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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해방의 투사가 된 인민군 대위…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2

류지미 2023. 9. 30. 21:47

북한 해방의 투사가 된 인민군 대위…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가 걸어온 길[주성하 기자의 北에서 온 이웃]

 
● 탈영, 그리고 탈북

김 씨는 처음에 자신이 배신자로 지목된 줄 몰랐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외면하고 피하는 것을 보면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은 받았다.

마침내 그는 부하를 통해 진상을 알게 됐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군단 정치위원이라면 억울한 심정을 알아줄 거라 믿었다. 군단 지휘부에 가니 보초병들이 정치위원의 명령이라며 정문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는 담장을 뛰어넘어 보초병들의 눈을 피해 정치위원 방으로 찾아갔다.

그가 억울하다고 토로하자 정치위원이 “너 아니면 됐어, 가봐. 일 열심히 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던진 마지막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자루 속의 송곳이야 언제든지 드러나지 않겠어.”

방을 나오면서 그는 정치위원도 자신을 배신자로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총정치국이라도 시원하게 투서를 누가 했는지 밝혔으면 좋으련만, 북한도 제보자의 신상은 나름 보호해 준다.

선전대로 돌아온 그는 이 누명을 어떻게 벗을지 고민하느라 이틀 밤을 꼬박 샜다. 그러다가 친구인 여단 보위지도원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 던졌다.

“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너 남조선에 편지를 쓴 적이 있다면서?”

순간 김 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편지 사건은 친구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치위원 등 몇 명만 알았다. 그런데 그가 상관을 배신한 사람으로 지목되자 정치위원도 그를 제거하려 약점을 꺼내든 것이다. 이때는 정치위원을 띄우는 작품 창작도 끝난 뒤라, 김 씨의 활용도도 사라졌다.

친구에게서 편지 이야기를 듣자마자 김 씨는 방으로 돌아왔다. 남조선에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다시 들추면 정치범으로 몰릴 것이 뻔했다. 죽을 일만 남은 것이다.

“이럴 바엔 남조선으로 가자.”

그는 지도를 펼쳤다. 철도를 따라가 보니 양강도 혜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간단히 짐을 챙겨 부대를 빠져나와 기차에 올랐다. 1996년은 고난의 행군으로 경제가 마비됐던 때라 기차도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열차 안에서 8일이나 고생한 끝에 혜산에 내렸다.

혜산역에 내렸지만 압록강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몰랐다. 군관복을 입고 “압록강으로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면 수상하게 볼 것이 뻔한 터라 그는 무작정 헤맸다. 그런데 하필 방향이 반대였다. 무려 3일이나 헤매다가 압록강에 도착했다. 나중에 보니 혜산역에서 강까지는 5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압록강 기슭에 앉아 그는 하염없이 중국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되면 물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후 5시쯤 변수가 생겼다. 지나가던 국경경비대 두 명이 다가와 증명서를 보자고 했다. 군관이 오전부터 강가에 목석처럼 앉아있으니 수상해보였던 것이다.

증명서를 받아본 한 군인이 갑자기 반색을 했다.

“820훈련소 김진 작가 동지군요. 저는 인민군 신문으로 통해 작가 동지 잘 압니다. 심지어 대위 동지에게 편지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작품 하나 쓰려고 현장 답사 왔어.”

상대는 기뻐서 주절거렸지만, 신분을 들킨 김 씨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들이 부대로 가서 보고하면 체포조가 올 가능성이 컸다. 군인들이 헤어져 얼마쯤 갔을 때 그는 압록강에 뛰어들었다.

● 수배를 피한 9일간의 탈출

북송돼 평양으로 끌려가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한 김 씨는 산에서 하루를 더 은신해 있다가 주변 기차역을 찾아갔다. 그런데 벌써 기차역에 그의 수배 사진이 붙어있었다.

그는 다시 돌아가 숨어 있다가 밤 12시에 담장을 넘어 역에 몰래 들어갔다. 북으로 가는 화물열차를 잡아타고 가다가 새벽이면 무조건 내려 주변에 은신하고 다시 밤마다 화물열차를 탄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렇게 9일 동안 북으로 계속 올라갔다. 중국에서 겨울에 옷을 여러 벌 입고 있다 잡혔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호송될 때까지 그 옷들을 여전히 입고 있었는데, 그는 탈출 후에 옷을 한 벌씩 기차역 앞 상인들에게 넘겨주고 먹을 것과 바꾸었다.

때는 1997년 3월 말이었다. 낮에 산에 은신해 있다보면 산나물 캐려 올라오는 남루한 사람들, 나물이라도 캐먹고 살려고 산 밑에 비닐로 대충 막사를 만들고 사는 가족들을 수없이 만나게 됐다.

지금까지 부대 밖 세상은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김 씨는 그것들을 보면서 “이 나라는 망했구나. 이런 걸 내가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했고, 찬양을 하다니”라고 수없이 자책했다.

9일째 되는 날 기차 옆에 두만강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날은 날이 밝아도 계속 기차를 타고 갔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9시쯤 되자 함북 회령과 학포 사이 구간을 가던 기차가 고개에서 속도가 급격하게 늦춰졌다.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논밭을 가로 질러 두만강을 향해 달렸다. 민가나 도로와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라 그런지 막아서는 경비대도 없었다.

아직 두만강은 3분의 1 정도 얼어있었다. 그는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흙탕물로 변한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쑥 들어갈 것이란 예상을 했는데 의외로 물이 무릎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냅다 뛰어 중국땅에 도착한 그는 갈대밭에 드러누웠다. 드디어 중국에 다시 온 것이다.

아는 곳이 지난번 머물던 연길의 교회인지라 그곳을 찾아갔다. 대련까지 안내해주었던 태중원 목사는 그가 남조선에 이미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에 잡혀갔다 왔다고 해도 믿지 않고, 안기부에서 다시 임무를 받고 왔냐고 물었다.

1998년 봄 중국에 살던 김성민 대표가 자신이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건넜던 두만강의 탈북 현장을 다시 찾았다. 강 건너가 북한이다.



● 연길에서 올린 결혼식

연길에서 김 씨는 1999년 2월 한국에 올 때까지 계속 머물렀다. 연길에 오자마자 그는 사기꾼 목사를 수소문했다. 그가 베이징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목사는 “네가 목사냐”고 울부짖는 그를 보고도 침착한 목소리로 “정말 미안합니다. 목사도 사람이라 실수합니다”고 하며 500만 원을 돌려주었다.

나중에 그 목사는 속죄한다며 탈북민 구출활동에 뛰어들었고 수십 명의 탈북민을 한국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북한이 요원을 보내 그를 납치한 뒤 살해했다.

김 씨는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찾아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기다리란 말만 되풀이해 들었다.

연길에 있을 때 가장 큰 변화는 그를 보호해주던 태중원 목사의 처제와 결혼을 한 것이다. 당시 그녀는 연변병원 의사로 있었는데, 아프리카 선교사가 꿈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언제 잡혀갈지도 모르는 김 씨를 남편으로 선택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지만 그녀는 이 남자를 보호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사람을 좋아하는 김 씨는 한국에 온 뒤에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집에 끌고 왔다. 명절이면 주변 탈북민들을 다 불러 모으는 바람에 집이 넘쳐나 아파트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앉아 고기를 굽기도 했다. 김 씨의 집을 거쳐 간 탈북민은 수없이 많은데, 그때마다 부인은 불평 없이 남편과 손님들에게 상을 차린다. 탈북민 사회에서 김 씨 부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해먹인 사람은 없다.

그는 한국에 와서 20년 넘게 살면서 자기 집도 마련하지 못하고, 돈이 생기면 계속 엉뚱한데 써버리는 남편이지만 지금도 김 씨와 뜻을 같이하며 믿음직하게 곁을 지킨다. 이들은 부부가 아닌 동지가 된지 이미 오래다. 연길에서 태어난 딸은 벌써 20대 중반이 넘었다. 중앙대를 졸업하고 최근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연길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태중원 목사는 탈북민을 도와줬다는 죄로 박해를 받아 외국으로 망명했다.

결혼하고 얼마쯤 지나 김 씨는 한국에 있는 삼촌을 찾았다. 연길에 있는 내내 여러 선을 통해 수없이 알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는데, 백두산 관광을 왔다가 교회에 들린 한국 사업가가 자신이 알아본다며 돌아가더니 3일 만에 찾았다고 연락을 해왔다. 한국에 사는 할머니와 작은 삼촌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큰 삼촌 한 명만 남아있었다. 둘은 통화를 하면서 금방 서로를 알아봤다. 큰 삼촌의 목소리가 아버지와 똑같았다.

삼촌은 성공한 사업가가 돼 있었고, 자식들 또한 잘 나갔다. 조카가 왔다는 소식에 삼촌은 연길로 날아왔다. 처음 봤지만 보자마자 “형님 아들이 맞구나”고 부둥켜안았다. 피는 물보다 진했다.

삼촌은 몇 만 달러를 주고 갔다. 당시 연길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김 씨는 이 돈 일부로 중국 호구를 사서 신분을 세탁한 뒤 한국식 당구장을 하나 차렸다. 삼촌은 한국으로 오라고 거듭 권했지만, 그는 가족과 떨어져 살기 싫었다.

당구장을 운영하면서 그는 갈 데 없는 탈북 청년 수십 명을 그곳에 숨겨주고 먹여주었다.

2006년 미국 워싱턴 의회 건물 앞에서 열린 자유북한주간 행사. 김 대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탈북민들을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다.



● 연변의 치열한 남북 정보전

1990년대 후반 연변은 남북의 치열한 전쟁터였다. 보위부와 안기부 요원들이 신분을 숨기고 맹활약했다. 이때는 탈북민이 연변에 가장 많았던 때이기도 했다.

탈북민 속에서 북한을 붕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지하조직들도 생겨났다. ‘북한인민해방전선’ ‘피로써 북조선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연합(피민련)’ ‘진달래회’ 등 알려진 것만 5개의 비밀조직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두만강 건너에 있는 김일성 동상을 폭파시키겠다며 러시아 암시장에서 휴대용 대전차 유탄발사기(RPG)를 사오기도 했다.

보위부는 이 조직들을 적발하기 위해 탈북민으로 위장한 요원들을 계속 잠입시키며 혈안이 돼있었다. 보위부의 공작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1990년대 말 혜산에선 김일성동상을 폭파시키려던 비밀조직 수십 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동지들을 밀고한 배신자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보복이 두려워 원산에 이주해 살다가 얼마 뒤 앓아 죽었다.

북한 체제를 겨냥한 수많은 공작을 분쇄시키며 맹활약을 한 지휘관은 함경북도 보위부 윤창주 대좌였다. 북한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수백 명을 납치 살해하며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았던 그의 운명은 비참했다. 2011년 처형된 류경 보위부 부부장의 심복으로 낙인돼 함북 보위부 심복 10여명과 함께 처형됐다. 그들의 가족은, 그들이 수없이 사람들을 잡아 보냈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이외에도 탈북민 공작에 가담한 북한 보위부 간부와 요원들의 말년은 대개 다 비참했다. 북한에서 사냥개에게 차려진 운명은 토사구팽뿐이었다.

1990년대 후반 연변에서 활약하던 안기부 요원들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사라졌다. 적십자 명함을 들고 다니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이 시기에 연변에서 성공한 탈북민 출신 사업가로 활동했던 김 씨는 수많은 공작의 전모를 직접 보았다. 하지만 아직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이 많기에 나중에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다.

연길에서 많은 탈북민과 연계를 하면서, 그의 신분도 점점 노출되기 시작했다. 언제 체포조가 들이닥쳐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중국 호적을 갖고 있던 김 씨는 중국 여권을 만들어 한국의 삼촌에게 두 번 놀러오기도 했다. 1999년 2월에도 한국에 와서 강원도 등을 놀려 다니고 돌아가려는데, 김포공항에서 체포됐다. 공항 직원이 조선족 같지 않은 그의 행동을 심상치 않게 여겨 북한 간첩으로 의심한 것이다. 그는 탈북한 북한 군관 출신이라고 순순히 시인하고 조사기관에 이송됐다.

당시엔 북한군 자주포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을 때였다. 그는 하나원에도 가지 않고 무려 10개월을 조사받았다. 그리고 1999년 12월 사회에 나와 정착을 시작했다. 2002년엔 중국에서 가족도 데리고 왔다. 한국에서 그는 새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김성민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2005년 워싱턴에서 한성렬 북한 유엔대표부 차석대표 면전에서 김정일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들고 시위하는 김성민 대표.



● 대북 라디오의 역사

그가 입국하자 삼촌은 조카에게 자기 회사 부장 직함을 달아주고 사무실까지 내주었다.

하지만 회사에 나가도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출근해 책상 먼지를 털어내고 앉아있는 날이 반복됐다. 그의 성격과 조금도 맞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탈북민들과 어울리며 1년 넘게 보냈다. 그러다가 이렇게 탈북민이 많으니 뭉쳐서 뭔가 해보자고 제안했다. 2001년 첫 자생적 탈북단체 ‘백두한라회’가 만들어졌다. 김 씨는 30여명의 회원들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다녔는데 매달 두 집씩 독거노인의 집을 찾아 도배를 해주었다.

그렇게 살던 중 2003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게서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삼촌 회사를 나와 그는 황 전 비서를 보좌하는 일을 시작했다. 2006년엔 탈북자동지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2004년 그는 첫 민간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을 만들었다. 2004년 6월 4일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남북은 선전 활동을 중지하고 선전 수단을 철거하기로 합의했다는 6·4 합의가 방송에 나오던 날 그는 10여명의 전직 외교관 등 탈북 선배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방송을 보던 누군가 “정부에서 대북 방송을 끊으면 우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동석자들의 눈은 일제히 김 씨에게 향했다.

“대북 방송을 할 사람은 너 밖에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중에서 김 씨의 나이가 제일 어린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를 방송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 씨는 KBS ‘남북의 창’, KBS 라디오 ‘출발동서남북’ 등에서 MC로 활약했고 국정홍보방송에서 ‘서울말 평양말’ 코너를 3년째 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전방에 나가 확성기로 북한 지휘관들을 단죄했던 용기도 있었다. 나중에 귀순한 620훈련소 출신 군관은 김 씨에게 그 방송 때문에 620훈련소 정치위원 등이 해임될 뻔 했지만 “변절한 사람의 말을 믿고 해임시키는 것은 억울하다”는 하소연이 인정돼 살아남았다고 했다.

군 총정치국은 그때에야 투서를 보낸 사람의 신원을 밝혔다. 알고 보니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하고 제대했던 선전대 창작조장 출신의 병사가 악감을 품고 벌인 일이었다. 부대에선 악기를 훔쳐온 비밀을 선전대 간부 몇 명만 알고 있다고 생각해 제대해 간 사람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선전대장 대리가 돼 가장 큰 수혜자로 여긴 김 씨를 투서자로 확신했던 것이다.

그날 술자리에 참석한 12명이 김 씨에게 대북라디오 방송을 하라며 100만 원씩 모아주었다. 한국의 민간 대북라디오의 역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게 6·4 합의가 발표된 날에 시작됐다. 하지만 방송인과 라디오 방송 운영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1200만 원으로 라디오 방송국을 차리기엔 어림도 없었다. 이때 삼촌이 3억 원이란 거액을 건네주었다.

한 북한 관련 연구소의 건물을 빌려 방송국을 차리고 첫 방송을 시작했을 때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총련 통일선봉대 30여명 등 온갖 단체들이 몰려와 시위를 벌였다.

매일 같이 시위에 시달리자 김 씨는 없던 오기가 생겨났다.

“내가 대북방송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구나.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

시위대에 시달리던 연구소 측은 나가달라고 했다. 그는 방송국을 서울의 한 작은 빌딩으로 옮겨왔다. 협박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죽은 쥐, 칼을 꽃은 인형 등이 수시로 배달됐다. 팩스에 딸 이름까지 적어 보내며 협박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협박을 견디며 그는 지금까지 20년 동안 자유북한방송을 운영해 오고 있다. 그 기간 수없이 많은 사연들이 있었다.

2005년 10월 그는 다른 탈북 여성 3명과 함께 미 하원 탈북자 청문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날 한성렬 유엔대표부 차석대사와 북한 외교관 몇 명이 같은 건물에 왔다. 북한 외교관들이 왔다는 소리에 증언하러왔던 탈북 여성 3명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김 씨는 화가 났다. 급히 종이판을 구해 ‘한성렬, 한반도 평화의 길은 김정일 타도!’라고 적고 한 대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한반도 평화의 길은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는 것”라고 구호를 외치자 한 대사는 험한 표정으로 “너 이 새끼, 죽을래?”라며 고함을 질렀다. 김 씨는 “너도 죽을거야”라고 맞받았다. 북한 최고의 대미 라인으로 알려진 한성렬은 2018년 진짜로 처형됐다.

김 씨는 북한 주민의 인권과 존엄성 증진을 위해 미국과 한국에서 번갈아 매년 열리는 북한자유주간 행사도 20년째 진행하고 있다. 미국의 단체들과 연합해 열리긴 하지만, 한국에서 모든 업무를 담당해 처리하는 김 씨가 없다면 이 행사는 열릴 수가 없다. 북한 민주화를 위한 활동 공적으로 그는 ‘2009 아시아 민주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구글에서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를 검색하면 수많은 기사들이 뜬다.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북한의 협박도 많아졌다.

 
2017년 폐암 말기로 사망 선고를 받은 김성민 대표가 오랫동안 옆을 지켜온 부인과 함께 사진을 남겼다.
 
 
 
● “세 번째 삶을 삽니다.”

2017년 3월 어느 날, 그날도 김 씨는 북한자유주간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밤늦도록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페이지만 마무리하면 되는데 도무지 자판을 칠 수가 없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작업을 마친 그는 마지막 마침표를 누른 뒤 쓰러졌다.

병원에 가보니 뇌종양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뇌에 생겨난 시꺼먼 구멍이 보였다.

즉시 수술이 잡혔다. 뇌에 있는 종양을 도려내고 입원해 있는데, 의사가 다시 찾아왔다.

“사진을 판독하니 뇌종양보다 더 심각한 것이 폐암입니다. 암이 폐에서 전이됐어요. 폐암 말기입니다.”

찾아온 가족에게 의사는 “더는 손 쓸 수가 없으니 마지막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아직 김정은 정권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내가 먼저 죽을 수는 없다. 이젠 살아남는 것이 나의 투쟁이다.”

김 씨는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주사 한 번 맞고 나니 머리가 다 빠졌다. 그의 삶을 아는 지인들이 적극 나서서 수천만 원의 치료비를 모아 후원해주었다. 또 연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해주었다. 그러나 암세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치료를 포기하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지만, 끝내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

기적이 일어났다. 신약 임상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최신 항암제를 투약했다. 임상대상자가 되면 새로 나온 비싼 항암제를 무료로 맞을 수 있다.

이 약의 효과가 너무 좋았다. 폐암 말기에서 치료를 시작한 뒤 5년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암 투병 중에도 그는 여전히 자유북한방송 대표로, 북한자유주간의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작년 8월 타자를 치다가 또 같은 증세를 느꼈다.

병원에 가보니 이번엔 반대쪽 뇌에 종양이 생겨났다. 다시 수술을 했는데 예후는 나쁘지 않다. 그는 이번에도 이겨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 미국에서 효과가 뛰어난 항암제가 또 나왔다고 한다.

“사실 삶에 대한 애착은 크게 없어요.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살았고, 폐암과 뇌암 말기도 이겨냈으니 이미 두 번을 죽었다 살아났다고 봐야죠. 남은 생은 덤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져요.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살자. 그리고 자유북한방송은 중단돼선 안 된다. 지금 저의 목표는 이 두 가지로 단순하게 좁혀졌어요.”

아버지는 남조선을 해방한다며 평양에서 대남방송을 하다가 숨졌다. 지금은 아들이 서울에서 북한을 해방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목숨 걸고 대북방송을 진행한다. 그는 이미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