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니 꼭...” 北인권 외면한 文 꼬집은 편지 한통
[주간조선]
지난 3월 24일 문재인 대통령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마르주키 다루스만 전 북한인권 특별보고관, 이양희 전 미얀마인권 특별보고관, 소냐 비세르코 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위원, 티모시 조 APPG NK(북한문제에 관한 초당파 의원모임) 정책실장과 데이비드 알톤 APPG NK 공동위원장 등 5명과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국제인권연맹 등 29개 비정부기구. 이들은 문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2019년부터 문 정부가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을 공동발의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마지막 참여를 촉구했다.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우리 휴먼라이츠워치는 29개 시민단체와 5명의 사람을 대표해서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와 완전히 협력하고 북한의 심각한 인권 상황에 대응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냅니다. 제49차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채택할 북한인권결의안에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해주십시오.
북한 인권 상황의 심각성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중략) 그러나 한국 정부는 2019년부터 북한인권결의안의 공동발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한반도 정세를 고려해 평화와 번영을 통한 북한인권 증진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혔지만, 그에 따른 구체적 성과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인권 관련 대화를 배제하고서라도 대북 대화와 협력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했으나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를 확보하지 못했고, 북한의 끔찍했던 인권 유린에 대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중략)
당신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서 인권변호사로 지칠 줄 모르고 일했습니다. 임기 5년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드는 대통령님, 마지막 공식행사인 올해 유엔 인권이사회 결의에서 공동발의 국가로 참여해 북한의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원칙적인 입장을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북한인권결의안 공동발의 끝내 외면?
이들의 지적대로 문 정부는 2019년부터 국제사회의 북한인권결의안 공동발의 요구를 외면해 왔고 현 정부 마지막 북한인권결의안에도 결국 공동발의국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지난 3월 31일~4월 1일(현지시각) 49차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이 채택됐다. 여기에는 47개국이 초안 공동발의에 공식적으로 참여했지만 한국의 이름은 없었다. 대표적인 참여국은 유럽연합(EU) 27개국과 우크라이나, 미국, 호주, 일본 등으로, 구두로 참여 의사를 밝힌 국가까지 포함하면 60개국이 넘는 국가가 이름을 올렸다.(북한인권결의안은 의결 후에도 4월 10일까지 공동발의 의사를 밝히면 된다.) 이번 북한인권결의안이 채택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 정부에도 참여 여부에 대한 질의가 쏟아졌지만,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초안 내용을 검토 중”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지난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내용의 초안을 결의 직전까지 “검토하고 있다”고만 하자 외교가는 정부가 지난해처럼 북한인권결의안에 불참할 것이라고 내다봤었다.
이로써 문재인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외면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지난 3월 24일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면서 그동안 외교부가 내세웠던 ‘한반도 평화 상태 유지를 위한 제반 상황 고려’라는 명분도 무색해졌다. 문 정부는 2017년부터 2018년까지는 북한인권결의안에 참여해 오다 2019년부터 ‘한반도 평화상태 유지’라는 명분을 들어 불참해 왔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한국의 공식 입장을 표명하는 주체는 제네바에 파견돼 있는 유엔 한국대표단이다. 외교부에서 파견하기 때문에 모든 공식적인 의사결정은 외교부에서 내린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청와대, 외교부, 통일부 등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최종 결정이 내려지는데, 사실상 최종 결정에는 대통령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다. 과거 인권결의안 동참 혹은 찬성 여부를 보면 2003년 유엔 인권위원회(현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처음으로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한 이후 지난해까지 노무현 정부에서 5번, 문재인 정부에서 3번 불참 또는 기권표를 던졌다. 외교부 관계자는 “최종적인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은 비공개”라며 “외교상으로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건 제네바 대표부지만 부처들끼리 협의를 거쳐서 최종 입장을 정립한다”고 설명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北 인권 대응
문재인 정부가 2019년부터 북한인권결의안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외교·정책적으로도 큰 실책이었다는 비판이 대내외에서 제기되고 있다. 문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낸 위의 국제기구에서 지적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 대응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주고 국제사회에 불필요한 오해를 샀다는 점에서다. 토마스 오헤아 퀸타나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은 지난 2월 인권상황 조사를 위해 서울을 방문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의 북한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 불참에 대해 “일보 후퇴”라고 비판했다. 퀸타나 보고관은 “유엔 인권기구들은 한국 정부가 북한 인권에 대해 일관적인 입장을 취하기를 바라고 있다”며 한국 정부가 유엔 합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줄 것을 촉구했다.
정부도 이러한 대내외적인 비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외교부에서는 지난해 11월 18일 “컨센서스 채택에 동참했다”는 보도자료를 내고 비판을 피해가려는 시도를 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북한 인권문제처럼 찬반이 의미 없는 사안에 한해서는 표결이 아니라 컨센서스(전원 합의) 형태로 결의안을 채택한다. 표결에 부쳐봤자 찬성표가 많아서 자동으로 채택이 되는 사안에 한해서다. 이때 인권이사회에 가입된 국가 중 하나가 ‘표결을 하자’고 제안하지 않는 이상 결의안은 자동으로 채택된다. 공동제안국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우리 정부는 컨센서스 협의 과정에서 사실 어떤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컨센서스에 동참했다”는 말은 사실상 눈속임에 가깝다. 김수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특히 컨센서스 합의 과정에서는 공동제안국에 이름을 올린다는 게 큰 의미가 있다”며 “결의안에 내가 주체적으로 참여해서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대내외적 비판에는 신경을 쓰면서도 한국 정부는 남북관계가 더 나빠질까 봐 쉽사리 결의안에 동참하지는 못하는 엉거주춤한 입장을 되풀이해온 것이다. 그야말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4년을 보낸 셈이다. 그 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의 오해는 깊어졌고, 남북관계는 계속 나빠졌으며,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한국에 대한 신뢰는 손상됐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인권의 가치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 우리가 일관적인 입장을 보여야 한다”며 “그러지 않으면 어떤 정치적 고려에 의해 보편적 가치를 뒷순위로 둔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고 대북 관계에서 실질적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전략적 방안도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인권문제는 본질적으로 남북관계를 규정한다기보다는 다른 (정치적) 사항에 대해서 명분으로 활용하는 측면이 있다”며 “남북관계가 나쁜 상황에서 우리가 인권결의안에 동참하면 북한이 우리를 비난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인권문제를 건드렸다고 해서 북한이 그것만 가지고 입장을 표명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남북관계가 최고조였다고 평가되는 2018년까지 한국은 북한인권결의안의 공동제안국에 포함돼 있었다.
‘쇼잉’뿐이었던 대북 정책
10년간 동참해온 북한인권결의안에서 발을 빼면서까지 문 정부는 남북관계를 사수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득도 없이 오히려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을 맞은 셈이다.
어쩌다 지금에 이르게 된 걸까. 전문가들은 2019년 2월 대실패로 끝난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남북관계의 분기점이었다고 본다.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법률분석관은 “하노이 정상회담 자체가 ‘쇼잉’이었다”며 “정상끼리 만나기 전에 실무진들이 합의해놓고 만나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가 미·북 양측에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역할이 없었다는 것이다. 신 분석관은 “미국은 우리에게 ‘북한이 원하는 게 뭐냐’고 묻고 북한은 ‘미국이 우리 요구에 응할까’를 묻는 상황에서 우리가 대변인 역할을 제대로 해야 했는데 그야말로 보여주기만 한 셈”이라며 “하노이 회담을 앞두고 노동신문을 통해서 ‘핵보유도 인정받고 제재도 풀릴 것’이라고 홍보하던 북한은 이때 허탕치고 돌아와 한국과의 대화에 나서지 않았다”고 했다.
앞으로 당분간은 이처럼 냉랭한 남북관계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예측이 나온다. 북한은 2017년 이후 4년 만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연달아 발사하며 막강한 무기체계를 과시했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지난달 보고서를 통해 “2022년 북한은 ‘화성-12형’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고각 발사함으로써 향후 핵실험 및 장거리미사일 발사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파기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며 “미국 및 한국에 대한 타협은 없으며 강력한 군사력 건설로 현 국면을 헤쳐나갈 것이라는 의지를 시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 정부가 남북관계를 어떻게 끌고 나갈지 대북 정책의 방향이 주목된다. 일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인권문제를 외면해온 것에 대해 ‘위선’이라고 비판하며 적극적인 역할을 약속한 바 있다. 북한인권결의안 발의에도 다시 동참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지난 3월 29일 국가인권위원회 업무보고를 받고 “인권위가 과거 북한 인권문제에 소극적이었던 측면이 있다”며 “북한 인권문제와 새터민들 인권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 인수위 관계자는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사문화된 ‘북한인권법’을 정상화하고 북한인권대사를 임명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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