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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1300리, 왜관철교(倭館鐵橋 Waegwan Railroad Bridge)

류지미 2023. 8. 20. 21:49

낙동강 1300리 종주,

칠곡 왜관철교(漆谷 倭館鐵橋  Waegwan Railroad Bridge)

1905년 개통

2006년 12월 4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406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 때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려고 미군 제1기병사단에 의해 경간(徑間) 1개가 폭파됨으로써 북한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역할을 한 유적이다.

콘크리트 교각으로 화강암을 감아 의장이 화려하고 지면에 닿는 부분을 아치형 장식과 붉은 벽돌로 마감하는 등 근대 철도교에서 보기 드물게 장식성이 높다.

 

 

 * [하빈 지하차도]→ 낙동강 강안, 직선의 바이크로드→ [하목정]→ 성주대교→ 하빈 강변야구장→ 하빈생태공원→ 문산정수사업소→ 영벽정→ 매곡취수장→ [강정고령보]

 

* [성주군 용암면 동락리] ← 서쪽에서 백천 합류(백미산에서 발원, 성주 경유)

* [성주군 용암면 동락리] ← 서쪽에서 신천 합류(거산에서 발원, 용암면 경유)

1964년1월7일 낙동강 왜관철교

 

왜관(倭館)은 이름 그대로 조선 시대에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만든 곳이다. 관사와 숙소, 교역장 등을 지어 일본인들이 머무르게 했으며, 외교 관계 변화에 따라 설치와 폐쇄가 반복되었다.

 

왜관(倭館)

 

조선은 초기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일본인의 왕래와 무역을 정식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경상도의 여러 항구에서 함부로 상업 활동을 하며 말썽을 일으키자, 제3대 임금인 태종은 왜관(倭館)을 세우고 일본인들의 활동 범위를 제한했다. 즉 일본 상인들은 왜관 안에서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함부로 한반도를 드나들거나 돌아다니는 것을 막고, 일본 상품이 조선의 시장에 밀려들지 못하도록 하며, 국가의 기밀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제4대  세종 임금은 남해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쓰시마(대마도) 정벌을 명령했는데, 이때 왜관을 모두 폐쇄해 버렸다. 그러나 일본이 계속 교역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자 부산포(부산)와 염포(울산), 제포(진해) 등 세 곳에 왜관을 다시 설치했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일본과의 관계가 나빠져 부산포를 제외한 다른 왜관은 모두 문을 닫았고, 임진왜란 후에는 부산포 왜관마저 폐쇄했다. 그러나 일본과 외교관계가 회복되면서 부산 초량 지방에 다시 왜관이 설치되어 강화도 조약 전까지 일본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곳은 낙동강을 따라 올라와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왜관이었다.

왜관 호국의 다리 -- 6.25 당시 폭파된 철교를 복원한 인도교
 
 

 

호수처럼 고요하고 맑은 강물은 나그네의 가슴을 환하게 열어준다. 왜관 ‘호국의 다리’는 원래 낙동강 철교였다.

완강하게 밀고 내려온 인민군의 도하를 방어하기 위해 작전상 폭파를 했던 다리이다. 지금은 고요한 강물 위에 깔끔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전쟁과 평화, 한 때는 아비규환의 전장이었다가 어느 때는 호젓한 낭만이 흐르는 서정의 강이다. 지금의 풍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장! 지금의 평화는 뜨거운 피의 대가(代價)라는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숙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는 그렇게 고요한 강물 속에 잠겨 있고

 낙동강 유역에서 가장 번성했던 나루터.  일제 강점이 시작되던 1905년 단선철로가 개통되고 1939년 복선화되면서 단선철교가 인도교로 이용되기 전까지는 낙동강 수역이 물류수송의 중요한 통로였다.

 

낙동강전선의 왜관전투가 시작된 금무봉전투의 현장이다.  왜관 호국의 다리에서 3km 내려온 지점이다. … 그날 밤 인민군은 캄캄한 밤중에 저 낙동강을 도하하였고 이를 방어하던 미 제1기병사단 제7연대는 가차 없이 적을 향해 포격했다. 그 전투의 현장이다.

 

금무봉(錦舞峰) 전투와 낙동강 왜관전투

 

금무봉(268고지) 일대의 낙동강 지역은 미 1기병사단 7연대 장병들이 낙동강을 건너 4번 도로를 따라 대구방면으로 공격해오는 북한군 3사단 주력부대를 상대로 하여 용감히 싸워 적군을 격퇴한 전투의 현장이다.

 

1950년 8월 9일 북한군 3사단(김영호 소장) 예하 2개 연대가 야음(夜陰, 3:00)을 틈타, 왜관교 남쪽 3㎞ 지점, 성주의 노촌에서 총을 머리에 받쳐 들고 낙동강 도하작전을 개시하였다. 미 1기병사단 5연대는 도하 중인 북한군을 집중 포격하였다. 적의 부대는 거의 궤멸되었으나 도하(渡河)에 성공한 북한군 1개 대대가 금무봉(錦舞峰)을 선점하고, 아군의 후방 지휘소와 주병참선인 4번 도로와 경부선 철도에 포격을 가해 왔다. 금무봉은 부산-서울-신의주를 거쳐서 만주에 이르는 경부선 복선 철도가 이 산의 북쪽 기슭을 지나고 있고, 그리고 아군의 주 보급로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고지였다.

 

이에 8월 10일, 미 7기병연대 1대대와 전차 1개 소대가 금무봉(錦舞峰)을 점령한 북한군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적  4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금무봉 정상을 탈환했다. ... 그리하여 미군은 왜관을 거쳐 대구방면으로 진격하려는 적의 기도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북한군을 낙동강 전선에 고착(固着)시킴으로써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였으며, 우리 국군과 유엔군 등 아군이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고 반격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왜관(倭館)지구 전투는 8월3일 미 제1기병사단(게이 少將)이 왜관읍 주민들에게 疏開令(소개령 : 적의 포화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대형의 거리나 간격을 좁히는 것)을 내리고,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왜관의 철교를 폭파함으로써 개시되었다. 이날 8월 3일에는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 위의 모든 다리가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낙동강전투는 근 45일 동안 양측 병사들의 시체가 산야를 뒤덮고 핏물이 강을 붉게 물들이며 9월 중순까지 지속되었다. 참으로 처절한 전투였다. 당시의 낙동강은 피의 장송곡(葬送曲)이었다.

¶ [금무봉 전투]▶ 미 제1사단의 왜관(마산 북방 90km) 정면에서는 8월 9일 새벽, 북한군 제3사단의 1개 연대가 기습 도하를 성공해 어둠을 틈타 2km를 침투하여, 금무봉(錦舞峰)에 올라갔다. 금무봉은 그 서쪽으로 낙동강 본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경부선과 4번 국도를 감제할 수 있는 268고지이다.

 

그로부터 30분 후, 그 남쪽에서 적(敵) 제3사단 주력의 도하가 시작되면 미 제1기병사단은 조명탄을 올리고 탄막(彈幕) 사격을 퍼부어 이를 격퇴했다. 후속부대를 차단했다고 판단했던 미 제1사단장 게이(Gay) 소장은 9일 아침, 예비인 제7기병연대 제1대대에 M24 경전차 4대를 배속, 금무봉 탈환을 명했다. 그러나 숲으로 가려져 북한군을 발견하지 못했고, 더구나 더위 때문에 일사병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형편이어서 공격은 진전되지 못했다.

 

다음날 10일 아침, 사단은 공군기에 의한 폭격과 지상의 포격으로 금무봉을 화력(火力)으로 제압하고, 금무봉의 뒤쪽에 전차대를 우회시켜 배후로부터 사격을 가했다. 이와 더불어 정면으로부터도 돌격해 금무봉을 탈환하고, 추격으로 전환하여 적(敵) 인민군 제3사단을 궤멸시켰다

 

¶ [B-29의 융단폭격]▶ 금무봉 탈환 이후 8월 16일, 적군에게 대대적인 폭격이 감행된 날이었다. 이날 왜관 낙동강 건너편 대안, 지금의 약목면 일대에는 인민군 4만 명이 집결하여, 대규모 도하작전을 감행하기 직전이었다. 적이 도하(渡河)에 성공하면 왜관이 곧 함락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왜관이 함락되면 임시수도가 있는 지척의 대구가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그러자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일본에 있는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공중 폭격을 요청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B-29 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불과 26분 동안 왜관 서북방 67㎢의 지역 약목면 일대에 퍼부은 폭탄은 960t. 낙동강을 건너려고 한데 모여 있던 인민군 4만 명 가운데 적어도 3만 명이 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른바 ‘융단폭격(絨緞爆擊)’이었다. 낙동강전투에서 가장 처참했던 전투였다. 왜관에서 낙동강 건너에 위치한 약목(若木)은 융단폭격의 현장이다. 그때의 융단폭격으로 약목 일대는 10년간 풀도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약목면 바로 위쪽이 지금의 구미공단이다. 구미는 금오산(977m)과 낙동강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적의 주력은 이미 낙동강을 건너 아군 측(국군 제1사단·미 제1기병사단)과 맞붙은 낙동강 동안(東岸)으로 넘어온 후였다. 그 해의 여름의 심한 가뭄으로 낙동강 수위가 낮아져, 도하(渡河)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대적인 공중폭격이 북한군에 가한 심리적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융단폭격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적(敵)은 전진기지에 준비해 두었던 예비 병력과 야포, 그리고 탄약과 장비를 비롯한 군수품을 대거 잃었다. 전투를 장기간 치를 여력을 상실하였다.

왜관읍 북쪽으로 3.4km 지점에 위치한 작오산은 낙동강 방어전 당시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의 방어선이 교차하는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이었다. 작오산 지역은 바로 낙동강 강안의 왜관-영산-마산에 이르는 미군의 방어선인 X선(90km)과 왜관-다부동-영천-포항에 이르는 한국군의 방어선인 Y선(90km)이 서로 만나는 꼭짓점이었다. 당연히 언어가 서로 잘 통하지 않는 한미 양군(兩軍)이 접한 왜관 작오산 303고지는 꼭짓점에서 만났던 만큼 공조와 소통의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컸다. 따라서 이 지점이 북한군이 노리는 아킬레스건(腱)이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이 303고지에 제8기병연대 제2대대장 해럴즈 존슨 중령을 배치했다. 존슨 중령은 나중에 미 육군참모총장(1964~68)까지 올랐던 제1급 군인이었지만,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 바탄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3년간 인천(仁川)에 있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이런 이유들도 해서 존슨 중령은 상당한 지한파(知韓派)였다.

 

그래서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의 방어지역에 미군 1개 소대가 들어오고, 대신에 미 제1기병사단 방어지역에 한국군 1개 소대가 들어가는 방식의 교차배치를 실시함으로써 연합작전의 난점을 극복했다. 작오산에 올라가면 동북쪽 7km에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의 좌(左) 일선이었던 숲데미산(519m)이 보인다. 숲데미산은 한자로는 수암산(水岩山)이라고 쓰는데, 대구 북부의 필공산(八空山)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이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전투를 벌였던 곳이었다. 왜관전투에 관한 모든 내용은 작오산 기슭에는 ‘왜관전적기념관’에 잘 정리‧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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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선(戰線)

 

지금 이 평화로운 이 길목은 6·25 최격전지, 낙동강 전선(戰線)이었다. 임시수도 대구와 그리고 부산을 방어하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왜관 작오산에서부터 낙동강을 따라 창녕-함안-마산에 이르기까지의 낙동강 전선인데, 당시 이 전선은 미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왜관의 작오산에서부터 이곳 낙동강(洛東江) 동안(東岸)을 따라 달성-강정-현풍 까지는 미 제1기병사단이 방어하고 있고, 창녕 영산은 미 제24사단이, 그 아래 함안은 미 2사단, 마산은 미 25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제도는 국군 해병대 제1대대가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저 왜관의 작오산에서 유학산-다부동-영천-포항에 이르는 전선은 국군이 담당하였다. 거기가 적군과  우리 국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는 다부동전투 지역, 영천전투지역이다.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1950년 8~9월의 전세를 보면, 여기 낙동강 건너, 서쪽의 성주에는 적(인민군) 제3사단, 10사단이 장악하고 있으면서 호시탐탐 낙동강을 도하하여 임시수도인 대구(大邱)를 침공·점령하려고 하고, 

 

8월 9일에 있었던 금무봉전투는 바로 적 인민군 제 3사단이 도하하는 것을 미 제1기병사단 제7연대가 한밤 중에  쳐부수었는데, 적의 일부가 도하하여 이곳 왜관의 금무봉을 점령한 것을 하루 만에 탈환한 전과를 올린 전투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낙동강 강안이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다.

 

 

전쟁의 참화(慘禍)

 

인류의 역사가 수많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우여곡절로 점철되어 왔지만, 우리가 겪은 동족상잔의 6.25전쟁이야말로 너무나 처참했다. 이 전선을 지키기 위해서 피아(彼我)를 막론하고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죽어갔는지 모른다. 죄없는 민간인들의 죽음은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사진이나 기록으로 남은 당시의 상황을 보면 참으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전쟁은 잔인하고 참혹하다.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되는 몸서리쳐지는, 그야말로 악몽(惡夢)이다. 이렇게 똑같은 지역, 똑같은 공간이지만, 70년 전에는 죽음의 전장이었고 지금은 평화롭게 가을 햇살을 누리고 있으니, 그 격세지감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6·25 당시 이 낙동강 전선에서 피를 흘린 우리 국군은  물론, 우방국 미국의 용사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UN군으로 참전한 16개국의 모든 전사들에게도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덕분에 우리는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에서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낙동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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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처럼 너른 낙동강 저 멀리  성주대교가 아득히 보인다. 강안의 풍경이 참으로 고즈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