치러졌다.
 
 
 헌법을 통해 왕의 재위에 관련한 법률이 생겨났다.
부탄을 다스리는 왕축 왕조의 국왕은 다음의 사항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민주주의를 설립하나 국왕은 그대로 유지하는 입헌군주제로 전환한다. 왕의 혈통은 이어진다.
그러나 왕의 장기 집권을 막기 위해 왕은 65세가 되면 반드시 은퇴해야 한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전에는 부탄의 모든 국민에게 뜻을 물어 과반수면 즉위를 할 수 있다.
또한 왕이 폭정을 일삼을 때에는 의회가 왕의 폐위 투표를 개최할 수 있으며, 국민의 3분의 2가 왕의 폐위에 찬성하면 왕은 즉시 폐위된다.

 

역사

부탄 역사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남쪽으로 이주하던 티베트인들이 9세기초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17세기에 티베트에서 온 영향력있는 라마교 승려 솁톤 라 파가 부탄의 왕이 되었고 다르마 라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부탄은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실체를 이루게 된 듯하며 그후 라 파의 뒤를 이은 돕게인 솁톤이 펜로프(영주)·중펜(성주)들을 임명하는 등 부탄의 행정 체계를 공고히 했다.

그의 후계자는 정치와 종교 양 측면에서 권력을 행사했던 돕게인 솁톤과는 달리 종교적 역할만을 담당하는 한편,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대리인을 세워 데브 라자의 칭호를 주고 그에게 모든 정치 실무를 담당하게 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영역에서는 다르마 라자, 정치실무면에서는 데브 라자가 통치하는 2원(二元) 통치형태는 20세기초 마지막 다르마 라자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영적 지도자인 다르마 라자라는 직위는 죽은 다르마 라자의 윤회(輪廻)가 입증되었다고 여겨질 때 승계되었는데, 마지막 다르마 라자가 죽었을 때에는 이러한 영혼의 윤회를 찾아볼 수 없었고, 따라서 이 직위와 이에 대한 예배의식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9세기에 부탄은 세력을 확장하려는 여러 지방영주(penlop)들이 벌인 연이은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데브 라자의 직위는 이론상으로는 펜로프들과 중펜(jungpen : 요새 통치자)들의 협의회에서 선출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가장 세력이 큰 통치자, 즉 파로(Paro)의 펜로프나 통사(Tongsa)의 펜로프가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데브 라자가 임명하기로 되어 있는 펜로프도 실제로는 이 직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의해 결정되었다.

 

여러 해 동안 반역과 전쟁이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일어났고, 여기에서 패하여 중펜이나 펜로프의 자리를 잃게 된 자들은 다시 권력을 잡을 기회를 노렸다. 1907년 오랜 기간 가장 강력한 펜로프로 떠올랐던 통사의 펜로프가 둑곌포(왕)가 되어 영국에 의해 부탄의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습왕조를 수립했다. 그의 손자인 지그메 도르지 왕추크는 개화된 통치자로서 가능한 한 전통적 가치들을 보존하면서 국가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발전을 추구하려 했으며 1972년 그가 죽은 후 대를 이은 아들 지그메 싱예 왕추크 역시 진보적인 정책을 계속 펴나갔다.

 

시그메 싱예 왕추쿠는 2006년 아들 남미엘 왕추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한 남미엘 왕추크는 부친의 진보적인 근대화 정책을 발전시켜, 2008년 3월, 하원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를 실시했다. 100년 이상 지속해 온 왕정을 종지부 찍고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 선거로 부탄의 양대 정당인 여당 부탄평화번영당(DPT), 야당 인민민주당(PDP)이 탄생했다. 첫 총선에서는 평화번영당의 압승이었으나, 2013년의 선거에서는 인민민주당이 역전했고, 2018년 10월 총선에서는 소수당이었던 부탄통합당(DNP)이 정권 교체에 성공하면서 신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부탄 사원의 종

 

외교

부탄은 54개의 유엔 회원국, 그리고 유럽연합 직접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놀랍게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전체와 수교하지 않고 있다. 물론 직접 외교 관계가 없어도 미국, 영국, 독일 등 명예영사관 등을 통해 비공식 교류를 하는 경우도 있고, 부탄과 개별적으로 직접 수교하지 않은 유럽 국가라도 유럽연합 회원국이면 유럽연합을 통해 간접적 관계가 유지되고 교류가 이루어진다. 인도를 통하여 외교가 이뤄지면서 인도와 외교권을 가진 나라들은 거의 간접적으로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부탄인이 국외로 올 일은 거의 없고 소수의 관광객이 부탄을 방문해도 높은 치안 덕분에 크나큰 문제도 없기에 국외 대사관들은 굉장히 한가롭게 일한다는 말이 있다.

부탄과 한국의 관계

부탄과 한국과의 관계

 

외교

부탄은 한국과 1987년 9월에 수교했다. 양국은 아직까지 주재 공관을 설치하지 않았는데 한국은 주 인도 대사관이 겸임하며 부탄은 주 방글라데시 대사관이 겸임한다. 부탄은 외교관계 수립 후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부탄은 2010년 10월에 틴레이 총리가 방한한 이후 몇 차례 장관급 방한이 있었으며, 한국은 2010년 4월에 이용준 외교차관보, 2011년 5월에 신재현 대통령특사가 부탄을 방문한 바 있다. 한편 부탄은 북한과 미수교 상태이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2019년 기준 부탄의 대한국 수출액은 1만 달러, 수입액은 202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정밀화학제품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중장비 자동차, 가전제품 등이다. 한국은 1987년부터 2017년까지 부탄의 경제개발을 돕기 위해 총 939만 달러를 무상으로 지원했고, 2015년까지 10만 달러를 투자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2017년 기준 부탄에는 8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부탄의 수도인 팀부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2018년 12월 기준 18명의 부탄의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