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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규엽 蔡奎燁;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가수

류지미 2023. 11. 9. 06:40

 

⚘채규엽-봄노래 부르자1930년(봄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sXWlrhhi9ag

 

 

봄노래 부르자(1930) -

채규엽 노래 서수미례 작사, 김서정 작곡

 

1.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때(계절.봄) 돌아 꽃은 피고

새우난 이봄을 노래하자 강산에 동무들아

모두 다 몰려라 춤을 추며 봄노래 부르자

2.

오너라 동무야 소래(소리)를 높이 봄노래 부르면서

이 강산 잔디밭 향기 우(위)에 먼(민)들레 꽃을 따며

다 같이 이 봄을 찬미하자 이 봄이 가기 전

3.

오너라 동무야 피리를 맞춰 이 노래 부르면서

엉큼 성 뛰어라 씩씩하게 봄 잔디 풀밭 우(위)에

다 같이 뛰잔다 엉금 성금 이 봄이 가기 전

채규엽 奎燁

 

1920년대 중반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중앙음악학교 성악과에서 공부하였다. 1928년 서울에서 독창회를 가지기도 했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해 극단 토월회와 취성좌의 공연에 막간가수로 출연하였다. 1930년 3월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봄노래 부르자〉와 그가 직접 작사·작곡한 〈유랑인의 노래〉를 출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직업가수가 되었다.

 

유랑인의 노래 1930 채규엽, 채규엽 작사 작곡 [ 19세 ]

https://www.youtube.com/watch?v=knSXUcXlTGs

 

여름 저녁 시원한 바다를 찾아

일엽편주 둥실 띄워라 달맞이 가자

저 달마저 내 가슴의 이 설움 풀까

아 나의 일생 고향이 그립기도 하다

 

어이여차 놀 저라 노래 부르며

넓은 바다 푸른 물 위에 정처 없이도

흐르는 저 달빛 따라 이 몸도 함께

아 나의 이 배 끝이 난 데 내 고향일까

 

(저는 이 시대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쇠잔의 비감을 감출 수가 없읍니다. 이 시대는, 호시탐탐, 종교를 앞세운 서구 열강들의 각축전이, 순박하기 그지없던 민족을, 정신적 혼란의 극한 위기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민족의 결정적 패착인 일제의 강탈은, 물심 양면의 수탈로, 전도의 암운을 걷어 낼 도리가 전혀 없었던 민족적 암흑기였읍니다. 바라건데,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우리 문화를 접할 때마다, 냉정을 견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읍니다. 게시자 은발촌)

 

 

그의 음반 발매는, 일본 콜럼비아레코드사의 경성지사 설립 축하연 때 근화여학교 음악교사였던 그가 일본어로 노래를 부른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 취입한 레코드에 '성악가 채규엽'으로 인쇄되어 있었는데, 이는 당시 대중가요와 성악이 아직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봄노래 부르자〉는 곧 수상한 곡으로 낙인 찍혀 발매 금지되었다. 강산에 봄이 오는 것을 꿈에서 가만히 그려본다는 노랫말이 일제의 의심을 샀던 것이다.

 

 

1931년 그는 일본의 엔카 〈술이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한국말로 취입해 히트했고, 이후 광복이 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엔카 풍의 대중가요가 유행하였다. 또 호스티스의 염세자살을 주제로 한 〈봉자의 노래〉를 널리 유행시키는 등 그는 오케이레코드, 태평레코드, 포리돌레코드, 이글레코드 등을 통해 엔카풍의 수많은 노래를 발표하며 '유행가의 패왕'으로 불릴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1935년에는 〈삼천리〉에서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남자가수 부문 1위를 차지하며 최고의 전성을 누렸다.

[유행가 앨범] 차갑고 푸른 한강 물 속에 사라진 사랑의 꿈, 봉자의 노래(채규엽)

https://www.youtube.com/watch?v=fyWZSlxS5VQ

1934년에 발표된 유도순, 이면상, 채규엽의 작품.

 

봉자의 노래, *병운의 노래

김봉자(본명 김갑순, 카페여급)와 노병운(의사, 유부남)의 비련 이야기... 봉자 한강교 투신 자살, 이틑날 병운도 그 자리에서 투신 자살.  훗날 '병운의 노래'도 등장함

 

* 유도순  작사   1940년대 신의주 거주 문필활동,  1945년말  소련군에 의해 피살설 

*이면상  작곡

*채규엽  노래

봉자의 노래 峯子の歌 계몽기가요

昭和8年

https://www.youtube.com/watch?v=GvxhVXMcIV4

 

 

봉자 (峯子) 의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l58GotFyIBc

 

 

 

그 무렵 콜럼비아레코드 본사에서 설득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하세가와 이치노[長谷一郞]라는 이름으로 3년 동안 활동하였다.

 

그의 인기는 1937년 〈명사십리〉를 부른 뒤로 점차 수그러들었다. 당시 그는 일본군 장교 복장으로 공석에 나타나 좌중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으며, 막강한 친일단체였던 대정익찬회 소속의 명함을 돌리며 자신을 뽐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일본군대에 비행기를 헌납하자며 모금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이 무렵 채규엽이 일본 귀족의 딸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보도되자 언론에서는 내선일체의 훌륭한 본보기라는 칭송이 쏟아졌다. 1943년에는 은퇴를 선언하고 일본 육군에 지원하는 돌출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명사십리(明沙十里) 1937 채규엽(蔡奎燁)

https://www.youtube.com/watch?v=f6htTRYFu7E

 

명사십리 1937 채규엽, 장재성(張在星)작사, 죽강신행(竹岡信幸)작곡

 

[ 명사십리 - 채규엽 ] = [ 思い出の江の島 - 霧島昇 ]

 

봄도 짙은 명사십리 다시 못 올 옛 이야기

해당화에 속삭이던 그 님이었건만

서산 너머 지는 해야 날아드는 갈매기야

포구도 백사장도 꿈이 었더냐

 

일몰창산 날 저문데 아득하다 저 수평선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님이 었건만

한번가서 못 온다는 부질없는 청춘이라

울어서 이 한 밤을 세워나 보리

 

다시 생각 말자 해도 차마 어이 잊을소냐

백년 살자 맹세하던 그 님이 었건만

한도 많은 우리 신세 허물어진 인연이야

해당화 부여잡고 한숨 지누나

 

[ 원곡 ] [ 思い出の江の島 - 霧島昇 ]

 

思い出 語れば 綠の强の島,,, (오모이데 카타레바 미도리노 에노시마)

波さえ ほほ笑む 君と二人 (나미사에 호호에무 키미토 후타리)

行く 夕日よ 群れとぶ かもめよ (오치유쿠 유히요 무레토부 카모메요)

冲(おき)も 渚(なぎさ)も 夢映(うつ)す (오키모 나ㅇ기사모 유메우츠스)

 

遙かに 暮れゆく 真日き 富士の峯 (하루카니 쿠레유쿠 마시로키 후지노네)

仰ぐも なつかし 君と二人 (아ㅇ구모 나츠카시 키미토 후타리)

行きては 帰らぬ 恋しき 春ゆえ (유키테와 카에라누 코이시키 하루유에)

流す 淚も 輝(かがや)きて (나ㅇ가스 나미다모 카ㅇ가야키테)

 

想えば ひととせ 綠の江の島 (오모에바 히토토세 미도리노 에노시마)

行く末 期待し 君と二人 (유쿠스에 키타이시 키미토 후타리)

悲しき 人の世 果敢なき 世道よ (카나시키 히토노요 카칸나키 요미치요)

せめて 今宵は 案(やす)らかに (세메테 코요이와 야스라카)

 

 

8·15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에도 악극단 등에서 공연을 계속했으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지자 일제강점기 창씨개명과 친일행적 등이 논란거리로 대두될 수 있어서인지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했다.

 

1948년경 고향인 함경도로 간 이후 행적이 묘연했는데, 평양에서 출판된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라는 책에 채규엽이 1949년 고향 함흥에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월북 사실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