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iting Articles

96세 한영섭“매일 100회씩 팔굽혀펴기·턱걸이”…“자세를 낮추라” 평생 좌우명 실천

류지미 2024. 3. 14. 20:54

96세 한영섭“매일 100회씩 팔굽혀펴기·턱걸이”…“자세를 낮추라” 평생 좌우명 실천[100세 시대 名士의 건강법]

박현수 기자입력 2023. 6. 1. 09:31수정 2023. 6. 1. 09:43
 
■ 100세 시대 명사의 건강법 -한영섭 6·25종군기자동우회장
6·25전쟁 시작과 휴전 알리고
‘흥남 철수’현장서 유일 보도
대한민국 최초 방송종군기자
실내 자전거 타고 산책까지
워낙 식사량 많아 체중 늘어
최근 아침식사 줄여 다이어트
한영섭 6·25종군기자동우회장이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 인근 공원에서 팔굽혀펴기 시범을 보이고 있다. 그는 처음 하는 경우나 고령층은 벤치 등을 붙잡고 무리하지 않게 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글·사진=박현수 기자

 

‘한 손에는 마이크, 다른 한 손에는 총’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 종군기자 겸 6·25참전군인인 한영섭(96) 6·25종군기자동우회장은 한국전쟁의 시작과 끝을 세상에 알린 유일한 증언자다.

 

“38선에서 대규모 접전이 벌어졌습니다. 귀향 중인 장병들은 속히 귀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시작한 1950년 6월 25일 오전 6·25전쟁 발발뉴스가 당시 유일한 방송국이었던 서울중앙방송국(현 KBS)을 통해 전국으로 송출됐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 보도한 최초의 전쟁소식으로, 이 기사를 작성한 주인공은 한영섭 기자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북한 전 지역 함락을 눈앞에 둔 시점에 중공군 개입으로 함경북도 청진에서 철수작전이 떨어지자 장진호전투에 투입됐다가 후퇴하는 미군과 흥남에서 합류해 그 유명한 ‘흥남철수작전’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보도한 유일한 기자도 그였다. 격전의 현장이었던 청진과 흥남, 원산 등 최전선까지 다니며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 전장의 상황을 세상에 알렸다.

 

펜과 마이크를 든 종군기자로, 때론 군인으로 총을 들고 북한군과 싸우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 후 1951년 7월부터 시작한 휴전협상이 약 2년간 이어졌고, 지루했던 휴전협상 현장도 그는 모두 지켜봤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그의 방송 보도 첫 마디는 “이제 총성은 멎었습니다”였다. 6·25전쟁의 시작과 끝을 보도한 유일한 기자였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한영섭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6.25 전쟁 영웅’이다.

한영섭 6·25종군기자동우회장이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태평로1가 한국프레스센터 광장에 있는 조형물 ‘굽히지 않는 펜’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그는 “총성은 멎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전쟁에 대비하려면 국민 안보의식이 투철해야 한다. 국가가 힘이 있어야 하고, 군이 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쟁이 끝나고 KBS 보도실장(현 보도본부장) 재직 시절 장면 내각이 보도검열을 하겠다고 하자 “자유당 정부 때도 하지 않던 보도검열을 민주정부를 자처하는 정권이 검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해 그만둘 정도로 언론인으로서 강단과 소신을 가졌다. 이후 사단법인 한국방송인동우회장, 6·25종군기자동우회장, 대한언론인회 원로상임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각종 매체와 군부대 등을 돌며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안보의식 강조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박기병 6·25참전언론인회장(전 대한언론인회장) 추천으로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 인근 공원에서 한 회장을 만났다. 인터뷰는 27일 한 차례 더 진행했다. 지금까지 명사의 건강법에 소개한 명사들처럼 그 역시 나이에 비해 건강했다.

 

‘팔굽혀펴기’를 첫 번째 건강비결로 꼽았다. 하루 100회씩 매일 한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이상도 할 수 있지만, 무리라고 생각해 그 정도만 한다. 팔 근육뿐만 아니라 가슴과 어깨, 다리까지 근력을 향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집에서도 쉽게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전신운동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팔굽혀펴기를 오래 한 덕분에 지금까지 병원에 입원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자랑했다. 승용차가 있지만, 건강을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지난 2월 시내버스를 탔다가 누군가 자리를 양보하길래 앉으러 가다가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넘어져 현재 지팡이를 이용하지만, 거의 회복했다. “이처럼 빠른 회복도 팔굽혀펴기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그만의 운동법은 턱걸이다. 하루 100개씩 한다. 요즘은 매달려서 절반만 하는 턱걸이를 한다. 공원에 있는 철봉대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집에 들여놓은 조립식 철봉 기구를 이용한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기만 해도 별도의 스트레칭이 필요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실 팔굽혀펴기와 턱걸이 100개씩은 건강한 젊은 사람들도 하기 버겁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영섭 6·25종군기자동우회장이 지난달 27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능한 근심 걱정을 털어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은 생각이 떠올라 머리와 가슴과 신체를 지배하고 순화해요. 아마 이것이 건강비결이 아닌가 여깁니다”라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집에서 기구를 이용한 실내 자전거 타기다. 보통 1000회 정도 페달을 밟는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이 3가지 운동을 약 1시간 정도 하고 나면 땀이 흠뻑 흘러내린다고 한다. 이 같은 운동은 30대부터 시작해 70년 가까이 해 오고 있다. 이렇게 일과를 시작하고 샤워 후 하는 아침 식사량이 많아 체중이 늘어 요즘은 다이어트 차원에서 토스트와 계란, 우유 한잔으로 가볍게 한다. 그 대신 점심과 저녁 식사는 밥 한 공기를 거뜬히 비운다. “밥심이란 말이 있잖아요. 밥을 많이 먹어야 힘이 납니다”라고 말했다. 집 인근에 있는 공원까지 산책하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과다. 약 30분간 3000보 정도를 기본으로 걷는다.

 

과거에는 어떤 운동을 했는지 궁금했다. 80대까지 30년 넘게 골프를 즐겼다. 홀인원도 한 차례 했고, 한창때는 36홀은 기본이고 54홀을 돌기도 했다. 또 유도는 초단증까지 땄을 정도로 열심히 했고, 축구도 즐겼다.

 

“나이를 먹으니까 생각이 차츰 움츠러들어요. 그래서 가능한 근심 걱정을 털어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은 생각이 떠올라 머리와 가슴과 신체를 지배하고 순화해요. 아마 이것이 건강비결이 아닌가 여깁니다”

 

1950년 10월 2일 청진으로 진격하던 국군을 따라 전선으로 향하다 매복 중이던 인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군인들과 함께 응사하던 중 옆에 있던 상사가 “위험해 자세 낮춰”라고 외마디를 지르는 순간 그는 인민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상사의 마지막 말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고 한다. 한 회장은 “그때 그 상사의 ‘자세를 낮추라’는 조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자세를 낮추라’는 말과 의미는 다르지만,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항상 스스로 돌아보는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해 살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한영섭 회장이 걸어온 길

 

1928년 12월 서울에서 출생했다. 성남고와 동국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고려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49년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공채 1기 기자로 입사했다. 1950년 2월 국방부를 출입하면서 육군사관학교에 입소해 생도들과 함께 2주 동안 군사교육을 받은 경력으로 그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로 자원해 국내 방송인으로는 최초로 종군기자로 종횡무진하며 전쟁 상황을 세상에 알렸다. 전쟁이 끝난 후 내신부장을 거쳐 보도실장(현 보도본부장)을 지냈다.

수 년 전 국군의 날 행사 참석 후 6·25 전쟁중 생사를 함께 했던 전우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김계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한영섭 회장, 유재홍 장군, 김진섭 종군기자, 백선엽 장군. 한영섭 회장 제공.

 

 

보도실장 재직 시절 정부의 보도검열에 반발해 그만두고 월간영자지 ‘코리아 리버티’ 발행인과 사장을 맡았다. 이어 육왕교통(주) 대표이사 사장, 삼양식품(주) 전무이사, 전자제품 부품제조 회사인 T사를 설립해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금성사 성력회(星力會) 회장, LG전자협력회 중앙회장 등을 지냈다. 이후 사단법인 한국방송인동우회장, 대한언론인회 총무이사, 부회장, 감사, 원로상임위원장 등을 맡았다.

 

특히, 그는 방송동우회장을 20년 넘게 맡아 우리말의 우수성을 알리고 바른말 사용을 장려하기 위해 1990년 ‘바른말 보도상’을 제정해 32년째 운영하면서 올바른 우리말 사용하기 운동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제1회 수상자에 이인용(MBC), 문재철(KBS)에 이어 박영선, 정동영, 박광온, 박수택, 조순용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사들이 다수 수상자에 뽑혔다.

 

그는 “국적불명의 언어, 줄임말이 지나치게 많이 사용돼 우리말이 제 모습을 잃고 오염돼 가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말꼴을 지키며 바른말을 쓰는 것은 우리의 혼을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 회장은 또 ‘한일 단파방송연락운동’을 기념하는 물망비(勿忘碑)를 KBS 본관 옆에 세워 해마다 기념 행사를 갖고 일제 말기에 단파수신기를 제작해 국민에게 항일정신을 고취하다 검거돼 옥사한 선배 방송인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이밖에 6·25참전언론인회 창립 산파역으로 참여해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상훈으로는 1959년 대통령 표창과 1996년 수출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대한민국 예절교육의 전당인 ‘예지원’ 원장을 약 35년간 지낸 부인 강영숙(93) 여사는 우리나라 제1호 여성 아나운서로, 결혼 당시 방송인 커플로 주목을 받았다. 슬하에 기원·기두·기조 3남을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가고 있다.

 

한 회장은 요즘 6.25 주요 전투상황을 기록한 전쟁일지를 비롯해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까지를 엮은 ‘나는 이렇게 싸웠다’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다.

 

“평화는 돈을 주고 살 수 없습니다. 6·25는 국민 안보의식이 없어 일어났어요. 유감스럽지만 지금도 그때와 비교하면 달라진 게 없어요. 총성은 멎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대비하려면 국민 안보의식이 투철해야 합니다. 국가가 힘이 있어야 하고, 군이 강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과거의 우를 또 범할 수 있습니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