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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국제여론전: “독립운동은 논리 싸움이다!”

류지미 2024. 3. 16. 10:11

이승만의 국제여론전: “독립운동은 논리 싸움이다!”

입력 2024.03.16.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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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25회>

 

 
1919년 4월 서재필과 이승만 등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조선일보DB

 

“제국의 논리” v. “독립의 논리”

19세기~20세기 세계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한 약소국이 독립을 되찾기 위해선 독립의 논리가 절실했다. 당시 열강들은 자체적으로 아시아·아프리카의 미개발 국가들은 자치(self-government)의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근대 문명의 확산을 위해서 식민화가 불가피하다는 제국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었다. 제국의 옹호자들은 빈곤과 질병의 나락에 굴러떨어진 미개발 지역의 주민들에게 근대 문명의 혜택을 베푼다는 보편적 인권과 자유 무역의 이념을 들고서 식민화를 정당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되어 중국으로 영향권을 확대하고 있던 일본제국은 서구식 근대화론에 범아시아주의(Pan-Asianism)를 섞어서 식민 지배의 논리를 계발하여 유포했다. 일제의 범아시아주의는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일례로 중국 민국혁명(1911-1912)의 아버지 쑨원(孫文, 1866-1925) 역시 일본의 범아시아주의에 적극 찬성했었다. 일제가 식민주의의 논리를 계발할 때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서양 지식인도 적지 않았다. 지난주 소개했던 미국 예일대학의 철학과 명예교수 조지 래드(George T. Ladd, 1842-1921)가 대표적이다. 1906년 이토 히로부미의 초대로 한국을 방문한 래딩은 이후 한국인들은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전형적인 제국의 논리를 설파했다.

 

 

이승만 v. 레딩의 논전, 뉴욕타임스의 논조 변화 이끌어

1919년 5월 11일 래드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3.1운동의 의의를 폄하하고 일제의 한국 통치를 노골적으로 미화하는 문제의 칼럼을 실었다. 이에 대항하여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정한경(鄭翰景, 1890~1985)은 래드의 논리를 비판했고, 논리적 열세에 몰린 래딩이 반론을 펼치자 다시 또 한 번 래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5월 11일부터 6월 1일까지 뉴욕타임스의 지면에서 전개된 “이승만·정한경 대(對) 래드”의 논전은 이승만과 정한경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래드는 사실관계 기술에서 숱한 오류를 범했을뿐더러 한국인의 국민성을 낮춰보는 서양인 특유의 우월의식과 속물근성(snobbism)까지 털려버리고 말았다.

 

 
1919년 5월 11일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자치 능력을 부정하는 일제 예찬론자 래드의 칼럼을 일요일판 4~5면에 걸쳐서 대서특필했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논조가 일본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공부문
 

3.1운동에 대해서 미온적으로 짧은 기사만 다루던 뉴욕타임스는 지난 1919년 6월 15일 뉴욕타임스는 일요판 42면에 “한국이 독립을 선언하다(Korea Proclaims Independence)”라는 제목으로 3.1운동을 꽤 크게 조명했다. 최초의 기사에 비하면 다섯 배 이상의 분량을 할애했다. 래드와의 논전을 치르기 한 달 전인 4월 14~16일 필라델피아 대한인 총대표 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이미 대한공화국 임시정부의 사실상 수반으로 부상해 있었다.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정부가 수립됐을 때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

 

 

 
1919년 6월 15일 뉴욕타임스 6면, “한국이 독립을 선언하다”가 실렸다. 3.1운동을 집중 조명한 꽤 상세한 기사다. 이승만의 적극적인 국제여론전으로 이 신문의 논조가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공공부문
 

독립을 향한 전 세계 한인 대표들의 움직임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래드와의 한 판 논전을 명쾌한 논리로 물리쳤다. 다음 회에서 그 당시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전한 3.1운동 관련 보도를 상세히 보기로 하고, 이번 주에는 예고한 대로 1919년 5월 11일 자 뉴욕타임스 래드의 칼럼에 대한 이승만의 반박문을 완역하여 싣는다.

 

 

“제국의 논리”에 맞서는 “독립의 논리”가 없다면, 그 어떤 나라도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 독립해야만 하는 이유나 명분도, 독립을 이룰만한 실력이나 의지도 못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제국의 논리”에 대항하여 이승만이 제시한 “독립의 논리”를 조목조목 뜯어보자.

 

“일본에 항거하는 한국(Korea Against Japan)”

독립운동에 관한 래드 교수의 견해에 답한다

이승만

 

(뉴욕타임스 1919년 5월 15일 게재, 번역: 송재윤, 이동민)

 

널리 읽히는 뉴욕타임스 칼럼난에 래드 교수의 “한국에서 일어난 봉기의 원인들”(1919.5.11.)이 실렸기에 답변이 필요하다.

 

2천만 [한국인들]이 지금 독립을 위한 투쟁에 발 벗고 나선 상태이다. 이 싸움은 래드 교수조차 “프로이센 군국주의를 본떴다”고 하는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는 투쟁이다. 미국의 시민들은 저명한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맡은 사람의 발언을 무조건 신성하게 여길 공산이 크다. 무명작가의 발언이었다면 면밀하게 검토되겠지만, 래드 교수의 발언은 그러한 검증을 피해 가기 쉽다. 바로 그렇기에 교수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엄중한 책임감이 요구된다. 한일관계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문제의 원문을 살펴보고 래드 교수가 스스로 늘 자신의 책임을 유념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지금 한국에서 거대하게 일어나는 평화적(비폭력) 혁명이 특정 비밀 결사들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확신에 차서 그 단체들을 거명할뿐더러 놀랍게도 여러 나라에 산재한 이들 조직의 인원수까지 제시한다. 이 “정보”의 출처는 어디인가? 래드 교수 자신이 이 모든 단체의 회원은 분명 아니다. 만약 그가 기껏 미국 내에 있는 일본 선동가들의 풍문에 권위를 부여하여 이토록 세밀한 사항까지 말하였다면, 자기 자신의 권위와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풍문을 빌어 말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어야 했다.

 

한국인 독립단은 한국을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도 비밀 결사가 아니다. 분명한 필요에 따라 한국에서는 비밀이었지만, 이제는 모두 과거의 일일 뿐이다. 래드 교수가 놀랍도록 쉽게 그런 말에 속는다는 점, 또 그가 일본의 동화 같은 얘기를 어린아이처럼 맹신한다는 점은 “천도교를 창시한 손헤이케이(Son-hei-kei,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일본식 발음 로마자)가 지난 황제의 아들”이라는 그의 발언에 잘 드러나 있다. 손병희는 작고한 황제의 아들이 되기엔 훨씬 나이가 많을뿐더러(역주: 원문은 “손병희는 작고한 황제보다 훨씬 연상”으로 잘못 기술되었지만, 문맥상 취지를 살려 수정) 두 사람은 전혀 혈연관계가 아니다. 천도교는 “한국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영향이 크다”는 래드 교수의 발언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확실한 비기독교 조직이다. 물론 천도교도들 역시 대한독립을 간절히 바라지만, 천도교도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그러하다.

 
1919년 5월 18일 뉴욕타임스 일요판 38면에 실린 이승만의 칼럼, “일본에 대항하는 한국”
 

래드 교수는 한국인들이 “가장 저열한 수준의 외세에 지배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발언은 일본이 한반도에 보호국을 선포한 1905년 이후에만 적용될 뿐,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한밤중에 한국의 왕후(Queen)를 암살한 사건에 관한 래드 교수의 설명을 보면 일본을 옹호하기 위해 그가 어떻게 “과녁 너머로 마구 쏴대는(overshoots the target)” 무리를 범하는지 알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도 혐오스러운 살인 중 하나인 그 암살에 관한 설명은 래드 교수의 저술 <<한국에 이토 후작과 함께(In Korea with Marquis Ito)>>에 담겨 있다. 그 책을 이토 후작에게 보여주자 그는 말했다. “너무 좋군요! 너무 좋아서 사람들이 안 믿을 거요.” 아닌 게 아니라 누구라도 그의 설명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황후 시해) 범죄는 분명 황후의 숙적 대원군에 의해 조작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제몫으로 부과된 책임을 결코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219쪽).”

 

아래는 히로시마에서 열린 일본 예심 법원의 미우라 자작에 대한 심리(審理)의 발췌본이다. 예비 진술 이후에 법원 서기가 공증한 문서에는 특히 아래의 “조사 결과(findings)”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피고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1847-1926)가 1895년【원문에는 1896년으로 나와 있으나 실제로는 1895년 9월에 취임했으며,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발생】 천황의 특명전권공사로 서울에서 직무를 시작했음을 확인했다. 조선 정부는 국사의 처리에서 [일본인들에 대해] 날로 전횡을 일삼았다. [이는 보호국이 선포되기 10년 전이었다]. 일본 제국정부의 지도와 조언에 따라 막 재편된 행정 체계는 이처럼 다시 무질서와 혼란이 시작됐다. 조선 조정은 다시 일본을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미우라 등 피고인들은 이러한 사태에 효과적인 처방을 쓰는 것이 시급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대원군이 그에게 은밀하게 접근해서 지원을 요청했다’. [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왕후의 요구에 밀려 섭정직에서 물러났다.] [재판 중인 일본인] 피고인들은 공관에서 [대원군은 불참한] 회의를 열고서 왕후를 살해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 제안을 담은 각서를 대원군에게 보내서 미우라 공사가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담겨 있다고 이야기했다. 대원군은 이에 동의했다.”

 

이 대목까지 스스로 시해 계획의 주동자를 인정하는 미우라의 자발적 진술에 근거한 조사 결과는 부군 옆에 있던 왕후를 끌고 나와 살해하고 광장에서 시신을 불태우는 범행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누구도 그들이 애초에 계획한 범죄를 실제로 범하였음을 증명하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서 그들을 석방하라 명한다.

 

미우라는 순식간에 일본 대중의 영웅이 되었으며, 그는 모든 훈장과 직위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래드 교수는 이러한 대중적 열광에 동조하지 않고서 늘 철저하게 일본의 공식적 입장만을 받아들인다. 그는 죄악을 변호한 후에 그저 “현명치 못했다”고 선언한다.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표지 기사 '조선 왕비 암살”. /공공부문
 
 

이 박식한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믿고 맡겨야만 한다. 왜냐면 어이없게도 “한국의 일반인들은 너무나 미신적이어서 자치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일반인이 미신적이라니!

 

그런 취약점은 일본인들에게도 해당되는가? 래드 교수의 동료 예일대학 카사카와 교수가 콜럼버스 신대륙 도착 400주년을 기념하는 시카고 만국 박람회(1893) 일본제국위원회를 위해 편찬하고 이후 책의 마지막 제4부를 증보한 <<일본제국사>>에서 다음을 인용한다.

 

“1905년 5월 28일 쓰시마 해전(원문은 울릉도 해전)을 보고하면서 토고(東郷平八郎, 1848-1934) 제독은 자신의 승리라는 ‘기적’은 ‘전적으로 천황의 명덕(明德) 덕분이며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는 것’이고, ‘일본군이 입은 상대적으로 작은 손실은 제국 선조들의 혼령이 지켜주었기 때문임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 저명한 교수는 말한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누렸던 ‘자유’의 흘러간 영광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자랑”을 한 적이 없다. 래드 교수는 살아 있거나 이미 죽은 한국인의 발언 중에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줄 단 하나의 문장도 인용할 수 없다.

 

일본인과 그들 선전부대는 흔히 지난 시대 한국 정부를 한국적 실정(失政)의 사례로 들먹이면서 일본 현 정권 아래서의 근대적 발전이야말로 자신들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시대의 한국을 근대화된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구시대의 일본을 근대화된 한국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공정하지 못하다. 일본 자체를 예로 들어보자. 페리(Matthew C. Perry, 1794-1858) 제독이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의 상황은 당시의 한국보다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비할 바 없이 열악했다. 정치적으로 한국 정부는 온전히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었지만, 일본은 수많은 봉건국으로 나뉘고 다시 쪼개져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물질적으로도 일본에는 언급할 만한 도로도 없었으며, 일본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빌딩이나 개량된 위생시설도 없었다. 서양 문명을 수용한 이후 일본은 전 국가가 일변하였다. 한국도 서양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근대 문명의 모든 면에 걸쳐 필요한 개혁을 개시해 왔다. 혼자서 나름의 프로그램을 실행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일본인이 자기 나라에서 이룬 바를 한국인도 자기 나라에서 스스로 능히 이룰 수 있었으리라. 한국에서 일본이 이룩한 모든 놀라운 물질적 성취는 실상 한국인이 스스로 시작하였다. 일본이 현지의 한국인들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 읊어본다면, 일본인들이 옛 정부 아래서 무엇을 누렸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별것 아닐지나 내 것이라오(a poor thing, but mine own).”

 

켐프 양(Miss Kemp, 미상)이 제시한 일본의 약탈 목록은 일부에 불과하다. 일본은 이제 한국인들을 실제로 완전히 벌거벗겼으며, 그들의 땅을 강탈하고, 그들의 사찰과 교회를 파괴하고, 선교 학교를 폐쇄하고, 한국인 자신들의 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을 금지했다. 일본은 한국 어린이들에게 미카도(御門, 일왕)와 그 조상에 대한 숭배를 강요한다. 일본은 한국 학생들의 해외여행을 금지하고, 그들이 일본에서 받을 수 있는 교육도 공업계 학교에 제한하였다.

 

구체제 아래서 한국인들은 적어도 비교적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한국을 다녀간 모든 유럽인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인의 집과 감옥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다. 그들은 동방의 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도덕적 우월성을 보였으며, 지금의 일본보단 그 수준이 한량없이 높았다.

 

목적에만 맞으면 래드 교수는 아무리 하찮은 사건이라도 다 끌어다 쓴다. 그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손아귀에 걸려든 한 한국인이 공금을 애인에게 탕진했다는 이야기까지 끌어온다. 물론 그런 일이 미국에선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래도 잠시 상상력을 발휘해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치자. 어느 정신 멀쩡한 사람이 그런 사건을 내세워서 자치는 미국인들에겐 부적합하다는 논거로 쓰겠는가? 이승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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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
 
2024.03.16 07:00:22
이것인 진정한 독립운동이지 마적질하다가 허술한 주재소하나 불지른것을 독립운동했다고 추앙하는 진보의 탈을 쓴 종북좌파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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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6 06:53:02
지금도 건국전쟁은 계속된다. 이승만 대통령님께서 이룩하신 대한민국을 종북 좌파 간첩 세상으로부터 지켜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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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4.03.16 07:05:30
건국의 역사가 바로 세워졌다면 재인, 재명, 조국, 영길이.... 같은 선동가가 이 나라에 발을 붙일 수 있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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