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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ro Antonio Stefano Mascagni- Cavalleria Rusticana-INTERMEZZO

류지미 2024. 1. 7. 06:45

Pietro Antonio Stefano Mascagni

(1863~ 1945)

 

 

 

Cavalleria Rusticana-INTERMEZZO-Georges Prêtre-Chorégies d'Orange 2009

https://www.youtube.com/watch?v=ykUCfqvnI9I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 中 간주곡(Intermezzo).

 

 

생애

1863년 12월 7일 이탈리아 중부 지역인 토스카나 주의 리보르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빵집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들을 법조계로 나가게 해서 성공하게 하려 했지만, 마스카니 본인은 오히려 음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아버지와 다툰 끝에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미 10대에 교향곡 C단조와 아베 마리아같은 종교음악을 작곡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881년, 제사장(In Filanda)이라는 칸타타를 작곡해 밀라노에서 상을 받고 밀라노 음악원에서 폰키엘리 밑에서 배웠는데 이때 5살 선배 자코모 푸치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1년만에 밀라노 음악원을 그만두고 순회 오페라단의 작곡자겸 지휘자로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이후 체리뇰라라는 곳에서 음악교사 일을 하며 정착한다.

마스카니 인생에 가장 중대한 시점은 1889년으로,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계를 이끌던 음악 출판사가 신춘문예같은 식으로 단막 오페라를 공모하는 대회를 열자 한편의 오페라를 작곡해 제출했는데 이것이 바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였다. 이듬해(1890) 초연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현재 베리스모 오페라의 효시이자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동시대의 작곡가 루제로 레온카발로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성공을 보고 《팔리아치》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지만 레온카발로도 팔리아치 이후 성공작을 내놓지는 못했다. 푸치니의 4년 선배인 카탈라니도 그렇다. 그는 푸치니에 필적할만한 5편의 오페라를 남겼는데, 죽기 불과 1년 전에 쓴 라 왈리 기억되고 있는 정도다.]

마스카니는 이 처녀작의 대성공에 고무되어 본격 오페라 작곡가로 나섰으며 이후 14편의 오페라와 1편의 오페레타를 남겼는데, 아쉽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이후에는 인상적인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그의 오페라는 대부분 공연 초반에만 잠깐 관심을 끌다가 금세 묻혀버렸는데, 그나마 친구 프리츠(L'amico Fritz)나 일본을 배경으로한 이리스(Iris)가 이탈리아 밖에서 좀 알려졌을 뿐이다.

게다가 말년에는 무솔리니를  지지하고 (오페라 "네로네(Nerone)" ,,)  적극적으로 파시즘에 동조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 . 결국 1945년 4월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자 마스카니도 무솔리니 지지자였다는 이유로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말았으며 가난과 실의에 빠진 마스카니는 무솔리니가 죽은지 몇달 뒤인 1945년 8월 2일 로마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향년 82세.

 

평가

전술한 것처럼 자신의 첫 오페라이자 대표작이 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베리스모 오페라의 효시로 불리고 있으며 이 작품이 성공한 이후 비슷한 유형의 베리스모 오페라가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27살의 젊은 음악가 마스카니는 이 작품을 통해 잠재력을 인정받았지만 이 작품 이후에는 이렇다 할 문제작을 내놓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베리스모 오페라의 대표주자의 자리는 5살 선배이자 친구였던 자코모 푸치니에게 내주어야 했다.

21세기 이후 클래식계는 잊혀진 작품의 발굴에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마스카니의 작품에 대한 발굴은 2010년 이후에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가 무솔리니를 지지했다는 전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매너리즘이다. 즉, 카발레리아의 성공 이후 그의 작품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이 작품의 작법을 답습하고 있으며 그 이상의 성취를 보여주지 못했던 것. 지속적으로 새로운 수법을 도입하고 음악적 실험을 추구했던 다른 유명 작곡가들과 달리 마스카니는 초반의 성공에 안주하면서 더 이상의 모험을 하지 않았던 탓에 그의 작품은 후기로 갈수록 오히려 작품성이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카발레리아를 제외하고 관심을 받았던 친구 프리츠나 이리스도 모두 초기에 속하는 작품들이며, 급기야 파시즘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있는 마지막 오페라 네로네는 내용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정말 눈뜨고 보기 힘든 망작이 되어 버렸다.

대작곡가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포텐을 터뜨리지 못하고 결국 원 히트 원더 작곡가에 머물러 버린 안타까운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one-hit wonder, nine-day's wonder

정의


미국의 음악 산업 종사자들은 빌보드의 핫 100 차트의 40위 안에 든 것을 "흥행"(hit)이라 간주한다. 따라서 이러한 점만 본다면, 원 히트 원더는 핫 100 차트 40위 안에 한 번만 진입했던 아티스트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강남스타일로 일약 유명해진 싸이는 원 히트 원더가 아니다. 다음 싱글 GENTLEMAN과 HANGOVER가 각각 빌보드 핫 100 5, 26위까지 올랐기 때문.

웨인 잰식의 《The Billboard Book of One-Hit Wonders》(1998년)라는 책에서는 원 히트 원더를 좀 더 보수적으로 정의하는데, 이에 따르면 "원 히트 원더는 빌보드의 전국 톱 40 팝 차트에 딱 한번만 진입한 그룹(act)"이다. 따라서 그는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등을 원 히트 원더 가수의 범주에 넣었다.

영국에서 원 히트 원더는 영국 싱글 차트의 40위 안에 딱 한번만 진입했던 가수나 밴드를 지칭한다. 이 용어는 기네스 북의 "히트 싱글 편"(Guinness Book of Hit Singles)에서 1970년대부터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정의는 훨씬 엄격하여, "단 하나의 싱글 차트 1위"만 낸 가수로 정의 내렸다.

위의 원 히트 원더의 정의와 비슷하게 국내 차트를 기준으로 쓸 수도 있다. 음악계의 규모가 미국이 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미국 빌보드의 40위 이내와 적절히 대응되는 건 한국 음악 차트 10위 이내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에도 가요톱의 영향으로 10위 안에 1번이라도 들어야 히트곡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멜론 차트 실시간 10위 안에 잠깐 들었다고 해서 히트곡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기준들과는 다르게, 대중들은 보통 어느 한 싱글의 인기가 넘사벽인 경우를 칭한다. 나머지 싱글이 상업적으로 성과를 냈어도 인기가 충분히 엇비슷하지 않다면 원 히트 원더라고 생각한다. 국내에서는 화개장터의 조영남, 호랑나비의 김흥국, 편지의 김광진이 대표적인 사례. 세 가수 모두 대 히트곡들 말고도 히트곡들이 많이 있음에도 저 노래가 많이 기억되다 보니 착각되곤 한다.

딱 1곡이 인기를 끈 것은 맞지만 충분히 히트하지 못했으면, 원 히트 원더가 아니라 반짝 가수, 중박 가수 등으로 부르는 게 맞다. Hit도 아니고 wonder도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