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RK's

DPRK가요 다시 만납시다- 백정숙

류지미 2023. 9. 29. 09:59

DPRK가요 3-10 다시 만납시다

작사 리정술, 작곡 황진영 , 노래 백정숙

https://www.youtube.com/watch?v=RgWZai9yg-s 

 

 

DPRK 조선가요 4-16 끝없는 이 행복 노래 부르네

백인준 작사 , 리면상 작곡, 김경옥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7_FwEw1tkUM 

참으로 명곡입니다. 이 곡은 월북작곡가 이면상선생이 작곡하였습니다.
북한의 명곡들 대다수가 이면상선생의 작품들이 많아요.
이면상이라 하면 수난의 가수로 불렸던 남인수의 노래 '낙화유수'를 작곡한 사람이지요. 훌륭한 음악인재였는데요.
 
통일된 조국에서 남북 모두 평화롭게 사는 그날을 그려봅니다.
김일성이 가장 좋아했던 노래이기도 했죠. 만수대예술단 가수 김영옥이  김일성의 요청으로 연거퍼 4번이나 불렀던 노래입니다.

 

북조선에 김일성을 원수님이라고 하나 지금에야 볼때에는 혁명적인 역사의 진실은 차이가 많이 나고 북조선 인민들의 기대를 미치지는 못했으며 김정일도 그렇고 나이가 어린 김정은 또한 그 현실에 놓여져 있어 개변에 대한 정치가 탄생 하여야할 것이다.

 

자기 감정을 담아서 지은 노래인데 지금에 와서 들으면서 고쳐라 빼라 하는건 도대체 뭐지요? 이노래는 일본동포들이 우러나오는 감정 그대로 고마음을 표시해서 지은 노래, 그럼 한국에서 먼저 일본동포들이 아품을 헤아릴것이지 북한의 김일성이 사랑을 베풀때 뭐하고 있구선 지금와서 김일성이름 빼라고 어쩌라고~참 인간들이 되지 못했다는건 동서고금에 니들 같은 인간들이 몆이나 되겠냐? 듣지마라.좋은 노래를 흐리운다.
 

이면상李冕相  | 이운정(李雲亭),  이춘상, 이훈상 街村冕相

출생 1908년 4월 8일 ~ 사망 1989년 6월 25일

 

경력 : 북조선음악동맹위원장, 조선작곡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상무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대표작 : 리면상가요곡선집, 진주라 천리길, 사랑도 팔자, 원앙가, 조국보위의 노래, 밀림의 역사, 밀림아 말하라, 승리의 5월, 눈이 내린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8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1916년 4월 사립 덕흥학교에 입학, 1919년 졸업한 후 1922년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바로 중퇴하고, 같은해 함흥사범학교 특설과에 입학, 1925년 3월 졸업했다. 졸업 후 원산제이보통학교의 훈도를 지내면서 음악에 관심을 가져 동요와 민요를 연구했다. 1929년 11월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동조, 참여했다가 퇴직 처분을 받은 후,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음악학교에 입학, 1933년 4월 졸업했다. 졸업 후 귀국, 포리돌(Polydor)레코드사 전속 작곡가로 취직해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 민요풍의 가요와 신민요, 대중가요를 작곡, 발표했다. 1937년 일본 빅타(Victor)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겨 활동했다.

 

 

1937년 5월 조선의 가요를 정화해 일본의 국체(國體)와 전시체제의 선전물로 전환하려고, 조선총독부가 외곽단체로 조직한 단체인 조선문예회가 년 6월 이왕직 아악부에서 개최한 조선문예회 제1부 작품 시연회에서 최남선 작사의 「동산」에 곡을 붙여 발표했다. 같은해 7월에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문예회 주최 제1회 신작가요발표회에 출연, 「복사 」, 「붉은 송이」를 발표했다. 이 때 발표된 가요들은 『가곡집』 제1집으로 조선문예회가 편집, 발행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가 주최한 애국가요대회에 「전장의 가을」, 「종군간호부」, 「정의의 師여」, 「총후의 남」 등을 발표했다. 1940년에는 경성방송국에서 기원2600년기념 가요 현상공모에 「흥아의 봄」과 「물레감는 처자」가 당선되었다. 이와 함께 19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초반에도 신민요와 대중가요를 계속 발표했다. 1939년부터는 빅타레코드사의 전속 작곡가로 활동했고, 1942년 7월 창립된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는 문화통신사기자로 활동하다가, 10월쯤 고향으로 돌아가 함경남도음악건설동맹위원장이 되었고, 함양악단을 조직, 활동했다. 1946년 조직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산하의 북조선음악동맹의 위원장으로, 1947년부터 1989년까지 활동했다.

 

1953년 9월 조선작곡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 5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겸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2월 평양음악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1958년 1월 북한·소련친선협회 중앙위원에 임명되었고, 6월 북한·프랑스친선협회 부위원장, 7월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59년 8월 김일성의 만주 항일 무장투쟁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곡 작품 「밀림아 말하라」로 인민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11월 북한·네팔친선협회 위원장이 되었다.

 

1961년 1월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3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북한 최고의 예술가에게 부여되는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고, 9월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 11월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1년 4월 예술가 대표단장으로 쿠바를 방문했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이 되었다. 1973년 5월 문화대표 단장으로 루마니아를 방문했다.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1년 7월 피바다가극단 창립 10주년 기념 보고회에, 북·중우호조약 체결 20주년 기념 집회에 참석했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86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에도 선출되었다.

 

1989년 6월 25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