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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곳이 없다

류지미 2022. 4. 1. 09:59

 

기댈 곳이 없다 [신동욱 앵커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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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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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들은 아직 황량한 잿빛 겨울인데, 노란 꽃이 만발했습니다. 지난주 지리산 자락 구례 마을들을 감싼 산수유꽃입니다. 섬진강 매화와 함께 남녘에 맨 먼저 상륙한 봄꽃이지요. 그런데 시인은 산수유나무가 늦추위에 독감을 앓는 거라고 했습니다.

"밤새 열에 시달린 나무는, 이 아침 기침을 한다. 마른 가지에 번지는 노오란 열꽃…"

서울 한강공원에도 노란 봄이 내려앉았습니다. 버드나무들이 새잎도 나기 전, 꽃눈부터 터뜨렸습니다. 옛 시인은 그러나 찬탄보다 한숨을 토해냈습니다.

"풀빛은 푸릇푸릇 버들꽃은 노릇노릇. 봄바람 불어도 시름은 불어낼 줄 모르고, 봄날은 도리어 마음속 한(恨)만 길게 늘린다"

봄은 어쩌면 계절병일지도 모릅니다. 가려움증처럼 움트고, 발열하듯 꽃 피고, 어지럼증같이 아지랑이 어른거립니다. 달뜬 봄이어서 더 심란한 봄입니다.

"계절의 봄은 분명히 왔지요? (네) 꽃이 피었지요? (네) 우리 인간들의 마음은 왜 그리 냉각한지. 왜 그리 안 풀리는지. 왜 꽃을 못 피우는지…"

조계종 15대 종정, 성파 스님은 어제 추대 법회에서 어려운 법문은 제쳐두고 쉬운 말로 즉석 법어를 냈습니다.

"얼어붙은 마음과 얼굴을 따스한 기운으로 녹여 웃음꽃을 피우자"고 당부했지요.

얼마 전 나온 '삶의 질' 지표를 보면 우리네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종정 말씀이 실감납니다.

"몸이 아파도 집안일을 부탁할 사람이 없다"거나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는 사람이 셋에 하나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습니다.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는 대인 신뢰도도 절반 수준까지 급감했습니다. 한마디로 기댈 사람도, 믿을 사람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코로나 탓이 크다곤 하지만, 모래알처럼 흩어진 한국인의 삶은 코로나 이전에도 유난했습니다.

2020년 초에 나온 OECD '삶의 질 지표'만 해도 '사회적 유대'가 꼴찌를 기록했지요.

어쩌다 이렇게 자기만 알고 사는 각박한 세상이 된 걸까요. 피붙이 아니어도 가족처럼 살갑게 마음 주고받던 옛정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래서야 잘 먹고 잘 입은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나라 이끌고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허구한 날 가르고 쪼개기에 골몰한 탓은 없는 걸까요. 우리는 또 정치 탓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아직 봄이 봄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20년 가까이 한국에 사는 영국 저널리스트의 한국 관찰기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가 비수처럼 가슴을 찌릅니다.

3월 31일 앵커의 시선은 '기댈 곳이 없다'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