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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해방의 투사가 된 인민군 대위…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1

류지미 2023. 9. 30. 21:46
동아일보|정치

북한 해방의 투사가 된 인민군 대위…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가 걸어온 길[주성하 기자의 北에서 온 이웃]

입력 2023-09-30 14:00업데이트 2023-09-30 14:09
 
김성민 대표가 2019년 자유북한방송 녹음실에서 북한에 보낼 방송을 제작하고 있다. 이때 그는 항암치료 중이었다.
 
 
양강도 혜산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 기슭에 앉아 있던 인민군 대위가 별안간 강물에 뛰어들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던 시각이었다.

빨래를 하던 30명 남짓의 여인들은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라 가만히 보다가 대위가 가슴 깊이까지 들어가자 한꺼번에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국경경비대가 달려 나와 온갖 욕설을 퍼붓더니 총을 쏘기 시작했다.

대위는 총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강을 건넜다. 추워서 이빨이 덜덜 떨렸다. 중국 땅에 접근하면서 그는 군복에 붙은 계급장을 뜯어버렸고 군모도 강에 던져넣었다.

 
중국 쪽은 45도 경사의 가파른 제방이었다. 미끄러워 도저히 오를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조선족 청년이 머리를 내밀었다. 도와달라고 하자 그는 어디선가 나무 막대기를 찾아와 내밀었다. 1996년 9월 3일에 일어난 일이다.

나중에 이 청년은 탈북하는 인민군 군관을 도와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북한에 유인 납치돼 6개월 동안 고문을 받고 가까스로 살아왔다.

그로부터 약 4년 뒤 휴전선 대북 심리전 확성기를 통해 절규하듯 외치는 목소리가 두 달 넘게 북한으로 퍼져갔다.


“나는 620훈련소 선전대 작가 대위 김진(김성민 씨의 개명 전 이름)이다. 620훈련소 정치위원, 선전부장 너희들은 무고한 전우를 반역자로 몰아가 결국 나를 남조선까지 오게 만들었다.”

확성기 방송이 시작된 뒤 북한군에선 비상이 걸렸다. 그로부터 다시 6년 뒤 그가 복무했던 부대에서 한 군관이 탈북해 왔다.

그 군관은 “그 사건 대단했죠. 소문이 퍼지자 총정치국에서 직접 김진 대위는 억울했다는 것을 부대에 통보했습니다”라고 전했다.

2006년 자유북한주간 행사로 워싱턴을 방문한 김성민 대표가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다.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
 
대낮에 인민군 현직 군관이 압록강을 넘자 양강도 보위부에선 다음날 즉시 체포조를 장백에 파견했다.

체포조가 넘어오던 시각, 김 씨는 산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부대를 탈출해 꼬박 8일이나 기차를 타고 혜산으로 왔고, 다시 혜산에서 3일을 헤맸다. 온몸의 긴장이 강을 넘자마자 풀렸다. 하루 밤, 하루 낮을 자고 깨어나니 배가 고팠다. 태어나 네 끼를 처음 굶어봤다.

배가 고픈 그는 산 아래 십자가 불빛을 찾아갔다. 북한군 복무 시절에 읽었던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신부를 기억해냈던 것이다.

여성 집사가 문을 열었다. 그를 보더니 대뜸 “어제 강 넘어온 분이죠. 오늘 북에서 체포조가 와서 인민군 군관 찾겠다고 돌아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배고프고 지쳐서 어디 갈 수가 없어요. 도와주세요.”

집사는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먹고 나니 또 졸렸다. 교회의 작은 방에 들어가 쓰러졌는데 깨어보니 다음날 저녁이었다.

“여기엔 오래 있을 수가 없어요. 저랑 연길에 갑시다. 거기엔 도와줄 분들이 있을 겁니다.”

여집사와 함께 12시간을 달려 연길에 갔다. 1996년엔 도로에 검문이 없었다.

연길에서 한 조선족 목사를 만났다. 목사는 교회에서 먹고 자도 좋다고 했다. 그로부터 6개월 남짓 그는 교회 안에서 먹고 자고 지냈다. 새벽기도를 오는 신도를 위해 아침마다 불을 피우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 교회에선 ‘월간조선’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다. 작가 출신인 그는 탈북한 전 북한군 대위의 스토리를 스스로 써서 잡지사에 보냈다. 그가 보낸 기고문은 월간조선 1996년 10월과 12월호에 두 차례에 거쳐 실렸다. 각각 60만, 80만 원씩 원고료도 도착했다.

“당시엔 엄청난 돈이었는데, 아마 잡지사가 넉넉히 보내준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걸 바꾸니 중국돈 6000위안, 8000위안이 됐는데, 당시 중국 노동자 월급이 2~300위안에 불과했거든요. 거액이 생긴 거죠.”

잡지 기고 후 적십자사 명함을 든 한국 남자가 찾아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한국에 있는 삼촌을 찾아 거기에 가는 게 목표입니다. 일단 삼촌부터 찾아주면 생각해볼게요.”

적십자사 남자는 1000위안을 주고 가면서 기다려보라 했다. 하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이듬해 2월 한국에서 백두산 견학을 가는 목사 일행이 교회에 도착했다. 김 씨는 이들에게 사정했다.

“저는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 한국으로 가려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500만 원이 있으면 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

부산 동래제일교회에서 왔다는 조완주 목사가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조선족 현지 선교사에게 부탁해 일단 500만 원을 구해 그에게 준 것이다.

돈이 생기자 그는 돌봐주던 조선족 목사와 함께 대련으로 떠났다. 목사가 대련에 가면 500만 원을 받고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미국 국적의 한인 목사가 있다며 주선했기 때문이다.

2010년 제주도의 해변에 선 김 씨. 그에게 바다는 탈북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다.


● 공안에 넘겨준 한국 선장
 
1997년 2월 대련에 도착하니 풍채 좋은 한인 목사가 약속장소인 카페에 나타났다. 500만 원이 든 봉투를 넘기자 그는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저 사람을 따라가면 한국으로 보내준다”고 말했다.

그날 밤 김 씨는 청년과 함께 택시를 타고 대련항으로 갔다. 항을 둘러싼 철조망 앞에서 청년이 “이제 철조망을 넘어 남조선 배를 찾은 뒤 거기에 몰래 올라가면 됩니다”고 말했다.

“아니 500만 원이나 받고 항에 데려와서 아무 배나 타고 가라는 게 말이 돼요?”

“저는 그 사람 잘 몰라요. 그냥 대련항에 데려가주면 2000위안 준다고 해서 심부름한 것뿐입니다.”

김 씨 머리에선 포기할까, 그냥 진입을 시도할까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결심이 서자 그는 청년을 잡고 사정했다.

“그럼 내가 들어가 남조선 배를 찾아볼 테니 제발 여기서 좀 기다려주시오. 난 중국말을 하나도 몰라서 어딜 갈 수도 없어요.”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철조망을 넘어 대련항에 들어갔다. 대형 선박들이 정박한 항구 쪽으로 갈수록 불은 더 밝아졌다. 보초병의 눈을 피해 바닷물에까지 뛰어들며 끝까지 살펴봤지만, 선박들은 모두 영어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북한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한 그는 남조선 배를 끝내 찾지 못했다. 젖은 옷이 얼기 시작했다. 덜덜 떨며 다시 항구 밖으로 나오니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너무 불쌍해 보였는지 청년은 “아무래도 그 목사는 사기꾼 같으니 내가 천진에 사는 친구들을 통해 남조선 배를 찾아주겠다”고 했다.

김 씨는 청년과 함께 이번엔 천진으로 갔다. 조선족 청년은 친구들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천진항에 ‘후션프랜드’라는 남조선 광석 운반선이 들어와 있으니 밤에 그걸 타는 걸 돕겠다”고 했다. 김 씨는 다시 천진항으로 갔다.

청년이 “저기 끝에 있는 배가 남조선 배니 몰래 접근해 타라”고 알려주었다. 김 씨는 어둠을 타고 항에 들어가 몰래 선박에 접근했다. 그 배에 거의 다가갔을 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공안이 세 명이나 뛰쳐나왔다. 김 씨는 배 선원인데 술을 마시러 나갔다 오는 길이라고 손짓발짓을 동원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자 공안은 배 선장을 불렀다.

선장이 나왔다. 김 씨는 선장에게 말했다.

“나는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 여기서 선장님이 선원이 아니라고 하면, 저는 공안에 끌려가 북송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공안의 앞이라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선장의 말 한마디에 그의 생사가 달린 순간이었다.

선장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이것 보시오. 탈북자를 도와주면 우린 공안이고 안기부고 다 끌려다녀야 해요. 우리도 먹고 살자고 일을 하는데 도울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김 씨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선장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그리 말하면 난 죽어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라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선장은 단호하게 “노”를 외쳤다. 공안에게 “노스코리아 아미”라며 잡아가라고 손짓했다. 공안들이 달려들어 김 씨에게 수갑을 채웠다.

나중에 한국에 온 뒤 김 씨는 그 선박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그런데 후션프랜드라는 선박을 찾지 못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다짐했던 복수의 결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졌다.

2009년 마잉주 당시 대만 총통이 김성민 대표에게 ‘2009년 아시아 민주인권상’을 수여했다.


●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쁘냐?”
 
천진 감옥에 끌려간 그는 통역을 구하지 못해 40일이나 수감돼 있었다. 나중에 김일성대에 유학을 다녀왔다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한국말을 너무 못해 겨우 의사소통을 했다.

“저는 인민군 군관입니다. 중국에 정치망명을 하겠습니다”고 하자 여자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우린 그딴 거 몰라”고 대답했다. 1차 조사를 받은 그는 도문 변방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를 이송하는데 무려 7명이 호송원으로 따라왔다.

도문에서 다시 조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조사관이 2명씩 계속 바뀌었다. 조선족 공안이 그에게 회유를 했다.

“너 가면 죽는다. 우린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북에 보내지 않고 중국에 있는 ‘로개농장(로동개조농장)’으로 보내겠다.”

북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김 씨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루는 새로 나타난 조사관이 “김정일 체제가 싫어서 왔다”는 그의 답변을 듣고 “그럼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설명해보라”고 했다. 김 씨는 북한 체제를 맹비난했다.

9일째 되는 날 조사를 받으러 나왔는데 갑자기 여럿이 달라붙어 그의 팔을 꺾고 수갑을 채운 뒤 봉고차에 실었다. 차 안에서 처음 보는 탈북 남성과 수갑을 한 쪽씩 나눠차고 짐짝처럼 구겨진 채 북한으로 호송됐다. 현직 군관으로 탈북한 그는 북에 돌아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그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의 심정을 그때 알 수 있었다.

함경북도 남양의 국경다리를 건너 도착하자마자 중국 공안이 두 사람을 북한 보위부에 인계했다. 중국에서 차고 온 반짝반짝한 새 수갑이 풀리고, 피로 변색된 듯한 시꺼먼 북한 수갑이 덜커덩 채워졌다. 중국 쪽에서 남양을 바라보면 국경다리 바로 앞에 ‘영생탑’이란 것이 있다. 보위부에선 두 사람을 그 탑 주변을 돌게 했다. 주변에서 장사하던 아줌마들이 몰려왔다. 두 사람을 조국반역자라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침을 뱉고 신발을 집어던졌다. 죽음을 앞둔 순간임에도 그는 이때 인생 최고의 수치심을 느꼈다.

영생탑을 돌게 한 보위부원들은 다시 이들을 싣고 온성 보위부로 끌고 갔다. 김 씨는 중국이 자신에 대한 자료를 북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산악기공장 노동자라고 열심히 거짓말을 했다. 처음에는 보위부가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듯했다.

온성 보위부에서 조사 7일째 되는 날 조사실에 들어간 그는 온몸이 굳어져버렸다. 그의 앞에 나타난 조사관은 도문에서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설명해보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북한 보위부가 중국에 건너와 직접 탈북민의 심문에 동참했던 것이었다. 중국에서 북한 체제를 비난했던 그의 답변이 고스란히 북한 보위부 책상에 올라와 있었다. 사형 당해야 할 이유가 추가된 것이다.

다음날 군관 4명이 온성에 나타났다. 그가 복무했던 부대와 인민무력부 소속 보위사령부 군관들이었다.

“김진. 이제 가야지. 우선 평양에서 조사를 받고, 다시 부대에 가서 조사를 받을 거야.”

“조사가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

“임마, 그건 네가 판단해야지 우리가 어케 알갔어?”

2007년 캐나다에서 열린 북한구원기도운동 행사에 참가한 김 씨가 북한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호송원 4명과 함께 그는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사람들로 빼곡한 일반 객실이 아닌 열차 호송원과 승무원들이 타는 특별 객실이었다. 기차는 느릿느릿 평양을 향해 가고 또 갔다. 4명이 돌아가며 감시하는 바람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가는 내내 그는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지를 고심했다. 희망은 있었다. 천진감옥과 도문감옥에서 50일 넘게 수갑을 차고 수감생활을 하다보니 고무줄이 들어있는 속옷 혼솔 부분의 살이 온통 벌레에 물어뜯겨 피고름 투성이었다. 도저히 수갑을 찰 지경이 아니어서 호송원들은 솜옷 위에 수갑을 채웠다. 그러다보니

손을 살살 움직이면 수갑에서 손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3일이 지났다. 깊은 밤 창밖을 내다보니 기차는 평성을 지나 평양으로 달리고 있었다. 평양에 도착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 게 뻔했다.

그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다. 화장실은 온갖 오물로 가득 차 더럽기 그지없었다.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그 앞에 서있던 호송원은 냄새가 싫은지 뒤로 돌아섰다. 그 순간 김 씨는 3일 동안 머리 속으로 연습한대로 수갑에서 한쪽 손목을 뽑아냈다.

동시에 벌떡 일어나 유리창을 발로 차 깨뜨린 뒤 시속 80㎞ 정도로 달리는 열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어차피 평양에 가서 온갖 고통을 겪다가 죽을 운명이라면 기차에서 뛰어내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100m에 하나씩 있는 열차 전봇대만 피하면 살 수도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호송원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몸을 던진 순간 그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선로 옆 작은 밭에 쓰러져 있었다. 봄을 앞두고 마침 밭을 갈아서 땅이 푹신했다. 3년간의 특수부대 훈련이 무의식중에 그를 땅에 제대로 착지시킨 듯싶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멀리 기차가 멈춰서 있었고, 수십 개의 손전등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망가려고 일어서려는데 무릎이 움직여지지 않아 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로에 있다간 꼼짝없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기 시작했다. 마침 수십m 옆에 산이 있었다. 그가 산자락에 붙어 몇 미터 올라가지 않았을 때 선두의 손전등이 그가 뛰어내린 자리에 도착했다. 자세히 보면 사람이 쓰러졌던 자리나 깨어진 유리창을 발견할 수도 있었겠지만, 열차에서 뛰어내린 호송원들과 안전원, 경무원(헌병)들도 당황했는지 정신없이 앞으로 달리기만 했다.

손전등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김 씨는 다시 산을 기어올랐다. 몇 시간 뒤 산중턱에서 바라보니 손전등들은 주변 마을 집집마다 분주히 오가며 돌아치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추운 산등성이에서 김 씨는 탈영병으로, 조국 배반자로, 사형수로 전락한 자신의 운명을 처량하게 되돌아봤다.

2008년 국경없는 기자회가 수여한 상을 수상한 김성민 대표(왼쪽).


● 남조선 혁명시를 쓴 아버지
 
김 씨는 1962년 자강도 희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는 평양에서 희천공작기계공장 노동자로 혁명화 대상이 됐던 신세였다.

아버지 김순석은 북한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시인이었다. 해방 후 함경북도 작가동맹 지부장을 역임한 그는 북한 최고 권위의 문학잡지에 여러 편의 시를 실었고, 이것이 인정받으면서 평양창작실 작가로 발탁됐다. 6·25전쟁에는 종군작가로 참전했고, 전후엔 잡지 ‘조선문학’ 편집부장, 조선작가동맹 시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북한에서 종파 숙청 바람이 불 때 아버지도 좌천돼 노동자로 지방에 쫓겨났다. 어떤 이유였는지 김 씨는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에 할머니가 맏이이자 청년이 된 아버지만 함경북도 청진에 남겨둔 채 김 씨에겐 삼촌인, 아들 두 명을 데리고 서울로 간 것이 좌천의 중요 이유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정치적 이유가 아닌, 단지 10대의 어린 두 아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고 떠난 것뿐이지만, 북한 당국은 월남자로 판단한 것이다.

수년 간의 혁명화 끝에 아버지는 1964년에 김일성대 어문학부 교원으로 평양에 복직했다. 김 씨는 희천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평양 중구역에서 북한 최고의 명문 유치원으로 치는 경상유치원과 대동문인민학교, 련광중학교를 차례로 졸업했다.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세상을 떴다. 김일성대 교원을 하던 아버지는 김정일이 1970년대 초반 대남사업을 하겠다며 ‘3호 청사(노동당 대남담당 기관만 모아놓은 건물 명칭)’를 만들었을 때 이곳으로 옮겨갔다. 아버지가 맡은 일은 구국전선 등 남조선 지하조직의 작가가 쓴 것처럼 시를 지어내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쓴 시는 ‘남조선 혁명가들이 보내온 시’로 둔갑돼 대남방송으로 나갔다. 나중에 김 씨는 아버지가 썼던 시를 찾아봤다. 서울로 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구절구절 역력했다. 아버지는 이 일을 얼마하지 못했다. 김 씨가 12살 때인 1974년에 타고 가던 차가 평양의 한 고가다리에서 전복돼 세상을 뜬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어머니는 다음날부터 쓰러져 누웠다. 어머니는 당시 조선중앙통신사 국제연감 담당 기자였는데, 하루도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계속 누워만 있다가 1년 뒤 돌아갔다. 김 씨는 “어머니가 세상을 살기 싫어 자살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외아들인 김 씨는 출가하지 않은 막내 누나와 함께 살았다.

● ‘창작조 병사’가 되다
 
1978년 중학교를 마친 김 씨는 만 16세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부모를 잃고 빽도 없는 그는 황해남도 태탄군에 주둔한 28사 경보병대대에 배속됐다. 경보병대대는 북한에서 특수부대로 간주된다. 게다가 그가 입대했을 때 “일반 병사도 벽돌 한 장은 거뜬히 깨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다.

경보병대대는 아침 기상 직후부터 내복바람으로 3000번 타격 훈련을 한 뒤 밥을 먹었다. 엄동설한 산골짜기로 타고 내리는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타격 훈련을 하다보면 손에서 흐르던 피고름이 얼음이 돼 달라붙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24㎏짜리 군장을 메고 평일 50리(20㎞), 토요일은 100리(40㎞)씩 행군 훈련을 했다.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김 씨는 인민군 협주단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제자들에게 부대를 좀 옮기게 해달라고 거듭 사정했다.

3년 만에 마침내 김 씨는 경보병대대에서 82미리 박격포부대로 이동됐다. 포부대의 삶은 경보병부대에 비해선 천국이었다.

여유를 찾은 그는 짬짬이 시를 써서 인민군 신문사에 기고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시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신문사에 약 10편의 시를 기고하면 1편은 신문에 실렸다. 5편 정도 실렸을 때 인민군 신문사에서 어떤 병사인지 궁금해 기자가 찾아왔다. 사단에서도 그를 주목했다. 입대 4년차가 됐을 때 사단 선전부장이 찾더니 “사단 창작조에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이곳에서 1년 정도 활동하다가 입대 5년차엔 군단 선전대로 옮겨갔다. 북한군은 군단별로 정규 선전대를 운영한다. 그가 속한 4군단 선전대는 당시 120명 편제였는데 200명이나 근무했다. 대좌인 선전대장 산하에 문학창작조는 물론 성악, 기악, 화술, 무용, 조명 등 각 분야별 특기자들이 소속돼 있었다. 군단 선전대에 소속되면 군관들이 입는 군복을 입히는데, 선전대를 구분하는 견장도 따로 있었다. 먹는 것도 일반 군부대와 훨씬 나아서 배고픈 걱정이 없었다. 그가 속한 문학창작조는 소좌 편제의 작가 밑에 8~10명의 병사가 소속돼 있었다. 책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선전대의 가장 큰 목표는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군무자축전과, 역시 4년 주기로 열리는 군단별 선전대축전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는 것이다. 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축전을 위해 군인 200명이 복무하는 것이다.

가령 군무자 축전의 경우 23개 군단급 선전대(정규군단 12개, 공군, 해군 및 군단급 훈련소 포함)에서 고른 작품들로 2시간 반짜리 공연을 진행하는데, 군단에서 작품이 하나라도 뽑히면 우수한 성과를 냈다고 본다. 각 군단 선전대는 성악이나 기악은 물론 합창이야기, 합창과 시, 노래이야기, 중창이야기, 독연 등 다양한 장르를 내놓고 최종적으로 공연에 선정되기 위해 애쓴다.

김 씨는 군단 선전대에 들어간 첫 해부터 전군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병사의 자서전’ ‘중대의 기타수’라는 제목으로 그가 쓴 가사가 군무자축전에 오른 것. 김 씨는 “가수가 노래를 잘 불렀던 탓이 컸다”고 회상했지만, 23개 군단 작가들이 경쟁하는 자리에 일반 병사가 쓴 가사가 두 개나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중앙 축전에 올라가면 “김진이 너냐”는 질문을 받게 됐다.

창작조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책이었다. 북한에서 발간된 고리타분한 서적밖에 없었는데, 외국 명작도 보고 싶었다.

한 번은 창작조 병사 한 명이 “해주도서관에 가면 과거 출판됐다가 회수했던 책을 한 부씩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는 정보를 갖고 왔다. 그에게 시간을 주니 도서관에 들어가 1950~60년대 출판됐다가 김일성 독재체제가 공고화되면서 회수한 뒤 한 부씩 남겨 창고에 두었던 금서를 무려 6마대나 훔쳐왔다.

그 덕에 김 씨는 안나 카레리나, 레미제라블 등 세계 명작들을 읽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은 세계 명작 중 일부를 다시 출판했지만 당시엔 이런 책이 금서였다.

자유북한방송은 북한의 비밀자료들을 입수해 북한 실정을 고발한다.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에는 이런 북한 지시문들이 북한 정보원들을 통해 수시로 들어온다.


● 김형직사범대학에 가다
 
입대 7년차가 되자 김 씨는 창작조 조장으로 발탁됐다. 조장이 되니 1년에 6개월씩 평양시 송신구역에 있는 인민군창작실에 올라가 ‘창작조장 강습’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입대 8년차인 1986년에 그는 송신에 갔다. 전군에서 온 30명의 군단 창작조장이 모였는데, 그해와 이듬해 그는 이 창작조장 강습단의 조장으로 발탁됐다. 이때 그는 북한 체제의 부조리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됐다.

저녁이 되면 30명 중 20명이 넘게 사라졌다.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평양의 고위 간부집 자식들이었다. 창작실 군관들은 이들에게 ‘과제’를 주어 외출을 허용했다. 가령 정무원 무역부장의 아들은 6개월 내내 며칠에 한 번씩 식용유 통을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이 기름은 군관들과 군관 식당에 배정됐다. 무역부장 아들은 기름통만 전달하고 집으로 귀가했다.

군관 결혼식 준비 임무 명목으로 나가는 병사, 쌀을 갖고 오라는 부탁을 받고 나가는 병사, 부식물을 해결하라는 과제를 받고 나가는 병사 등 사유는 다양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평양 간부집 자식들은 뇌물을 주고 군 복무 기간을 집에서 자유롭게 지냈다.

김 씨도 집이 평양이지만, 부모가 없어 물자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와 몇 명만이 실력으로 창작조장으로 발탁됐을 뿐 나머지는 뇌물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그런 김 씨도 군 생활 말년에 뇌물을 엄청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김정일이 군단 산하 선전대와 체육단이 혼자만 잘 산다고 화를 내면서 해산하라고 한 것. 물론 이 지시는 3년쯤 지나 번복되긴 했다.

선전대가 해산되면서 그는 박격포부대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가니 중대에선 그가 가장 고참이었다. 중대장과 소대장도 그보다 늦게 입대한 사람들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뭐라고 못하고 어려워하자 대대장이 그를 불러 “지금 너 하나 때문에 부대 규율이 어지러워지니 무력부 감 밭에 가서 경비나 서라”고 지시했다.

황해남도 용연군에는 인민무력부 호방총국이 소유한 무려 2만 정보 면적의 감나무 밭이 있었다. 경비 움막에 올라가 바라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몇몇 병사들과 감 경비를 서게 된 김 씨는 살면서 처음으로 호화생활을 누리게 됐다. 규율생활도 없는데다, 감을 따서 고기와 실컷 바꾸어 먹을 수가 있었다. 안면을 익힌 인민군 창작실에 감을 한 트럭 가득 따서 보내도 흔적도 나지 않았다. 북한에선 귀한 과일인 감으로 창작실에 계속 뇌물을 보내니, 창작실이 보답을 했다.

인민군 창작실은 3년에 한번씩 김형직사범대학에 위탁생을 모집해 보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위탁생은 기존 신분은 유지한 채 대학에 파견하는 학생을 의미하는데, 졸업하면 파견한 조직으로 돌아가야 한다.

1988년 10년차를 맞아 제대할 나이가 된 김 씨는 인민군 전체에서 3명을 뽑는 김형직사대 작가양성반 위탁생으로 발탁됐다. 인민군뿐만 아니라 사회안전부, 보위부, 각도 문학창작실, 중앙 영화문학 창작실 등에서 위탁생을 뽑는데 이들은 한 개 학급을 구성해 3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한 뒤 졸업장과 작가 자격증을 받고 파견 기관으로 돌아간다.

그가 입학했을 때 이렇게 모집된 위탁생은 19명이었다. 작가동맹 문예창작실 실장 정열(대좌)이 창작지도 교수였고 노동당 작전부장 오극렬의 딸로, 북한에선 유명한 영화문학 작가로 알려진 오혜영도 교수진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2019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기일인 10월 10일을 맞아 그의 묘소를 방문한 김 대표. 김 대표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황 전 비서의 묘소를 매년 빠지지 않고 찾고 있다.


● 군단 작가, 대위로 승진
 
김 씨는 대학을 1년 반밖에 다니지 못했다. 새로 생긴 620훈련소에서 작가를 뽑으려고 수소문하다가 학생 신분인 김 씨에게 제안을 해왔다. 소위를 달고 훈련소 작가로 일하면 3년 뒤에 졸업증을 받아주겠다고 한 것. 김 씨의 실력을 알아본 것이다.

황해북도 신계군에 지휘부를 둔 620훈련소는 항간에 자주포군단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말에 생겼는데, 이때만 해도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군단이라며 비밀주의를 고수했다.

김 씨는 제안에 선뜻 응했다. 사실 병사 시절 그의 꿈은 군관이었다. 하지만 남들은 군관학교에 잘만 가는데, 그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추천해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안쓰러웠는지, 제대 전 뇌물을 주어 친분이 두터워진 군단 간부지도원이 부르더니 책상에 서류를 두고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비웠다.

서류를 펼쳐본 김 씨는 아연실색했다.‘할아버지 일제 때 뽕밭 4000평 보유, 도박으로 탕진. 삼촌 2명 월남. 아버지 기독교 신우회 총무 출신. 어머니 일본군 나남헌병대 타자수’ 등 그의 가족 내역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북한에서 나서 자란 김 씨가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간부지도원은 그에게 알아서 단념하라는 시그널을 준 것이다.

특히 어머니의 일본군 경력이 가장 걸렸다. 나중에 그는 어머니의 지인들에게 물었다.“어머니는 어떻게 돼 나남헌병대 타자수를 하게 됐나요?”

돌아온 대답은 허무했다.
“진이야, 중앙당이나 군단에 가면 예쁜 여자들이 근무하는 걸 많이 봤지? 딴 이유는 없어. 너희 엄마가 처녀 때 청진에서 제일 예뻤어.”

군관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던 김 씨에게 군단 선전대 작가 제안이 왔으니 대학을 더 다닐 이유도 없었다. 그가 군단에 가니 작곡가, 연출가 등을 각 부대에서 스카웃하면서 선전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1996년 9월 탈북할 때까지 7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군복을 입을 사이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을 썼다.

장성인 훈련소 정치위원은 북한에서 유명한 구호인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를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던 사람인데, 수시로 창작실을 찾아왔다. 당을 찬양하는 척하면서 자기를 부각시키는 내용을 교묘하게 끼워넣는 작품을 만드느라 1년 반 넘게 함께 고생했고, 친분도 두터워졌다.

원래 군단 작가 편제가 소좌라 진급도 빨랐다. 소위로 부임했지만 대위까지 거침이 없었다. 1991년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김일성에게서 군권을 넘겨받은 김정일은 그해 모든 군인의 계급을 한 계급씩 올려주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중위로 승진하기도 했다. 약속대로 김형직사대에선 졸업 학년이 되자 졸업장도 주었다.

한국에 입국한 이듬해인 2000년, 38세 젊은 시절의 김성민 대표.


● 한국에서 날아온 편지
 
김 씨는 1996년 8월까지 탈북이란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과거에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겹치면서 탈영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첫 번째 사건은 1994년에 있었다. 그의 휘하 창작실에 두만강 옆 함북 새별(경원군)이 고향인 병사가 있었다. 이 병사가 휴가로 집에 다녀오면서 떡을 가득 메고 왔다. 그런데 떡을 싼 종이가 북한에선 볼 수 없는 고급 종이였다. 자세히 보니 ‘월간조선’의 화보였는데, 거기에 ‘사람찾기란’이 있었다. 병사에게 물어보니 중국에 있는 친척이 뭘 포장해 보낸 종이인데, 종이가 좋아 떡을 포장해 왔다는 것이었다.

김 씨는 갑자기 삼촌을 찾고 싶었다. 1980년대 초반 북한이 남조선 각계 인사들에게 보낸 호소문 명단에 삼촌과 같은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병사에게 “중국 친척에게 이 주소로 사람찾기를 부탁할 수 있냐”고 물으니 가능하다고 했다. 김 씨는 삼촌 2명의 인적사항을 적어 병사에게 주었다. 특히 노동신문에 나왔던 삼촌 이름과 같은 사람은 모 기독교 단체 총무 목사인 것 같은데, 알아봐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몇 달이 지나 병사가 중국 친척을 통해 월간조선이 보낸 회답을 갖고 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김관○ 목사는 알아보니 당신의 삼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병사가 보위부에 포섭된 스파이였다. 병사는 김 씨가 준 편지와 회답을 고스란히 보위부에 가져다주었다. 현직 군관이 한국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는 매우 중대한 범죄였다.

보위부 조사가 시작되던 찰나 군단 정치위원이 나섰다. 자기를 홍보하는 작품을 한창 만들고 있는 작가를 굳이 잡혀가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김 씨를 불러 “뭐, 내용을 보니 별 것도 아니던데 내가 잘 처리해줄거니 창작에만 집중하라. 이제부터 이 일은 당신과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했다. 군단 정치위원이 힘을 쓴 덕에 이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두 번째 사건은 1993년에 시작됐다. 당시 군단의 신생 선전대의 고민은 관악기가 변변치 않은 것이었다. 북한제 관악기를 들고 축전에 올라가면 외제 악기를 쓰는 다른 군단의 선전대에 계속 밀렸다. 군단 선전부에 외화벌이를 한 돈으로 관악기를 좀 구해달라고 계속 요구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1993년 축전을 앞두고 선전대장은 이 문제를 두고 계속 속을 썩였다. 하루는 선전대장이 김 씨를 불렀다. 당시 김 씨는 선전대 노동당 세포비서를 맡고 있었다.

“비서 동무, 우리가 알아보니 개성학생소년궁전에 재일교포가 기증한 악기 세트가 쓰지도 않고 보관돼 있다고 하오. 우리 이거 훔친다 생각 말고, 잠깐 빌리고 다시 갖다 준다는 마음으로 가져오면 안 될까.”

“대장 동지가 알아서 하시죠.”

비서와 상의를 마친 선전대장은 때마침 선전대에서 아코디언 강습을 받고 있던 포종심정찰 대대 강습생 5명을 뽑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인솔해 석탄트럭을 타고 수백 리 떨어진 개성으로 떠났다.

침투와 기습 훈련에 특화된 정찰병들은 이틀 만에 새까만 석탄더미에 악기를 숨겨 부대로 돌아왔다. 나팔은 물론, 일본산 드럼세트와 전자바이올린 등 없는 것이 없었다.

훔쳐온 일제 악기로 그해 선전대는 군무자축전에서 1등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시 가져다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악기에 대해 물어보면 외화벌이를 한 자금으로 사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몇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1996년에 이 사실이 발각됐다. 누군가 군 총정치국에 투서를 보낸 것이다. 군단 선전대장은 출당된 뒤 강제 제대됐다. 훔쳐온 악기를 사용한 작곡가는 당원 자격이 박탈당하고 후보당원으로 강등됐다. 김 씨는 이 사건에 가담한 적이 없어 처벌을 피했다. 두 지휘관이 처벌을 받으면서 세 번째로 직급이 높았던 김 씨가 선전대장 대리를 맡았다.

이때부터 부대에 김 씨가 대장이 되려고 총정치국에 투서를 보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졸지에 그는 출세를 위해 조직과 동료를 배신한 사람이 돼버렸다.
황장엽 전 비서는 김 대표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다. 첫 번째는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으로 와달라는 요청 편지이고, 두번째는 자신의 글을 다듬어 달라고 보낸 편지다.


● 탈영, 그리고 탈북
김 씨는 처음에 자신이 배신자로 지목된 줄 몰랐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외면하고 피하는 것을 보면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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