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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白頭山 : Paektu Mountain, lit. 'white head mountain'

류지미 2023. 10. 1. 11:45

 

Paektu Mountain (Korean: 백두산  白頭山, lit.  'white head mountain') 

 Heaven Lake _Mt._Paekdu

 

Paektu Mountain (Korean: 백두산) or Baekdu Mountain is an active stratovolcano on the Chinese–North Korean border.[3] It is called in Chinese Changbai Mountain (Chinese: 长白山) and in Manchu Golmin Šanggiyan Alin (Manchu: ᡤᠣᠯᠮᡳᠨ ᡧᠠᠩᡤᡳᠶᠠᠨ ᠠᠯᡳᠨ). At 2,744 m (9,003 ft), it is the tallest mountain in North Korea and Northeast China and the tallest mountain of the Baekdu-daegan and Changbai mountain ranges. The mountain notably has a caldera that contains a large crater lake called Heaven Lake, and is also the source of the SonghuaTumen, and Yalu rivers. Korean and Manchu people assign a mythical quality to the mountain and its lake, and consider the mountain to be their ancestral homeland.

 

Mount_Paektu_Relief_Map

 

* relief map : a map having contour lines through points of equal elevation ,  (입체) 모형 지도 

 

The mountain's caldera was formed by an eruption in 946 that released about 100–120 km3 (24–29 cu mi) of tephra. The eruption was among the largest and most powerful eruptions on Earth in the last 5,000 years. The volcano last erupted in 1903, and is expected to erupt around every hundred years. In the 2010s, concerns over an upcoming eruption prompted several countries to commission research into when the volcano might next erupt.

 

The mountain is considered culturally important to multiple groups in the area, including Korean, Chinese, and Manchu people. The mountain is a major national symbol for both North and South Korea, and is mentioned in both national anthems and depicted on the national emblem of North Korea. The Manchu people also consider the mountain their ancestral homeland, and the Chinese Qing dynasty saw it as a symbol of imperial power. The mountain has also been subject to territorial disputes over the past few centuries that have continued into the present.

 

Current geography and geology

 

Mount Paektu is 2,744 m (9,003 ft) tall, making it the highest mountain in North Korea and Northeast China and the highest mountain of the Baekdu-daegan and Changbai mountain ranges.

 

Mount Paektu is a stratovolcano whose cone is truncated by a large caldera. The central section of the mountain rises about 3 mm (0.12 in) per year due to rising levels of magma below the central part of the mountain. Sixteen peaks exceeding 2,500 m (8,200 ft) line the caldera rim surrounding Heaven Lake. The highest peak, called Janggun Peak, is covered in snow about eight months of the year. The slope is relatively gentle until about 1,800 m (5,910 ft). The caldera is about 5 km (3.1 mi) wide and 850 meters (2,790 ft) deep, and is partially filled by the waters of Heaven Lake.

 

Heaven Lake has a circumference of 12 to 14 kilometers (7.5 to 8.7 mi), with an average depth of 213 meters (699 ft) and maximum depth of 384 meters (1,260 ft). From mid-October to mid-June, the lake is typically covered with ice. Water flows north out of the lake, and near the outlet there is a 70-meter (230 ft) waterfall. The mountain is the source of the Songhua, Tumen and Yalu rivers. The Tumen and the Yalu form the northern border between North Korea and Russia and China.

 

 

Changbai Mountain (Chinese: 长白山, 長白山 , lit. 'long white mountain' )

Heaven_Lake_-_Changbai_Mountain_(Aerial_photograph)

 

The Changbai Mountains (simplified Chinese: 长白山; traditional Chinese: 長白山; lit. 'long white mountain') are a major mountain range in Northeast Asia that extends from the Northeast Chinese provinces of Heilongjiang, Jilin and Liaoning, across the China-North Korea border (41°41' to 42°51'N; 127°43' to 128°16'E), to the North Korean provinces of Ryanggang and Chagang. They are also referred to as the Šanggiyan Mountains in the Manchu language, or the Great Paekdu in Korean. Most of its peaks exceed 2,000 m (6,600 ft) in height, with the tallest summit being Paektu Mountain at 2,744 m (9,003 ft), which contains the Heaven Lake, the highest volcanic crater lake in the world at an surface elevation of 2,189.1 m (7,182 ft). The protected area Longwanqun National Forest Park is located within the vicinity of the mountain range.

 

 

백두산 (白頭山)

 

함경남도 · 함경북도와 중국 동북지방(滿洲)의 길림성(吉林省)이 접하는 국경에 걸쳐 있는 우리 나라에서 최고 높은 산.

 

정의
함경남도 · 함경북도와 중국 동북지방(滿洲)의 길림성(吉林省)이 접하는 국경에 걸쳐 있는 우리 나라에서 최고 높은 산.

 

 

개설

높이 2,744m(중국측 발표는 2,749.6m)이다. 활화산(活火山)으로 북위 41°31′∼42°28′, 동경 127°9′∼128°55′에 걸쳐 있고, 그 총면적은 약 8,000㎢에 달하여 전라북도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 산의 북쪽으로는 장백산맥(長白山脈)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며, 백두산을 정점으로 동남쪽으로는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의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간백산(間白山, 2,164m), 소백산(小白山, 2,174m),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 남포태산(南胞胎山, 2,435m), 백사봉(白沙峰, 2,099m) 등 2,000m 이상의 연봉(連峰)을 이루면서 종단하고 있다.

한편, 동쪽과 서쪽으로는 완만한 용암대지(熔岩臺地)가 펼쳐져 있어 백두산은 한반도와 멀리 북만주지방까지 굽어보는 이 지역의 최고봉이다.

 

명칭 유래

백두산의 이름은 먼 옛날부터 여러 가지로 불리어 왔다. 문헌에 의한 최초의 이름은 불함산으로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북경(大荒北經)〉에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이라고 이름한다.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라고 기재되어 있다. ‘불함’에 대하여 최남선(崔南善)은 ‘ᄇᆞᆰᄋᆞᆫ’의 역음으로 보고 그 뜻을 천주(天主)인 신명(神明)으로 해석했다. 또한 중국에서는 몽고족의 ‘불이간(不爾干)’, 곧 신무(神巫)의 뜻으로 보아 백두산에 신이 있다는 데서 연원한 것으로 보았다. 양측의 해석이 모두 ‘신(神)’으로 보는 공통점이 있다.

한대(漢代)에는 백두산을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고 부른 바 있으며 남북조의 위(魏)시대에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하였고 또는 ‘도태산(徒太山)·태백산(太白山)’이라 불렀다. 《북사(北史)》에 “말갈국 남쪽에 종태산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황이라 하며, 세상사람들은 이 산을 받들어 모셨다. 사람들은 산상에서 오줌을 누어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산에 오르는 자는 용변을 본 뒤 그릇에 담아갔다. 산에는 곰·범·이리가 있는데 모두 사람을 해하지 않고, 사람 역시 감히 죽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위서(魏書)》와 《수서(隋書)》에 모두 도태산(徒太山)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북사》의 종태산(從太山)은 도태산의 오자일 것이다. 당나라 때는 태백산이라 불렀고, 금(金)나라 때에 이르러 장백산(長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 불렀다.

 

우리 나라의 기록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조선조에 백두산을 ‘태백산(太伯山)’이라 칭하였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의 광종 10년조에 “압록강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 쪽에서 살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백두산의 명칭은 불함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단단대령·개마대산·도태산·태백산·백산·장백산·백두산 등으로 불리어왔으나, 한대 이후 불리어진 명칭의 공통점은 백(白), 즉 희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백(白)을 굳이 ‘ᄇᆞᆰ’의 차음(借音)으로 보고 있으나, 백두산의 모습으로 보아 그대로 백(白)자 자체의 뜻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두산 산정은 거의 사계절 동안 백설로 덮여 있을 뿐 아니라, 산정부는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이루어져 있어 눈〔雪〕이 아니더라도 희게 보이는 데서 그 이름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韓民族)의 발상지로, 또 개국(開國)의 터전으로 숭배되어 왔던 민족의 영산(靈山)이었다.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수난을 같이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천지(天池)를 비롯한 절경이 많은 데다가 독특한 생태적 환경과 풍부한 삼림자원이 있어 세계적인 관광의 명소로서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는 산이다.

〔역사와 문화유적〕

 

1285년(충렬왕 11)에 일연(一然)이 편찬한 《삼국유사》 고조선시대에 인용된 고기(古記)의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백두산이 우리 한민족의 발상지로 나타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득한 옛날, 하느님의 작은아들 환웅(桓雄)께서 여러 차례 인간세계에 내려가고자 하자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뜻을 아시고 하계를 두루 살피시더니 태백(太伯) 곧 백두산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으로 여기시어, 곧 아드님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내려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께서는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박달나무 아래에 내리시어 그곳을 신시(神市)라 하시니, 이 분이 곧 환웅천황이시다.”

이른바 단군신화라고 불리는 이 기사의 무대가 다름 아닌 백두산이다. 단군신화가 반영하는 시대는 청동기문화의 등장시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직까지는 백두산 일대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 보고된 바는 없다.

백두산은 사화산이 아니라 200∼300년을 주기로 분출했던 활화산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백두산은 한민족의 직접적인 거주지였다기보다는 불을 뿜어내어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성역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인지가 발달하지 못한 선사시대의 사람들은 신비로운 금단의 지역으로 여겼을 것이므로, 민족의 시원을 말해주는 신화의 무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백두산 지역은 민족의 기원설화를 안고 있는 까닭에 인간의 거주가 제한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백두산 지역에서의 유물·유적의 발굴은 기대하기 힘들다.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의 시기에는, 숙신·부여·읍루 등의 북방유목민족 계통의 종족들이 백두산 주변에서 흩어져 살았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남쪽에는 고구려, 서쪽에는 부여, 북쪽에는 읍루, 동북쪽에는 숙신, 동쪽에는 동옥저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백두산은 위의 여러 종족이 모두 성역으로 간주하였다.

고구려가 강성해진 이후에 백두산은 고구려의 세력권이었으며, 발해의 영토 안에 있었다. 연변 지역에는 발해가 건설한 많은 성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발해의 전기의 도성인 구국(舊國, 돈화현 오동성)과 5경 중의 동경 용원부(훈춘현 팔련성), 중경 흥덕부 등이 이 지역에 분포하여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발해의 영토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셈이므로, 비록 관련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발해시대에도 여전히 성역으로 간주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백두산은 통일신라나 고려의 영역 외곽에 위치하여 북방 이민족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요를 건국한 거란이나, 금을 건국한 여진족의 발상지도 역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금은 1172년(명종 3)에 이 산을 산신으로 봉하여 영응왕(靈應王)이라고 하였고, 1193년에는 개천굉성제(開天宏聖帝)로 책봉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여진족이 백두산을 경계로 흥경(興京)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일대의 우량하(兀良哈)와 두만강 쪽의 오도리(幹都里) 우디거(兀萩哈)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후금이 건국되자 백두산 일대를 자신들의 시원지로 간주하여 영경(靈境)이라고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청대에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과 거주를 제한하는 이른바 금봉책(禁封策)을 실시하였다.

1434년(세종 16)에 세종은 북방 야인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두만강 일대에 6진(경원·경흥·회령·부령·온성·종성)을 설치하였고, 1443년(세종 25)에는 압록강변에 4군(무창·자성·여연·우예)을 설치함으로써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천연적인 국경이 되었다. 그러나 백두산 일대는 너무나 광활한 데다 사람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국경선을 확연히 분획할 수는 없었다.

우리 나라와 중국의 문헌 중에서 1677년(숙종 3, 淸 康熙 16)에 궁정내무대신인 무목납(武木納) 등 4인을 백두산에 파견하여 실황을 조사, 기록한 《장백정존록(長白征存錄)》이 최초의 백두산 답사기록일 것이다.

무목납 등은 5월에 북경을 출발하여, 6월에 서남쪽 만강(漫江)·긴강(緊江)이 합류하는 곳으로부터 등반하여, 6월 17일에 백두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하산하여, 8월에 북경으로 돌아갔다. 무목납이 강희제에게 올린 글 가운데, 백두산 산정의 경치를 묘사한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풀이 다한 곳으로부터 흰 자작나무가 있는데, 완연히 심은 것 같고, 향나무가 총생하고, 노란 꽃이 유난히 고왔습니다. 수풀을 걸어나와, 멀리 바라보니 구름과 안개가 산을 가리어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지세를 보니 매우 완만한데, 편편히 보이는 흰빛은 모두 빙설이었습니다…. 산정에 못이 있는데, 다섯 봉우리가 둘러싸고, 물 가까이 솟아 있는데, 벽수는 매우 맑고 물결이 탕양히 일고, 못가에는 초목이 있었습니다.” 이 기록에서도 백두산에 인간의 유적이 있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1712년(숙종 38) 5월에 청나라의 제의에 의하여 오라총관(烏喇總官) 목극등(穆克登)과 조선 군관 이의복(李義復)과 조태상(趙台相)이 백두산의 분수령인 높이 2,150m의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이 비가 백두산에 전하는 금석문으로서는 최초의 유적이 될 것이다. 당시 정계비를 세웠던 상황을 보면 조선측 대표로서는 참판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가 나갔으나, 목극등이 조선 대표의 연로함을 빙자하여, 조선 측의 접반사군관 이의복, 감사군관 조태상, 통관 김응헌(金應瀗) 등만을 대동하고 산정에 올라가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자기들 측에 유리하게 비를 세웠다. 비면에는 위에 대청(大淸)이라 횡서하고, 그 밑에 종서로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깎아 기록한다. 필첨식(筆帖植:청조의 서기관)·통관(通官:청조의 통역관) 강희 51년 5월 15일 조선 군관 이의복·조태상, 차사관 허량·박도상, 통관 김응헌·김경문”이라고 기록하였다.

이 정계비는 높이 72㎝, 아랫부분 너비 55.5㎝, 윗부분 너비 25㎝의 6각기둥 모양이다. 그러나 청이 정계비를 세운 이후에도 조선의 백성들이 월강(越江)하여 백두산 일대를 포함한 간도(間島)에 이주하여 개간을 하는 등 사실상 이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김정호(金正浩)는 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해설문에서 백두산에 대해 “산줄기가 요동 들판을 가로지르며 일어나 백두산이 되니, 이 산은 조선 산맥의 한아비라, 산에 삼층이 있는데, 그 높이는 200리가 되고, 넓이는 1,000리에 걸쳐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으니, 이름을 달문이라고 한다. 둘레가 800리로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으로 나뉘어 두만강이 된다. 백두산은 분수령 남북으로 길게 뻗쳐 연지봉·소백산·설한등령·철령 등에 걸쳐 있거니와 한 가닥이 동남으로 내달으며 치솟아 도봉 삼각산을 이루고 그 사이를 한강이 흐르고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1881년(고종 18, 淸 德宗 7)부터 청이 금봉책을 철회하고 간도개발을 시작하게 되면서, 조선 백성의 소환을 요구하고, 이 지역의 귀속문제를 명확히 할 것을 희망하였다.

조선 정부는 1883년(고종 20)에 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임명하여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였으며, 정계비의 ‘동쪽은 토문강’이라고 한 토문이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의 상류인 토문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토문강과 두만강 중간에 있는 간도는 당연히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은 ‘토문’은 ‘두만강’의 다른 표기라고 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서 1885년에는 이중광(李重光)을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로 삼고 청나라 대표와 함께 정계비를 재조사하게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감계담판이 이루어졌으나 청은 토문이 두만강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간도지방에는 청의 통제가 미치지 않았으며, 조선 백성들이 이 지역에 ‘사(社)’라고 불리는 자치기구까지 두면서 거주하고 있었고, 또한 주민의 8할을 차지하였으므로, 정계비의 자구 해석만을 고집할 문제는 아니었다.

1887년(고종 24)에는 청나라에서 다시 홍단수(紅丹水)를 경계로 국경을 정하려 하였지만, 우리측 감계사 이중하(李重夏)는 “이 머리는 베일지라도 국토는 줄일 수 없다(此頭可斷國土不可縮).”고 목숨으로 항거하여 청나라의 주장을 좌절시킨 일도 있다.

토문강과 두만강이 엄연히 다른 데도 두만강이 국경선이 되면서 토문강 일대의 국토를 잃게 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청의 세력 때문에 관철되지 못한 데다,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부설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하여 철도부설권을 취하는 대가로 간도지방을 청나라에 넘겨줌으로써 간도지방인 연변(延邊) 일대에 현재 우리 동포가 180만 명이나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영토로 환원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침략했던 민족항일기에 있어서 백두산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무력항쟁의 기지로서 더없이 좋은 곳이 되었다.

1920년 6월, 백두산 기슭의 봉오동(鳳梧洞)에서는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인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이끄는 700여 명의 독립군과 일본군 제19사단의 병력이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120여 명을 사살하여 독립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을 하였다.

백두산은 이처럼 항일의 전승지로서 독립운동사에 그 이름이 빛날 뿐만 아니라, 6·25전쟁 때에도 백두산은 역시 민족혼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였다. 당시 붉은군대에 맞서 항쟁했던 젊은이들이 백두산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 개마고원유격대가 전투부대를 조직하여 북한군과 투쟁한 활약은 유명하다.

현재는 백두산이 천지 수면을 경계로 한·중 양국에 분단된 상태에서, 북한측 백두산에는 도처에 김일성선전탑을 세우는 등 개인숭배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중국 측의 백두산 실황을 보면, 1958년 천문봉(天文峰)에 기상대를 설치하였고, 1960년에 백두산 일대 21만㏊의 면적을 ‘장백산자연보호구’로 설정하였으며, 1980년 3월에는 국제생물권보호구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백두산 지역의 산림과 동물이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

백두산은 옛날부터 사람들이 근접하기 어려운 곳이라 유물·유적이 거의 없다. 목극등이 비를 세우면서 백두산에 대하여 남긴 기록에, “산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용담이라 하고, 그 둘레는 70리나 되지만 깊이는 알 수 없다. 물은 북소리를 내듯이 솟고, 돌이 부딪히는 소리는 우뢰와 같은데, 항상 구름 가운데 자옥하게 싸여 있어, 또한 천지라고도 부른다. 못은 다 돌로 되어 있으나, 물에 뜰 정도로 가벼운 것은 분가루 같고 모양은 허파처럼 되어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근래의 천지의 모습과 동일하지만, 역시 유적에 대하여 별달리 언급한 바 없다.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터전을 잡았던 신시라고 하는 천평(天坪)에 대하여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에서도 그 광활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어떤 유적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1899년에 러시아 작가 가린이 쓴 백두산 기행문에서도 천지의 신비로움에 대하여 극찬하였으나, 별다른 유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천지의 달문 부근에 백두산 신령을 받들던 종덕사(宗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29년에 건립되었으며, 팔각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팔괘묘(八卦廟)라고도 칭하였다. 근래 폭우로 인하여 파괴된 뒤, 그 절을 지키던 승려도 종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백두산 천지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옛날부터 전해오고 있다. 그 중 문헌의 기록으로서 1930년 중국에서 편찬된《무송현지(撫松縣志)》에 의하면 약 60년 전(1870년경)에 네 명의 사냥꾼이 백두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천지변의 조오대(釣鷘臺)에 이르렀을 때 지반봉(芝盤峰) 밑 천지에서 한 괴물이 수면에 노출된 것을 보았다. 괴물은 황금색으로 머리는 큰 화분만 하고, 두상에는 뿔이 있고, 긴 목에는 수염이 많은데, 머리를 숙여 흔드는 모습이 마치 물을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사냥꾼들은 이 광경을 보고 매우 겁이 나서 황급히 산꼭대기로 향하였다. 산 중턱쯤 올랐을 때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려 사냥꾼들이 뒤를 돌아다보니 물 가운데 있던 괴물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사냥꾼들은 모두 그 괴물이 황룡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기록은 앞에서 인용한 국내외의 조사보고를 볼 때 사실로 믿기 어렵다. 특히 근래 중국측에서 자세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백두산 천지 주변은 현무암의 고산준령으로서 초목이 살지 못하고, 수중에는 유기질과 부유생물이 극소하기 때문에 천지 중에 대형 척추동물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도 천지에 괴물이 있음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어 관심사가 된 바 있다. 첫번째는 1926년 8월 중순 길림성 기상기재 공급소에서 일하는 주봉영(周鳳瀛)의 목격담이었고, 두 번째는 1980년 8월 21일 중국 현대작가 뇌가(雷加)와 다른 사람들의 목격담이었고, 세 번째는 1981년 7월 20일 북한 과학시찰단의 목격담이었다.

이상과 같이 천지에 나타난 괴물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영국 스코틀랜드협곡의 네스호에서 나타났던 공룡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약 6500만 년 내지 1억7000만년 전 주로 해양 중에 생존하였던 파행동물(爬行動物)의 후예가 일찍이 해수의 침입도 없었고, 화산활동이 근래까지도 되었던 백두산 지역에 생존하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문학ㆍ예술에 나타난 모습〕

 

우리나라 사람이 고려시대 이전에 백두산을 등반한 기행문은 찾아볼 수 없고, 1764년(영조 40)에 함경북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朴琮)이 직접 백두산을 탐승하여 순한문 기행으로 남긴 〈백두산유록 白頭山遊錄〉이 처음이 될 것이다.

이 유록은 그의 유저(遺著)인 《당주집(鐺洲集)》 속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이 사실적으로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200여년 전의 백두산의 실황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1764년 5월 14일 경성군(鏡城郡)에 살던 박종이 자기 집을 떠나, 부령(富寧)·무산(茂山)·임강대(臨江臺)·풍파(豐坡)·천평(天坪)·천동(泉洞)을 거쳐 23일에 최고봉에 오른 뒤 하산하여 6월 2일에 집에 돌아왔다. 비록 말을 이용하였으나, 18일 동안 왕복 1,322리를 다녀서 백두산을 탐승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백두산유록〉의 내용에 의하면, 박종에 앞서 2년 전인 1762년 조영순(趙榮順)이라는 사람이 백두산을 등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여행기를 찾아볼 수 없음은 애석한 일이다.

또한 이 유록 중에, 홍계희(洪啓禧)가 이미 1742년에 어명을 받들어 갑산·무산으로 들어오면서 백두산을 편람한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이 밖에 영조 때 서명응(徐命膺)의 《보만재집(保晩齋集)》 속에도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가 있다.

근래의 자료로는 1927년에 간행된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 白頭山覲參記》가 있고, 1931년에 간행된 안재홍(安在鴻)의 〈백두산등척기 白頭山登陟記〉가 있다.

두 저자가 모두 백두산을 직접 등반하면서, 백두산의 실경을 매우 소상하게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백두산에 얽힌 전설과 역사적인 사실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여 민족 정기를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백두산에 대한 기행문학으로서는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가 처음이 될 것이다.

근래 외국인의 백두산에 대한 탐사기록으로는 우선 1900년에 러시아에서 간행된 《한국지 (韓國誌)》를 들 수 있다. 〈한국의 지리〉 속에 인용된 스트렐비츠키의 백두산등정기에서는 백두산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6일 동안 우리는 빽빽한 타이가를 통과하였다. 드디어 탄바이에서 60㎞ 떨어진 부르토파라고 불리는 자연경계선 뒤에서부터 숲은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하였고, 점차 그 도를 더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우리 앞에는 8∼10㎞ 정도 떨어진 곳에 백두산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났다. 화산은 넓은 기저 위에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그 기저는 커다란, 그러나 완만히 상승되는 지반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산기슭에는 몇 개의 작고 둥그런 언덕들이 있었는데 그 언덕들은 주봉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백두산과 비교하여 볼 때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더욱 더 선명하게 백두산의 높이를 부각시켜 주었다. 우리들이 그곳에서 보기에 백두산은 바위가 많고 외떨어져 있는 산이었다. 백두산 기슭에서 약 2,000피트 솟아 있었으며 평평한 책상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윗부분이 약간 잘려져 있었다. 우리가 있었던 지점에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분화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지 않았다. 대체로 산의 빛깔은 회색빛이 나는 희뿌연 색이었으나 햇빛이 미치지 않은 깊은 골짜기에는 벌써 눈이 쌓여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옆면의 경사를 따라 가늘고 밝은 하얀 산들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일본의 백두산탐구등행대 대장인 시로야마(城山正三)의 《비경백두산천지 祕白頭山天池》라는 탐행기록이 1970년 6월, 동경에서 발행되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실제로 백두산을 등반한 것은 제1차 탐행이 1942년 여름이었고, 제2차 탐행은 1943년 여름이었다. 제1차에는 총 75명의 대원으로 혜산(惠山)에서 출발하였고, 제2차에는 총 85명의 대원으로 주대(主隊)는 무산에서 출발하고, 지대(支隊)는 혜산에서 출발하여 신무성(神武城)에서 합류하여 백두산을 등반하였다.

책의 제1부는 해설과 탐행기록, 제2부는 사진, 부록에는 대만·천도(千島쿠릴열도)·캄차카의 산들로 나누어 편찬되어 있다. 비록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영토확장의 목적으로 탐행한 기록이지만, 광복 전에 백두산을 탐사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여 놓았기 때문에 백두산 연구에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산의 높이, 폭포의 높이 등 부정확한 기록이 발견되며, 기행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1982년 북경에서 간행한 정흥왕(丁興旺)의 《백두산천지》는 백두산에 대하여 가장 과학적으로 조사, 연구한 기록으로서 백두산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백두산에 대한 특이한 기행문으로는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기자였던 이관구(李寬求)가 비행기로 관찰한 백두산의 비경을 〈백두산탐험비행기 白頭山探險飛行記〉라는 제목으로 《조선중앙일보》에 1935년 10월 11일부터 그 해 11월 10일까지 연재하였다.

역대 시 속에 나타난 백두산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나 몇 작품만 보면 고려시대 이색(李穡)의 ‘송동북면한만호득월자(送東北面韓萬戶得月字)’라는 시제 속에 “솟아오른 장백산과 험준한 철령관이 수천 리에 가로놓여 있으니 하늘이 만든 험한 땅이라 가히 넘나들 수 없다…(長白山穹窿 嶺關峰山岏亘幾千里天險不可越……)”라는 한시가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시조로는 김종서의 “장백산에 기ᄅᆞᆯ 곳고 두만강에 ᄆᆞᆯ을 싯겨 서근 져 션뵈야 우리 아니 ᄉᆞ나희냐 엇덧타 인각화상(獜閣畫)을 누고 몬져 ᄒᆞ리오.”가 있다.

또 남이(怡)의 시로 “장검을 ᄲᅡ혀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대명천지에 성진(腥塵)이 ᄌᆞᆷ겨셰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볼고 ᄒᆞ노라.”라고 무인의 기개를 읊은 시조가 있다.

현대시로 백두산을 읊은 시는 최남선의 〈조선유람가〉와 〈귀명가〉를 비롯하여 많이 있지만, 그 중에도 참전시인 장호강(張虎崗)의 〈내가 쓰러지거든〉을 보면 “끝내 바라던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채/ 이름도 없는 싸움터 산마루에 내가 쓰러지거든/ (중략)/ 정녕 그 어느날이고/ 바스러진 해골 가루가루 싸락눈처럼 휘날리어/ 천고에 깊은 천지 속으로 영원히 잠들 것이리라.”로 되어 있는데, 같은 민족으로서 분단된 국토에서 동족상잔의 아픔과 한이 여실히 표현된 작품이다.

진태하(陳泰夏)는 1984년 7월, 국토분단 이후 한국 국적으로서는 최초로 민족의 성역 백두산을 등정한 감격을 ‘백두산’이라는 시로써 토로하였다.

“민족도/ 국토도/ 분단된 슬픈 역사 속에/ 통일의 그 날을 기다려/ 하마하마 사십년/ 세월의 기만(欺瞞)에/ 분노는 열화처럼/ 이역(異域)길 돌아 돌아/ 아득한 신비의 빛을 따라/ 신들린 걸음으로/ 민족의 성지(聖地), 국토의 시원(始原)/ 백두산을 찾아/ 장강(長江)을 넘고 황하(黃河)를 건너/ 잃어버린 우리의 땅/ 만주(滿洲)벌 수만리(하략).”

최근의 백두산에 대한 장편시로서는 1987년 발행한 고은(高銀)의 《백두산》이 있다. 이 시는 전체 4부로서 8권을 출간할 예정인데, 현재 1부 2권이 발간되었다.

머리말에서 “그런데 시의 시발인 백두산은 정작 자료와 상상의 세계로서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저자는 백두산을 등반해 보지 못하고 작자의 상상과 동경 속에서 백두산을 묘사하였다.

이 시의 서시를 보면 “장군봉 망천후 사이 억겁 광풍이여/ 그 누구도 다스리지 못하는 광풍이여/ 조선 만리 무궁한 자손이 이것이다/ 보아라 우렁찬 천지 열여섯 봉우리마다/ 내 목숨 찢어 걸고 욕된 오늘 싸워 이 땅의 푸르른 날 찾아오리라.”라고 쓰여 있다.

북한에서도 〈백두산〉이라는 장편 서사시가 발표된 바 있으나 백두산을 무대로 한 김일성의 행적을 미화한 것으로, 문학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근래 백두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안수길(安壽吉)의 〈북간도 北間島〉를 들 수 있다. 1959년 4월 《사상계 思想界》에 제1부가 발표되면서 시작하여 1967년에 제5부로서 완료되었다.

문학평론가 백철(白鐵)은 이 소설에 대하여 “해방 뒤 10여 년 내의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 〈북간도〉가 아니던가 느껴진다. 그만큼 〈북간도〉는 근래의 우리 문학사를 대표한 작품인 줄 안다.”라고 평하였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북간도가 배경으로 되어 있으나, 백두산 일대의 묘사와 그에 얽힌 전설도 많이 삽입되어 있다. 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삶의 강인한 정신력이 등장인물 중 한복이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한복이는 백두산의 혼을 닮아 있다. 그 밖에 이미륵(李彌勒)도 그의 저서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백두산 주변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백두산은 민족 발상의 성지로서 이에 대한 전설도 적지 않다. 백두산에 대한 전설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탓이겠지만, 특히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많이 전래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서 수집하여 발간한 전설 고사집 속에 백두산에 관한 전설로,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백두산의 사냥군과 호랑이〉·〈오늘날 왜 호랑이가 보기 드문가?〉·〈백두산의 화마〉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는 우리 민족의 발상과 재미있게 연관을 시켰으며,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마치 신앙처럼 숭상하고 좋아하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백두산은 단군의 개국신화 외에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탄생설화와 관계가 있다. 이 설화의 줄거리는 왕건의 아버지 융(隆)이 백두산 기슭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명한 승려 도선(道詵)을 만나 성자를 낳을 집터를 얻음으로써 왕건을 낳고, 그 성자가 자라서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백두산 근처에 단군의 자손인 우리 민족을 수시로 괴롭히던 이민족의 집단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래비가 내리어 그 지역을 덮어버렸다. 그리하여 지금도 백두산 밑 무산땅 최가령 동쪽에 표면은 흙이지만, 파보면 5∼6척이나 모래가 덮여 있고 그 속에는 또 흙이 있다는 설화도 있다.

백두산에는 우리 민족뿐 아니라, 북방의 여러 민족의 발상설화도 얽혀 있다. 청나라에서는 자기들의 조상인 애친각라(愛親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상하여, 1677년에는 대신 각라식목눌(覺羅式穆訥)을 파견하여 백두산을 탐사하였으며, 1684년에는 장백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옹정제(雍正帝) 이후는 길림장군(吉林將軍)의 관리하에 춘추로 중월(仲月)에 제사를 지냈다.

《개국방략 開國方略》이라는 책에 청제(淸帝)의 탄생설화가 있다. 곧 백두산에 포륵호리지(布勒湖哩池)라는 천지가 있는데, 선녀 세 자매가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신작(神鵲)이 붉은 열매를 물고 와서 셋째선녀의 우의(羽衣) 위에 놓았다. 셋째 선녀는 이 열매를 먹고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의 이름을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 성을 애친각라라 하였으니, 곧 청제실(淸帝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형태로, 두만강변에 지암이라는 바위 근처에 이좌수가 살았는데, 지암 물가에 사는 수달의 일종인 노라치라는 짐승이 좌수의 딸과 관계를 하여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커서 청나라 태조인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백두산은 높이 2,155m의 고원에, 곧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바다처럼 깊고도 넓은 호수인 천지를 가지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거듭 폭발한 화산의 분화구로 만들어진 산세 또한 기승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발상의 성지이기 때문에 그 실경 자체가 미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많은 화가들이 백두산의 신비를 화폭에 담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동양화가 김기창(金基昶)·민경찬(閔庚燦) 등의 대작이 있다.

사진 작품으로는 진태하가 1985년 3월에 《조선일보》에 보도하면서 전국에 백두산의 천연색 사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백두산에 대한 음악은 우리의 국가(國歌)로부터 적지 않은 노래들이 있다.

이 가운데 〈조선 유람가〉는 1947년에 최남선이 작사하고 김영환이 작곡한 것으로 당시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에서도 애창하였던 노래다. “대지의 거룩한 힘 기둥이 되어/ 한울을 버틔고 선 백두의 성산/ 맹호의 수파람이 울리는 거기/ 성인이 나셨고나 영웅 길럿네….”

박영만이 작사하고, 한유한이 작곡한 〈압록강 행진곡〉은 제목과는 달리 주로 백두산을 노래하였다. 또한 1985년 진태하가 작사하고 황문평이 작곡한 〈아! 백두산〉이라는 노래가 있다.

“홍익인간 터잡은 백두산 이지구의 정수리/ 단군왕검 태나신 천지연 오색으로 넘치고/ 바위마다 새겨진 배달의 민족역사 드높다/ 아 아 민족의 성역 백두산에 모여서/ 남북의 아들딸아 민족의 정기를 높이자/…….”

이처럼 우리 나라에 있어서 백두산은 단순한 산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배달겨레의 가슴마다 깊숙이 아로새겨 존재하는 민족의 영산이요, 국토의 성역(聖域)이요, 통일된 신앙이다.

단군왕검으로 줄잇는 민족의 생명이 이곳에서 시원하고, 바다 멀리 제주도·울릉도까지도 국토의 맥이 이곳으로 줄닿고, 민족 역사의 뿌리가 이곳에 터잡고 있음을 믿어 왔기 때문에, 반만 년 애환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면면히 동경의 성산(聖山)으로 숭상하여 온 것이다.

우리의 개국신화로부터 시작하여, 전설·설화·시·소설·수필 등 우리 민족의 전통문학과 관련지어지지 않은 작품이 없을 만큼 유구한 역사의 맥을 잇기 때문에 우리 한민족을 ‘백두산족’이라고 자처할 정도로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의 가슴 속에 백두산의 혼이 잠재되어 있다.

나라의 주권을 강탈당하였던 민족항일기에도 백두산은 곧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곧 VOA(미국의 소리) 우리말 방송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될 때, 그 방송의 시작을 백두산 호랑이의 포효 소리를 세 번 낸 다음 아나운서가 “백두산 호랑이”하면서“여기는 자유의 소리 우리말 방송입니다…….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고 방송하였다.

일제침략하에 방송도 마음대로 못 듣던 시절, 백두산 호랑이의 포효 소리로 시작되는 이 방송은 우리 동포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은연중 독립심을 고취하였던 것이다. 이 방송에서 ‘백두산’이라는 말이 빠져 있었다면 그처럼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가사는 아직도 확실한 작사자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민족이 고난에 처하여 있을 때, 누군가의 입에서 불리어진 것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곧 민족이 수난을 당하던 때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고 가사를 지은 것은 단순히 조국의 영원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민족혼을 잃지 말자고 피를 토하듯 외친 것이다.

백두산은 일찍이 그 명칭이 ‘불함(不咸)’, 즉 신(神)의 산으로 일컬어 온 것처럼 한결같이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신성시되어 있는 점이 세계 어떤 산과도 다른 점이다.

그 실증으로 《북사》와 《봉천통지 奉天通志》에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은 신성한 백두산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자신이 배설한 일체의 오물을 준비해 간 그릇에 담아 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처럼 외경(畏敬)받는 산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또한 당나라 때, 편찬된 《괄지지 括地志》에는 백두산의 조수초목(鳥獸草木)은 모두 백색이라고 기록할 만큼 상서로운 산으로 추앙하였다.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산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백두산 신령께 제사를 지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역사와 더불어 존재하였고, 우리 민족에게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불굴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민족혼을 고취하였고, 언제나 백두산을 중심으로 화합 단결하고, 하늘과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신앙심을 낳게 하였으며, 미래의 밝음으로 지향하는 우리 한민족의 내일을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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